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九章 혈마혈겁(血魔血劫) (5)
야밤에 찾아온 손님치고 좋은 뜻으로 찾아온 사람이 없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 좋다. 만약 사내는 이마에 혈선이 있다. 정말로 혈천방에서 만든 혈마다. 그렇다면 자신의 무궁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승부가 빨리 날 거야.’
홀리는 마른 침을 삼켰다.
혈마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
무궁을 겨루는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 상대방을 죽이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춘다.
당연히 손속이 잔인할 수밖에 없다.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나.’
“가짜 혈마와 진짜 혈마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알아?”
토초가 말했다.
“무공 차이가 나겠지.”
“아니. 무공이라면 참을 수 있어. 그런데 저것들.”
“저것들?”
홀리가 되물었다.
혈마와 혈마후는 일대일의 관계다. 일부일처제처럼 오직 혈마후 한 명이 혈마 한 명만 가질 수 있다.
혈마가 정신을 잃은 실혼인 상태이기 때문에 두 명, 세 명도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혈마후는 끊임없이 혈마와 정사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계속 구혼음소를 읊어야 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혈마가 누구 것인지 각인 시켜야 한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여인과 생각을 잃어버린 사내이지만 부부 관계만은 정상적으로 치러진다.
그러니 두 명, 세 명 가질 여력이 없다.
이 일을 등한시하면 혈마가 혈마후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완전한 실혼인, 혈마가 되어서 통제 없이 마구잡이로 살상을 벌인다. 그야말로 진짜 혈마가 된다.
구혼음소는 혈마의 살심을 굳건하게 붙들어주는 기둥이기도 하다.
그런데 방금 토초는 ‘저것들’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래. 저것들. 놀랐어?”
토초는 홀리가 되물은 이유를 안다. 그래서 더 득의롭게 웃는다.
“저것들 구혼음소를 펼쳐주면 두 달은 버틸 수 있어. 하지만 나는 한 번 그 짓을 하고 나면 보름은 쩔쩔 매. 솔직히 너무 진이 빠져서 그 짓이 생각나지 않아.”
“으음!”
홀리는 신음을 흘렸다.
혈마가 한두 명이 아닌 것 같다. 혈천방이 정말 괴물을 대량으로 만들어낸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이 넷이야. 혈마가 셋이나 더 있다는 거지. 네가 마음만 돌리면 몇 명 줄 수도 있는데? 어때? 생각 있어?”
홀리는 기가 막혔다.
혈마가 얼마나 강한지는 이제 곧 붙어보면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런 자가 네 명이나 있다. 네 명을 전부 데려오지는 않았겠지만, 언젠가는 호발귀와 만나게 된다.
혈마 네 명이라면 호발귀도 힘들지 않을까?
“도대체 이런 괴물이 몇이나 있는 거야?”
“나도 몰라. 달라는 대로 제공해줬으니까.”
“설마 구혼음소를 다른 사람한테도 알려준 건 아니지?”
“알려주면 써먹을 수나 있어?”
홀리는 적이 안심했다.
토초 말이 맞는다. 구혼음소는 알려준다고 해서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구혼음소를 전개하려면 음률을 매우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인간의 뇌를 파고들어서 생각을 고정해야 한다. 그러니 모든 소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한다.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어색함을 느끼고, 어색함을 느끼는 순간 구혼음소가 단번에 깨진다.
굉장히 어려운 대법이다.
홀리와 토초는 구혼음소를 삼 년에 걸쳐서 배웠다. 음률 하나만 무너져도 모진 매질을 당했다. 몸에는 채찍 자국이 늘 새겨져 있었고, 볼은 하도 맞아서 퉁퉁 부어 있었다.
말 몇 마디 전해준다고 해서 써먹을 수 있는 대법이 아니다.
토초가 말했다.
“진짜 혈마는 혈마후를 피곤하게 만들지 않아. 정사도 부드럽고, 구혼음소를 읊어줄 필요도 없지. 그런데 저것들하고 한번 관계를 맺으면 보름이나 앓아. 이 덩치에. 이게 말이 돼?”
혈마와 관계를 맺으면 혈마후는 진기가 왕성해진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오히려 내력이 급진전하는 효과를 얻는다.
홀리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가짜 혈마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토초가 혈마를 보면서 비웃으며 말했다.
“혈마와 관계하면 오히려 기운이 나야지.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니까. 하지만 저것들은 음기만 뺏어가. 이러니 진짜가 탐이 나지. 진짜를 가져야겠어. 혈마, 죽엿!”
토초가 명령을 내렸다.
스릉!
혈마가 검을 뽑았다.
홀리는 즉시 긴장했다. 혈마를 상대하면서 긴장을 늦춘다는 건 자살행위다.
쒜에에엑!
혈마가 즉각 공격을 가해왔다.
혈마가 상대가 싸울 준비를 하든 말든 기다리지 않는다. 싸우려는 게 아니다. 오직 죽이려는 것이다.
“앗!”
홀리는 깜짝 놀랐다.
혈마가 사용하는 무공은 혈마 무공 중 무정삼절이다.
무정삼절 중 제일절 멸천겁이 쏟아진다.
몸은 하나, 팔은 둘이다. 몸을 중심으로 양쪽에서 전혀 다른 무공이 펼쳐진다. 왼손이 하늘을 가리면, 오른손은 땅을 휩쓴다. 몸 주위를 온통 죽음으로 덮는다.
혈마 무공이 완벽하게 재현된 듯하다.
“우웃!”
홀리는 감히 성난 검을 맞받지 못하고 물러섰다. 하지만 혈마는 홀리와 끈이라도 묶여 있는 듯 바짝 따라붙으면서 재차 두 번째 검을 펼쳐냈다.
쒜에에엑!
머리 위에서 검광이 번뜩인다. 허리 아래쪽으로는 각법(脚法)이 쓸어온다.
타앗!
홀리는 이번에도 물러섰다.
검에 깃든 경력이 너무 강하다. 혈마의 검을 막으면 당장 밀린다. 차라리 물러서는 게 낫다.
“홀리! 너도 쩔쩔맬 때가 있네? 그러지 말고 제대로 붙어보지?”
토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혈마는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혈마의 목적은 오직 하나, 홀리를 죽이는 것뿐이다. 혈마후인 도초조차도 홀리의 죽음을 막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쒜에에엑!
혈마가 서로 숨결을 느낄 정도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검으로 후려쳤다.
이번에는 피하지도 못한다. 혈마가 너무 빠르다.
‘지독히 빨라!’
혈천방이 혈마 무공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이 정도 검공이라면 호발귀가 펼친 무정삼절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원래 혈마 무공은 모방이 불가하다.
혈마 무공은 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원천적인 생명력인 생기를 끌어쓴다. 원정을 통해서 원력(原力)을 꺼내온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도 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혈마 무공을 제대로 모방하려면 원정에서 원력을 꺼내오는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모든 무학이 가로막혔다.
원정은 꺼내올 수 없다.
느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것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정을 연구할수록 진실로 혈마 무공의 실체를 알고 싶어진다.
인간이 수련한 진기는 아무리 강해도 생기를 능가하지 못한다. 생기와 비슷해질 수는 있지만, 생기 자체는 아니다. 유리를 반짝반짝 빛나게 닦는다고 해서 금강석이 되지는 않는다.
원정을 진기로 교체하고, 혈마 무공 초식을 제대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
현재 혈마 무공을 모방한 모든 무공이 이런 형태다.
음문촌 무공이 그렇다.
홀리는 혈마도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아무리 칼을 가지고 애를 써도 옛날 혈마가 펼쳤던 혈마도법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약간 수정하고 보완했다. 도법을 검법으로 바꾸고, 파괴력을 줄이는 대신에 세기(細技)를 추가했다.
혈마의 혈마도법과 음문촌의 혈마검법은 완전히 다른 무공이다.
그저 비슷하게.
혈마 무공을 모방하려는 사람들은 ‘똑같게’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니까. 그 대신에 ‘비슷하게’에 초점을 맞췄다.
혈마는 혈마 무공에 최대한 근접한 무정삼절을 펼쳐내고 있다.
까앙! 깡! 깡!
홀리는 소낙비처럼 퍼부어대는 혈마의 검을 삼 검이나 막았다. 하지만 생각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검을 쥔 손이 충격을 받아서 시큰거렸다.
‘손이 마비되는 것 같아. 검이 느껴지지 않아. 이런!’
쒜에에엑!
혈마가 발로 턱을 차올렸다.
홀리는 급히 피했다. 순간, 옆에서 흘러온 검이 위로 쳐들렷다. 상반신을 쪼개온다.
홀리는 검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뒤로 훌쩍 물러섰다.
혈마의 검을 막을 경우, 힘에 눌려서 검든 손이 위로 쳐들린다. 그러면 옆구리가 텅 빈다. 그 틈을 노리고 강철 같은 발길질이 쏟아질 것이다.
이번 공격은 막지 못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쏟아지는 검공 속으로 던져버린다. 그러면 검도 막고 뒤로 물러설 시간도 번다.
“후욱!”
홀리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태어나서 검을 손에 쥔 이래, 가장 급하고 파괴적인 자를 만났다.
까앙! 쒜에에에엑!
홀리가 던진 검을 쳐낸 혈마가 다시 압박해왔다.
‘틀렸어!’
홀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였다.
싸움이 빨리 끝날 줄은 알았지만, 자신이 십 초도 받아내지 못할 줄은 몰랐다.
쒜에에에에엑!
검이 전신을 쪼개왔다.
이 검을 피해도 곧바로 이어질 두 번째 공격, 옆구리를 타격은 피하지 못한다.
혈마는 시종일관 무정삼절 중 멸천겁만 사용했다. 똑같은 초식만 구사했다. 그런데도 밀리고 있다. 절망이다. 빠름과 파괴력에서 워낙 차이가 나니 싸움 자체가 안 된다.
순간, 절망을 느끼고 생명을 접으려는 찰나, 홀리는 혈마의 검법에서 수상한 점을 찾아냈다.
검든 손이 보인다. 검을 쥔 손의 손날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온다.
쒜에에엑!
홀리는 즉각 장심에 진기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혈마의 손날 부분을 힘껏 쳐올렸다.
퍼억!
혈마가 검을 내리치지 못했다. 검든 손이 위로 쳐올려졌다.
홀리는 즉각 뒤돌려차기로 복부를 강타했다. 동시에 신형을 다시 휘돌리면서 반대쪽 발로 안면을 걷어찼다.
쉬이잇! 쒜엑!
홀리는 혈마를 치지 못했다. 그녀의 발길질보다 혈마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하악!”
홀리는 거친 숨을 쏟아내며 혈마를 쳐다봤다.
혈마가 공격해 오지 않는다. 뱀처럼 차갑게 서서 그녀를 쳐다본다. 아니, 그녀의 등 뒤를 노려본다.
홀리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아!”
홀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발귀를 만난 이래 그가 나타난 게 이토록 반갑기는 처음이다.
“저 사람이 호발귀야? 잘 생겼네? 방금 싸움에 개입한 거 맞지? 혈마가 공격을 멈칫거리는 모습은 처음 봐. 오히려 반격까지 당할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어.”
토초가 말했다.
호발귀는 토초를 무시했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홀리에게 걸어와서 말했다.
“다친 데 없어?”
“없어.”
“정말 괜찮아?”
“괜찮아.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괜찮아.”
“혈마, 내가 맡아도 될까? 음문촌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은 없어. 하지만 상대가 혈마라면 상관없지 싶은데. 혈마도 음문촌 사람이 아니니까.”
“날 혈마후로 인정해주면…… 맞아. 상대해도 돼. 내 혈마는 음문촌 사람이니까.”
“넌 내 혈마후야.”
홀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발귀가 말한 혈마후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한다. 그가 혈마가 되었을 때 죽여줄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혈마후라는 말이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호발귀가 혈마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토초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동시에 혈마가 쾌속하게 신형을 날려 이강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혈마는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졌다.
“당신을 보니까 더 욕심이 생겨. 당신을 가져야겠어.”
토초가 말했다.
호발귀가 ‘이 여자, 누구냐’는 표정으로 홀리를 쳐다봤다.
“다섯째. 이름은 토초. 내게 언니뻘 되는데, 음문촌 여자들은 다 이래. 이해해. 날 겪어봤으니까 알잖아?”
호발귀는 토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홀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음문촌 인연으로 이번에는 놓아준다. 가라. 하지만 혈마는 부리지 마. 무림에서 사라져라. 또 혈마가 나타나면 음문촌 사람들, 내게 모두 죽는다.”
순간, 토초는 부르르 치를 떨었다.
호발귀의 몸에서 살기가 뚝뚝 흘러나왔다. 살기가 너무 지나쳐서 악귀처럼 보인다. 가짜 혈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살기가 진하다.
호발귀 말이 사실대로 이루어질 것 같다.
혈마를 또 사용하면 음문촌 사람들, 제 명에 못 죽는다.
“어떻게 알고 왔어?”
홀리도 토초를 무시하고 말했다.
“운공 중.”
“불이 꺼져 있어서 자는 줄 알았지. 다 보고 있었네. 어휴! 나도 참! 미행당하는 것도 모르고.”
“강변이 좋네. 조금 걷다 갈까?”
두 사람은 강변을 걸었다. 뒤에 토초를 남겨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