第三十一章 본색(本色) (2)
혈마를 그렇게 보내면 안 되는 거였다.
당장 혈마를 추격해야 한다. 역천금령공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혈마가 토초를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니, 보내긴 보냈다. 하지만 뒤를 밟았다.
혈마를 쫓아서 혈천방 본방을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생기에 문제가 생기니 그들이 도주하는 것에는 주의조차 기울이지 못했다.
혈마를 쳐버렸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찾을 방법이 없다.
등여산은 천살단 정보방을 이용하지 못한다. 아예 천살단 사람들과 접촉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연락체계가 먹통이 되었다.
홀리 역시 마찬가지다.
음문촌에 등을 돌린 이상 그들이 홀리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토초를 쫓겠다는데, 그래 쫓아라 하고 정보를 주겠나.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해자수가 밖에 나가서 백방으로 수소문하는 수밖에 없다.
혈마의 움직임을 찾아내면 혈천방을 찾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이것 역시 거의 불가능하다.
혈천방과 천살단은 오랜 세월 동안 싸워오면서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너무 잘 알게 되었다.
일이 벌어지면 도마뱀처럼 꼬리 자르고 도망가는데, 이 일이 아주 익숙하다.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든 그 부분만 잘라낸다. 그러면 다른 조직은 무사하다.
혈마가 죽었을 당시, 천살단의 위세는 혈천방보다 수 배는 높았다.
혈마가 죽자 혈천방은 당장 십 분의 일, 백분지 일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때, 천살단은 혈천방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천살단이 완전 섬멸을 아예 고려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혈천방이 워낙 잘 숨었다. 설혹 완전히 섬멸할 의지가 있었다고 해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혈천방은 본방을 드러낸 적이 없다.
하물며 아무런 정보망도 없는 호발귀가 그들을 찾아낸다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여기서 푹 쉬고 있어 봐. 내가 나가서 알아볼게. 그거 뭐 이 사람 저 사람 돈 좀 찔러주고 그러면 뭐든 말하겠지. 세상일이라는 게 모두 사람이 하는 거니까.”
해자수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해자수가 떠나자 깊은 적막이 찾아왔다.
사람은 많지만 입을 열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옆에 사람이 있어도 말을 나누지 않는다.
주요 원인은 호발귀다.
호발귀가 팔베개하고 누워서 하늘만 쳐다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침묵만 지킨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누군가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더 힘들어진다. 호발귀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꼭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등여산은 자신이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처럼 느껴졌다.
모두 한 몸처럼 잘 섞이는데 자신만 섞이지 못하고 물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다닌다.
천살단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나마 호발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는 그런 이유로 남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호발귀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
더욱이 호발귀 옆에는 홀리가 있다.
비록 계약 관계라고 하지만 엄연히 내정된 사람이 있다. 그 옆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떠나자. 하지만 떠나기 싫은걸.
왜 이렇게 궁색해졌지? 왜 이렇게 못나졌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홀리는 홀리대로 자신만 외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재, 호발귀의 주적은 혈천방이다. 혈마이며, 혈마를 부리는 혈마후 토초다.
그리고 토초는 음문촌 사람이다.
결국, 자신은 이들이 죽이고자 하는 쪽에서 온 사람이다.
호발귀의 마음은 등여산에게 가 있다. 도천패, 당홍도 호발귀만 쳐다본다. 자신이 혈마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이유로 호발귀 곁에 남아있지만, 찬밥 신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홀리는 원래 이런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이 쓰인다.
모르겠다. 당장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이럴 때 가장 편한 것이 운기조식이다. 운공을 취하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다. 자신 역시 말할 필요가 없다.
등여산도 홀리도 운공에 몰입했다.
두 여인은 마음을 내색하지 않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고 분위기까지 모를 수는 없다.
“이거 숨이 막혀서 못 살겠네.”
도천패가 중얼거렸다.
“쉿!”
당홍이 도천패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눈치 없게 그런 말을 하고 있어. 조용히 해.”
당홍이 눈을 흘겼다.
“여자가 둘만 있어도 이런데, 서너 명씩 데리고 사는 놈들은 뭐야?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견디지?”
“그러니까 남자가 중간에서 잘해야지. 잘만 해봐. 얼마나 재미있겠어. 서넛이 뭐야? 능력만 된다면 열도 괜찮지.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당홍이 물어왔다.
도천패는 움찔거렸다.
여기서 말 잘해야 한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어쩌면 오늘 한 말 때문에 오랫동안 시달릴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야! 바람피우는 놈은 확 다 때려죽여야지.”
“정말?”
“그럼. 난 정말 바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난 결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거든. 잠깐!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런 내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는 거네? 갑자기 섭섭해지는데?”
“그렇구나. 난 또 안 그런 줄 알았지. 능력만 되면 서넛도 무방하다. 그쪽인 줄 알았어.”
“지금 뭐라는 거야?”
“좋아. 그럼 바람피우는 놈은 다 때려죽인다고 했으니까…… 죽여봐.”
“뭐? 누굴?”
당홍이 눈짓으로 호발귀를 가리켰다.
“재 둘이야. 양다리.”
“잠깐, 잠깐! 저건 아직 어느 한쪽도 결정이……”
도천패는 갑자기 ‘졌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싸움은 도저히 이기지 못한다. 이렇게 말해도 지고, 저렇게 말해도 진다.
도천패는 전략을 애원으로 바꿨다.
“천하제일 독공 고수가 곁에 있는데 어떻게 곁눈질을 해. 아니, 꼭 그래서가 아니고 내 마음은 오직…… 알잖아. 알면서 왜 이래? 무조건 잘못했으니까,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나 좀 봐주면 안 될까?”
도천패는 슬그머니 당홍의 손을 잡았다.
당홍이 손을 들어서 도천패의 손등을 딱 때렸다.
“가서 사슴이나 잡아 와. 저녁은 먹어야지.”
* * *
쫘악!
뺨을 때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소위 혈마라는 게 여자 하나 간수를 못 해? 제 여자 팔이 잘리도록 보고만 있어!”
토초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차게 후려쳤다.
쫘아악!
혈마의 머리가 옆으로 획 돌아갔다.
혈마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토초만 쳐다보면서 후려치는 손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토초의 손은 솥뚜껑처럼 크다.
한 대만 맞아도 정신이 얼얼할 정도다. 하물며 혈마는 십여 대를 연속으로 맞았다.
혈마의 뺨이 퉁퉁 부어올랐다.
입안도 터져서 입술 사이로 핏물을 실실 흘러내렸다.
토초는 성질이 나서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수십 대를 때려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휴!”
그녀가 손을 내렸다.
혈마는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니다. 살아있는 인형이나 다름없다. 칼에 찔리면 살에 찢기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뺨을 맞고 있지만, 전혀 아프지 않을 것이다.
“아! 내 팔자야. 이런 빙충이를 데리고 다녀야 하나.”
토초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그녀도 여자다. 사내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겼다고 해서 본인조차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을 때는 살짝 분도 발라보고, 연지도 찍어봤다.
그런데 팔이 잘렸다.
흔히 ‘꼭지가 돈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호발귀를 향한 분노가 하늘같이 치솟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만은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다.
토초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죽여! 여기 있는 새끼들 싹 죽여! 알았어! 혈마 호발귀!”
쉬이이익!
혈마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밖으로 나갔다 싶은 순산부터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악!”
“크아아악!”
동네 사람들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갔다.
저들은 자신이 왜 죽는지 영문을 알지 못한다. 혈마가 검을 쓰기 전까지는 어떤 위협도 감지하지 못했다. 팔 잘린 무인이 누군가에 집에 들어와서 치료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정말로 느닷없이 날아든 검에 죽는 것이다.
“왜, 왜! 아악!”
“이 아이만은…… 악!”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는다. 무조건 죽인다. 눈에 띄면 죽이고, 숨으면 찾아서 죽인다.
혈마의 이목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걱정하지 마. 너희는 살려줄 테니까. 내 상처를 치료했잖아.”
“네. 네. 감사, 감사합니다.”
중년 부부가 오돌오돌 떨면서 황급히 부복했다.
두 부부는 가장 운이 없는 축에 속했다. 이십여 가구나 모여 사는 마을인데 하필이면 자신의 집에 팔 잘린 무인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짜고짜 이것 해내라, 저것 해내라 명령질이다.
시키는 말을 쫓지 않으면 죽을 게 뻔했다.
시킨 일을 다 해도 결국에서 죽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뒤를 깨끗이 정리하니까.
그래도 혹시 살려줄지 모른다는 기대로 숨죽인 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 동네 사람들이 다 죽는다. 그리고 자신들만 산다.
악운이 천운으로 바뀌었다.
“가서 밥이나 해와. 배고파 죽겠어. 깨작깨작 가져오지 말고 솥째 가져와.”
“네, 네.”
두 부부는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다.
토초는 두 부부가 같이 움직이는데도 잡지 않았다. 부엌 밖으로 나가면 혈마에게 죽는다. 그러니 부엌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밥을 해내야만 한다.
“아아악!”
“커억!”
비명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비명이 하늘을 찢을 듯 거칠게 울리는 것을 보면 상당히 잔인한 죽임을 당하는 것 같다.
밥을 짓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혈마다!”
해자수는 피바다가 된 마을을 보고 당장 혈마를 떠올렸다.
혈마가 아니면 이 짓거리를 할 사람이 없다.
쒜에에엑!
해자수는 빠르게 마을로 들어섰다.
피, 피, 피, 주검, 주검, 주검.
수많은 사람이 죽어 있다.
죽은 사람 대부분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다가 뒤에서 당했다.
검을 쓴 사람은 분명히 무인이다. 하지만 영혼 없이 칼질했다. 무조건 죽이는 데 목적을 두었다. 숨을 빨리 끊겠다는 생각도 없다. 잔인하게 쳐 죽였다.
무인은 주로 머리나 심장을 친다. 그러면 숨이 빨리 끊긴다. 최대한 고통 없이 죽는다.
혈마는 난타했다. 팔과 다리처럼 죽음과는 직접 관계없는 부분까지 연타했다. 한 사람당 적어도 대여섯 번은 검을 맞았다. 너무 과도한 초수다.
“혈마 이놈, 사람이 아니라니까.”
해자수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혈마가 지나간 자리에는 풀뿌리조차 남아나지 않는다. 그러니 산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한데,
“응?”
마을을 살피던 해자수는 그중에 한 집, 아무런 살상 흔적이 없는 집을 찾아냈다.
해자수는 진기를 끌어올리고 한 손으로는 심장을 보호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중년 부부가 부들부들 떨면서 앉아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중년 부부는 느닷없이 들려온 말에 깜짝 놀라서 해자수를 쳐다봤다.
“아니, 나는 괜찮아. 괜찮아. 나 지나가는 사람. 지나가다가 여기 피투성이인 거 보고 온 사람인데, 여기 아주 엉망이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혀, 혀, 혀, 혈마 호, 호발귀.”
중년 아낙이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해자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혈마 호발귀? 정말이오? 여길 혈마 호발귀가 이랬다고?”
중년 부부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피투성이 마을을 쳐다봤다.
괜히 하는 말이나 거짓말이 아니다. 이들 부부는 정말 혈마 호발귀가 이 짓을 했다고 믿는다.
‘하! 이것 봐라?’
해자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혈마가 마을을 초토화하면서 두 사람만 살려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 입을 통해서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이다.
호발귀를 아는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씨알이 먹히는 방법이다.
‘이것들…… 이 짓거리를 다시 시작하네. 호발귀가 맞았어. 살려두면 안 되는 것들이었어. 가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여보쇼. 괜찮으니까 밖에 나가시오. 정신 사납게. 이런 데 있으면 안 돼. 관원을 불러봤자 도움이 안 되니까, 어서 짐 꾸려서 멀리 도망이나 가쇼. 혈마가 또 오려면 어쩌려고 이러고 있어.”
그 말에 중년 부부는 화들짝 놀라서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