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章 뇌격(腦擊) (4)
호발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수많은 시선이 호발귀를 따라붙었다.
좌·우측 숲에 숨어 있는 무인들이 쳐다본다.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본다. 그들 목에 검을 대고 있는 무인도 본다. 초토는 당연히 쳐다본다.
딱 한 명, 혈마가 호발귀를 쳐다보지 않는다.
혈마는 혈마후만 쳐다본다. 오직 혈마후의 명령만 받는다. 혈마가 되면 저렇게 되나. 저런 모습인가.
호발귀는 혈마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봤다.
자신도 혈마가 되면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홀리가 제대로 손을 써주면 죽을 것이고.
그러면 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사람은 혈마인가, 혈마후인가. 혈마는 살인 도구일 뿐이다. 정작 세상을 결딴낸 장본인은 혈마후이지 않나.
하지만 세상은 혈마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직 검을 휘두른 혈마만 이야기한다.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
혈마와 홀리의 싸움을 보면서 느낀 것인데, 혈마에게는 무공이 필요 없다. 혈마는 초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강한 힘과 빠름을 바탕으로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혈마 무공 같은 것이 필요 없다.
굳이 혈천도법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사실 혈마는 무정삼절을 펼쳤지만, 호발귀가 봤을 때는 영 엉터리다. 무정삼절 흉내만 냈을 뿐, 초식의 정교함이 빠지고 대신 난데없이 각법(脚法), 권법(拳法)이 들어가 있다.
무정삼절 흉내를 냈지만, 본능적인 움직임이 지배한다.
그러면 혈마 무공은 왜 필요한 거지? 풀리지 않는 숙제가 많다.
뚜벅! 뚜벅! 뚜벅!
호발귀는 걸어서 토초 앞에 섰다.
“혈마를 또 쓰면 음문촌 사람들 다 죽인다고 했는데, 헛소리인 줄 알았나 봐? 말을 듣지 않네?”
“난 누구한테 협박당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아서.”
토초가 유들유들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것도 적성에 맞는 사람이 있나?”
“어떻게? 얘네들 다 죽여?”
“안 나오면 죽인대서 이렇게 나왔잖아. 나왔는데 또 죽이겠다고 협박하면 이건 반칙인데?”
“얼굴도 반지르르하고, 몸도 좋고. 마음에 들어. 홀리가 널 왜 놔두고 있는지 정말 알 수 없단 말이야.”
토초가 기분 좋은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하나 묻지. 날 어떻게 혈마로 만들 건데? 혈마로 만드는 방법이 뭐야? 알고나 당하자고.”
호발귀는 서둘지 않았다.
검을 쓰는 순간은 한순간이어야 한다. 자칫하면 포로가 다칠 수도 있다.
토초가 말했다.
“너는 그저 편히 누워서 좋은 꿈만 꾸면 돼. 혈마는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만드는 건지 들어보고 싶다고.”
“들을 필요 없다니까. 너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큭큭! 그럼 시작해 볼까?”
토초가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주위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앗! 저, 저것 막아야 해!”
홀리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뭐가? 왜?”
등여산이 같이 놀래서 홀리를 쳐다봤다. 홀리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덩달아 놀라버렸다.
“저거 귀색무야! 귀색무!”
귀색무라는 말에 당홍이 급히 사방을 쓸어봤다. 귀색무가 뭔지 모르지만 마치 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가 귀색무라는 거야?”
당홍이 물었다.
“토초가 손을 들었잖아요.”
“그게 뭐?”
“귀색무를 피우라는 신호에요. 귀색무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호발귀는 역겨운 냄새를 맡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귀색무라는 게 투명하고 악취가 풍기는 독이야?”
“독이 아니라…… 두고 봐. 저기 있는 사람들 전부 정신을 잃을 거야. 아! 이거 어떡하지?”
홀리가 난감한 표정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호발귀를 쳐다봤다.
“저건 해독제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나한테는 해독제가 없어. 귀색무를 쓸 생각이 없어서 준비하지 않았는데. 아! 저거 어떻게 해. 큰일 났네.”
홀리가 그녀답지 않게 쩔쩔맸다.
“단지 정신만 잃는 거야? 아니면 다른 게 또 있어?”
당홍이 물었다.
“정신을 잃긴 잃는데, 어느 한구석은 말짱해져요.”
홀리가 말했다.
“어느 구석이?”
“……”
홀리는 말을 못 하고 당홍을 쳐다봤다.
“그런 거야?”
당홍이 무엇인지 짐작한 듯 두루뭉술하게 물었다.
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까딱 잘못하면 우리 못 볼 꼴 보겠네? 여기서.”
당홍이 놀리듯 웃으면서 말했다.
“언니, 웃을 때가 아네요. 어떻게 하죠?”
“귀색무가 뭔지 대충 알 것 같은데, 호발귀를 믿어봐. 넌 호발귀가 독섬칠공 대가라는 사실을 잊었구나? 독이나 미혼단(迷魂丹) 이런 건 통하지 않아. 호호!”
당홍이 웃었다.
토초가 손을 들어 올리자 숲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독을 피워냈다. 그리고 일제히 뒤로 빠졌다.
저들은 귀무살이 맞다. 신법이 매우 경쾌하고 빠르다. 만약 귀무살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귀무살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고수들인 게 틀림없다.
호발귀는 이제야 저들이 숲에 숨어 있는 이유를 알았다.
저들은 기습하기 위해 매복해 있던 게 아니다. 지금 맡고 이는 냄새,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독분을 피워내기 위해서 숨어 있었다.
“흑!”
비교적 몸이 쇠약한 노인이 먼저 쓰러졌다.
“할아버지!”
곁에 있던 손녀가 쓰러진 노인을 급히 안았다. 하지만 손녀도 곧 쓰러졌다.
호발귀는 당황하지 않았다.
숲에서 퍼트린 것은 독이 틀림없다. 하지만 인체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정신만 잃는다. 쓰러진 노인에게서 생기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죽은 것처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생기는 여전히 푸른빛으로 넘실거린다.
위험하지 않은 독이다. 혼절만 시킨다.
‘이래서 누워있으라고만 한 건가? 이런 식으로 쓰러트리겠다는 뜻이었어?’
호발귀는 천천히 토초를 쳐다보며 말했다.
“홀리가 그러던데, 혈마로 만들려면 주문을 외워야 한다고. 어떤 주문인지 말해줄 수 있나?”
“그 정도야. 구혼음소라고 해.”
“구혼음소. 일단 혼절시키는 것은 알겠고, 구혼음소로 주문을 외우는 것도 알겠는데, 어떤 식으로 혈마가 되는지 설명이 안 돼. 단지 주문만 듣는다고 혈마가 되는 건 아니잖아.”
“킥킥! 내가 홀리 정도만 예뻐도 자신 있게 말하지. 나와 자자고 하면 사내들이 치를 떨더라고. 그러니 미리 알 필요가 없다고 한 거야. 어때? 이제 알고 나니까 후회되지? 차라리 모르고 당할 걸 하고. 하하하!”
토초가 사내처럼 웃었다.
호발귀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사. 혈마를 만든다는 게 이런 방식이었나? 정사하면서 구혼음소로 뇌를 친다. 진단뇌격(震丹腦擊). 음!’
호발귀는 토초가 말한 내용을 금방 알아들었다.
독섬칠공에도 토초가 말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 있다. 진단뇌격이라는 것이다. 정사를 벌이면서 단전을 뒤흔든다. 동시에 진기로 뇌를 강타한다.
주로 상대방을 노예로 만들려고 할 때 사용하는 사악한 방법이다.
남녀 모두 교합을 이룰 때는 회음혈(會陰穴)이 강하게 자극된다. 회음혈은 단전에 가깝다. 반 뼘조차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단전이나 원정에 직통할 수 있다.
남녀가 교합하면 음양 순환이 극렬하게 일어난다. 온 정신이 음양 교합에 집중된다.
그 힘을 응집시켜서 원정을 친다.
불꽃처럼 일어난 힘을 빌려서 혈마의 생기를 건드린다.
사실, 진단뇌격을 가능케 하는 방법은 많다. 하지만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 정사를 통한 진단뇌격이다.
이런 방법은 독문에서도 종종 사용한다.
나쁠 때만 쓰는 것도 아니다. 남녀 교합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심한 중독을 해독할 때도 사용한다. 효과가 지극히 뛰어나서 여타 방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정신을 잃게 하고, 정사하면서 생기를 건드린다. 동시에 구혼음소로 뇌를 자극한다.
홀리가 왜 이 방법을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지 알겠다. 예전의 홀리였다면 당당하게 말하겠지만, 지금의 홀리라면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혈마로 보고 있지 않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정말로 사내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다. 정중히 보내야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자신을 죽여줄 사람이기에 보내지도 못하고 잡고 있다.
굉장히 이기적이다. 안다.
그래서 더 고맙고, 미안하다.
쿵! 쿠웅! 쿵!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 일시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곧 뒤를 이어서 무인들도 병기를 흘리면서 푹푹 쓰러졌다. 숲에서 풍기는 귀색무는 덕성이 굉장히 강하다.
하지만 호발귀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호발귀는 독섬칠공을 펼쳤다. 독망을 형성해서 코로 들어오는 귀색무를 걸러냈다. 그래도 안으로 파고든 독기는 즉시 단전으로 거둬들였다.
여독을 단전에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됐어.’
호발귀는 주위에 있는 무인들이 모두 쓰러지자 비로소 손을 쓰기로 했다.
이것은 처음 생각보다 훨씬 낫다.
모두가 달려들어서 귀무살을 막고, 해자수에게 무인들 처리를 맡긴 것보다 백 배는 잘된 일이다.
쒜에에엑!
생각이 일어나자 신영이 움직였다.
그러자 호발귀의 움직임을 감지한 혈마가 재빨리 튕겨 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가만!”
호발귀가 쩌렁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혈마가 움찔거렸다.
역천금령공의 생기가 혈마의 생기를 강하게 쳤다. 홀리와 싸울 때는 약간만 건드려서 내리치는 손길을 느리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주먹으로 강타한 것보다 훨씬 강하게 타격했다.
“하앗!”
호발귀가 또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생기가 이령귀화에 실려서 뻗어나갔다. 이령귀화가 혈마에게서 흘러나온 푸른 빛을 후려쳤다.
그러자 혈마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호발귀는 이미 검을 뽑았다. 그리고 토초가 미처 방비하기 전에 검광을 번뜩였다.
“악!”
토초가 비명을 내질렀다.
화탄을 들고 있던 오른팔이 팔꿈치부터 잘려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호발귀는 토초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화탄이 쏘아질 것을 우려해서 처음 생각대로 팔부터 잘랐다. 그런 후에 숨을 끊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순간, 무릎을 꿇었던 혈마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무정삼절이다.
호발귀는 즉시 방향을 틀어서 혈마를 향해 제대로 된 무정삼절을 펼쳐냈다.
역천금령공이 일어난다. 생기를 바탕으로 한 무정삼절이 혈마에게 쏟아졌다.
까앙! 깡깡깡! 까앙!
검과 검이 부딪쳤다.
혈마는 사력을 다해서 검을 쳐냈지만 이미 검신이 세 토막으로 부러졌다.
퍼억!
검이 혈마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런데 혈마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도 옆구리를 파고들지 못했다. 마치 강한 갑옷을 친 것처럼 묵직한 반탄력이 생기면서 검을 밀어냈다.
“웃!”
호발귀는 혈마의 찢어진 옷 속에서 금잠사(金簪絲)를 봤다.
금잠사는 매우 귀한 보물이다. 금잠사로 옷을 지어 입으면 매미 날개처럼 가벼우면서도 갑옷처럼 강하다. 실제로 군인이나 무인이 금잠사 옷을 입는다.
배수가 어찌 금잠사를 알아보지 못할까.
‘금잠사까지!’
이때, 혈마가 방향을 들었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는 토초를 낚아챘다. 그리고 재빨리 신형을 날려서 사라졌다.
혈마가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이런 일은 혈마 혼자서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 생각이 없어서 오직 명령만 쫓는다.
초토가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호발귀는 혈마를 쫓아가려고 신형을 펼치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쏴아아아아!
혼탁한 생기가 요동친다.
혈마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살기가 거세게 일어난다. 땅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도륙하고 싶어졌다. 혼절해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죽이면 기분이 어떨까?
‘아!’
아무라도 죽이고 싶다.
호발귀는 신형을 쏘아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방향도 모른 체 무작정 신형을 날린다. 아무도 쫓아오지 못하게 최대한 속도를 높인다. 전력을 다해서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질주한다.
일단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중간에 만나는 사람이 있어도 안 된다. 눈에 띄는 사람은 모조리 죽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