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一章 본색(本色) (1)
“진맥 좀 해보자.”
홀리가 호발귀에게 다가와 완맥을 움켜잡았다.
호발귀는 묵묵히 완맥을 내주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어 보인다. 홀리가 죽인다고 해도 목숨을 내줄 것 같다.
츠으읏!
완맥을 통해서 홀리의 진기가 스며들었다.
홀리는 전신 경맥을 더듬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몇몇 혈도를 집중적으로 탐색한다.
대거혈(大巨穴), 일월혈(日月穴), 흉향혈(胸鄕穴)……
중요한 혈이기는 하지만 무인들에게는 대체로 많이 사용하지 않는 혈들을 점검했다.
호발귀는 홀리가 더듬는 혈을 기억했다.
홀리가 이 혈들을 타진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혈마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하다.
홀리는 스무 곳에 넘는 혈을 점검했다.
“이상 없네.”
홀리가 완맥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귀색혼령대법을 알고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오면서 상당히 기대했어. 드디어 너를 내 남자로 만드는구나 하고. 널 죽여야 한다는 점이 불안하면서도, 너와 한 몸이 되는 것은 기대가 되더라고. 이제 다 틀렸네? 풋!”
홀리가 웃으면서 일어섰다.
그때, 호발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방금 그 혈들, 이상이 생긴다면 어떤 증상이 일어나지?”
홀리가 호발귀를 빤히 쳐다봤다.
“알아도 소용없어. 이미 정신을 놓은 후라서. 이상 증상은 일이 벌어진 후에나 나타나. 넌 자각할 수 없어.”
“……”
호발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홀리는 할 수 없다는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끈적거릴 거야.”
“끈적거려?”
“그래. 진기를 움직이면 마치 끈끈이를 붙여놓은 것처럼 끈적거릴 거야. 진기가 잘 흐르지 않고 뭔가 뒤에 남겨진다는 느낌? 뒤에서 끌어당긴다는 느낌일 수도 있고.”
“그렇군.”
“다시 말하지만 그 느낌은 이미 살기가 충천한 다음에나 일어나. 본인은 절대 느끼지 못해.”
“하나만 더.”
“말해.”
“혈마가 되기 전에 자진하는 방법, 가르쳐 줘.”
홀리가 호발귀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 참 이상한 사이다. 죽는 법을 가르쳐달라, 죽여 달라. 매번 하는 말이 이거야.”
“그러네.”
“자진하는 방법 같은 건 나도 몰라. 그리고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그런 말 하지 마. 이젠 나도 슬슬 지겨워져. 우리가 한 건 계약이야. 그런데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잖아. 네가 해달라는 것만 있지.”
홀리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렇게 되면 계약 자체를 다시 생각해봐야지. 아니면 오늘 밤부터 동침을 하던가. 그건 못하겠지? 너 정말 못된 놈이야. 대충 몸 추슬렀으면 와서 일해. 할 일 많아.”
홀리가 걸어갔다.
“나와.”
호발귀가 중얼거렸다.
주위에 인기척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이 숨어서 지켜본다는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호발귀는 누가 있기라도 한 듯 재차 말했다.
“그만 나와. 기어나오고 싶은 거 아니까.”
스읏!
호발귀 말을 들었는지, 한 사람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장진 스님이다. 깨끗한 회색 승복을 입고, 염주를 메고, 손에 목탁을 든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미타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조용히 수도하는 사람을 왜 불러내고 그래!”
장진 스님이 태연히 말했다.
장진스님은 역천금령공과 이령귀화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두 진기가 얽히면 혼돈이 된다.
혈기가 일어난다. 매번 더 강한 혈기가 되어서 멀쩡한 육신을 갉아먹는다. 건강한 정신을 밀어내고, 사람을 죽이라는 잔인한 살인 명령을 내린다.
그동안 장진 스님을 보았던 무수한 시간이 모두 혈마로 가는 길이었다.
호발귀는 이번에도 역천금령공과 이령귀화를 충돌시켰다.
그러자 어김없이 장진 스님이 나타났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다. 자칫하면 막 가라앉은 혈기가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전에는 살짝 마음만 풀어도 들끓던 살기가 가라앉았다.
지금은 죽을힘을 다해도 가라않지 않는다. 온산이 폐허가 될 정도로 파괴를 해야만 간신히 진정된다.
그런데 또 두 진기를 충돌시켰다.
장진 스님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장진 스님이 아니면 누구도 대답해 주지 못할 말이다.
“아미타불! 그래, 왜 불렀어?”
장진 스님이 호발귀 옆에 앉으며 말했다.
호발귀는 장진 스님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자살하는 방법이 있으면 알려주지?”
“자살? 자살하는 방법이야 수천 가지지. 눈 딱 감고 벼랑에서 뛰어내리거나, 접싯물에 코 박고 죽거나, 물귀신이 될 수도 있고. 뭘 가르쳐 달라는 거야?”
“말 돌리지 말고. 알고 있잖아.”
“아미타불. 너에게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주면 난 죽어서 흑승지옥(黑繩地獄)에 가.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불꽃 속에 갇혀서 빨갛게 달궈진 도끼로 사지를 찢겨야 되냐? 그것도 하필 부처 모시는 몸에 묻는 건 뭐야?”
“혈불은 부처라고 안 하지. 악마라고 하지. 부처를 모신다고 하지 말고 악마를 모신다고 해.”
“아미타불! 아미타불! 점점 부처님이 노할 소리만 골라서 하네.”
장진 스님이 피식 웃었다.
장진 스님에게서 해답을 찾기는 틀렸다. 아니,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기는 했지만,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장진 스님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생기란 살아있는 기운이야. 생기 소멸은 죽은 후에나 이뤄져. 목숨이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생기 소멸도 돼. 그러니 생기가 혈기로 바뀌었다고 해서 없앨 수는 없지.”
“죽으면 없어지지.”
“그게 문제라니까. 생기는 죽고 싶지 않아요.”
호발귀가 장진 스님을 쳐다봤다.
생기가 죽고 싶지 않다? 혈기도 마찬가지다. 죽고 싶지 않다. 육신이 힘을 다할 때까지 살인한다. 그러니 혈기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정신부터 빼앗는 것이다.
장진 스님이 호발귀의 눈길을 의식하고는 피식 웃었다.
“살자는 놈이 있고, 죽고 싶다는 놈이 있으면 생기는 어떤 놈 편을 들까? 살자는 놈 쪽 아니겠어? 생기는 어떤 경우에도 살자는 쪽이야. 그래서 늙어서 제 목숨 다 산 인간조차도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고 질질 끄는 거지.”
“그러면 혈기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건가? 지금처럼 멀쩡할 때 자살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거야?”
“몇 번을 말해. 생기의 본질은 산다는 거라니까. 지금은 자살할 생각이 없지? 생기가 멀쩡하니까 당연하지. 그러니까 생기도 네 정신을 빼앗지 않아. 아니, 생기는 원래부터 정신 같은 것 빼앗을 이유가 없어. 모두 살고자 하거든.”
생기가 혈기로 변하면 그때서야 뭔가가 작용한다.
예측은 했다. 충분히 짐작했던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혈마가 되기 전에 알아챌 방도가 없어서 장진 스님을 불렀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장진 스님은 혈마의 정령이다.
혈기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한다. 하물며 혈기를 없애겠다는데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줄까. 절대 해줄 리 없다. 하지만 말하다 보면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불렀다.
“그러면 일단 혈기가 일어나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
“이제 좀 대화가 되네. 그거 별로 어렵지 않아. 그건 그렇고 이번에 혈마와 싸울 때, 재미있는 방법을 썼던데? 생기로 생기를 친다? 이 방법은 예전에 혈마도 사용하지 못했던 거야. 혈기 운용법이 훨씬 창의적이야.”
“그런가?”
“혈마록에 있는 무공보다 네가 사용한 게 훨씬 좋아. 그걸 계속 써봐. 쉽고, 강력하고. 흠! 괜찮았어.”
장진 스님이 활짝 웃었다.
장진 스님은 확실히 악불을 모시는 악승이다.
생기를 자주 사용하면 혈마가 되는 길이 빨라진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장진 스님을 만나는 횟수가 잦아진다. 그러다가 적절한 순간이 되면 저번처럼 지독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악불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생기는 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생기가 오가는 통로는 코와 입이 유일해야 한다.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공기와 함께 영기(靈氣)를 받아들인다. 약하고 오염된 생기는 뱉어낸다.
이런 과정을 해줄 수 있는 통로는 코와 입뿐이다.
그 외, 무공을 사용하듯이 여타 다른 방도로 생기를 사용하면 반드시 오염된다.
몸 안에 있는 생기는 밖으로 배출하면 절대 거둬들여서는 안 된다.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생기는 우주가 새로 만들어낸 깨끗한 삶의 기운이다.
생기를 자주 사용해라? 요사한 악불!
호발귀는 먼 하늘만 쳐다봤다.
장진 스님이 계속해서 무슨 말을 했다. 하지만 스님이 하는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혈마가 되기 직전, 자진해야 한다.
귀색혼령대법을 알게 된 이상, 홀리에게 죽음을 부탁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에서 자진할 수도 없다.
순간적인 혈마는 용납할 수 있다. 혈마가 되었다가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온다면 감당할 수 있겠다.
하지만 순간적인 혈마와 영원한 혈마의 구분은 어떻게 하나?
구분할 수가 없다. 운이 좋으면 정상인으로 돌아오고, 운이 나쁘면 끝난다.
옛날에 생각했던 것처럼 혈마 무공을 쓰지 않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법도 안 된다. 혈천방이 만든 가짜 혈마가 나타났다. 가짜라고는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해서 상대할 무인이 없다. 그것도 네 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생기를 건드리지 않고는 쉽게 이기지 못한다.
혈마가 두 명, 세 명 합공해 온다면 혈마록 무공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
생기를 사용하는 게 불가피해졌다.
‘어떻게 하지?’
호발귀는 암울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등여산이 홀리를 힐끔 쳐다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무 일 없었어.”
홀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호발귀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이번에는 용케 빠져나왔어. 꼼짝없이 걸렸다 싶었는데.”
“다행이네.”
등여산이 옅게 웃었다.
“넌 내 말을 믿니? 무슨 일 저지르고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잖아.”
“두 사람을 믿어.”
“뭐?”
“너와 호발귀. 두 사람 다 거짓말을 할 사람은 못 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어도 괜찮아. 넌 호발귀 부인이잖아. 옆에서 잘 지켜봐 줘. 혈마만 되지 않게.”
등여산이 마음 정리했다는 뜻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너 그 말, 후회 안 해?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거지?”
“그래. 알고 하는 말이니까 걱정하지 마.”
“호호호! 호호호호!”
홀리가 우습다는 듯 한참을 웃었다.
“사람 그만 웃겨라. 말도 안 되는 말을 주절거리려거든 안색이나 감추던가. 네 표정 똥 씹은 표정이야.”
“나는 진심으로……”
홀리가 등여산 옆에 와서 혼절해 쓰러진 사람들을 봤다. 그리고 그 말은 더할 필요 없다는 듯 대뜸 물었다.
“사람들은 괜찮지?”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절만 했어. 호발귀처럼…… 그런 일은 없어.”
“없지. 귀색무는 춘약이 아냐. 익어서 터지기 일보 직전인 석류를 톡 건드릴 뿐이야. 이 사람들은 그런 상태가 아니니까 아무 일도 없는 거고.”
“깨어난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돌려보내도 될까?‘
”언니가 있는데 왜 내게 물어.“
홀리가 당홍을 쳐다봤다.
”야! 귀색무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말 한마디 해주면 될 걸 뭘 톡 쏘니?“
”내가 뭘 쐈다고…… 돌려보내. 괜찮아.“
홀리가 힘없이 말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녀도 맞받아서 뭐라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힘이 쭉 빠져서 말할 기운도 없는 듯했다.
당홍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홀리를 쳐다봤다. 등여산도 같은 심정으로 홀리를 봤다.
”뭔 일 있었어?“
당홍이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홀리가 일어섰다. 그리고 힘없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