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九章 혈마혈겁(血魔血劫) (4)
혈마가 태허문을 몰살시켰다!
세상이 뒤집힐 만한 사실이 전해졌다.
소문이 아니다. 사실이다. 사두시 패자인 태허문이 완전히 핏물에 잠겼다.
혈마는 무인만 죽인 게 아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다 죽였다. 태허문에서 기르던 가축들까지 모두 몰살시켰다. 산 생명이라고는 쥐새끼 한 마리 남아나지 못했다.
혈마는 매우 잔인하다.
천하의 신의가 치료해도 살릴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절맥만 베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육신을 완전히 잘라놓았다. 죽은 영혼도 부활하지 못하게끔.
“아! 이게 무슨 일이래?”
해자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 객잔에 투숙한 것을 본 사람이 많은데, 그런데도 소문을 믿는다. 모두 잠든 사이에 십 리 길을 달려갔다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럴 게 아니라 태허문에 가보는 게 어때? 사흔이라도 살펴봐야 누구 짓인지 알지.”
홀리가 말했다.
그때, 날카로운 경풍 소리와 함께 등여산이 나타났다.
“아니! 그건 안돼!”
등여산이 오자마자 바쁘게 말했다.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꼭 이럴 것 같아서. 지금 호발귀가 태허문에 가면 완전 흉수가 돼. 뻔뻔스럽게 자신이 죽여놓고 아닌 척 왔다고 생각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해?”
홀리가 물었다.
“지금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아.”
“어이구! 여기서 버텨? 여기 사람들, 눈빛이 보통이 아닌데. 뭐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회만 닿으면 그냥 꼬챙이로 확 쑤시겠다는 기세라고.”
해자수가 말했다.
“오면서 나도 느꼈어요. 하지만 여기서 버텨야 해.”
마지막 말은 호발귀를 쳐다보면서 했다.
“오지 말라니까 왔네.”
호발귀가 다른 얘기를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꼼짝없이 혈마 누명을 쓰게 생겼다고.”
“그러니까 오지 말라니까.”
“둘이 지금 내 앞에서 사랑싸움이야?”
홀리가 한 마디 끼어들었다.
호발귀는 난감한 듯 등여산과 홀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히야! 전쟁, 전쟁해도 여자 전쟁이 제일 사납지. 이럴 때는 그냥 한적한 곳으로 파하는 게 상책이야. 난 저쪽에 가서 밥이나 먹을 라니까 지지든 볶든 마음대로들 하셔.”
해자수가 얼른 한쪽으로 피했다.
“당 언니와 보위는 주변을 감시하고 있어. 당분간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야.”
등여산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말 돌리지 마. 우리 이 문제 짚고 넘어가자. 호발귀, 너! 우리 둘이 너 좋아하는 거 알지!”
홀리가 호발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
호발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둘은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거야. 널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고, 뭘 먹이고 싶으면 먹이고. 넌 다 받아먹어. 하지만! 네 마음 표현은 하지 마. 책사에게도, 내게도. 마음을 꾹꾹 숨기고 있어. 절대 티 내지 마. 지킬 수 있어!”
“지켜야지. 안 지키면 한 대 맞을 것 같은데?”
호발귀가 웃으면서 말했다.
“웃지도 말고! 미워죽겠어.”
홀리가 벌떡 일어섰다.
강릉 사람들은 호발귀에게 더는 호의적이지 않다. 호발귀를 쳐다보는 눈에 가시가 섞여 있다.
객잔에서는 짐 정리해서 나가줬으면 하는 눈치다.
다루에 들어가도 이제는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그냥 두 눈 꾹 감고 자리를 지킨다. 어떤 편의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의사 표현이다.
음식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뭘 주문하던 재료가 떨어졌다는 말만 돌아온다.
물론 달달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다.
이들은 여전히 혈마를 두려워한다. 당장 검을 뽑아서 태허문처럼 만들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러니 검을 뽑는 시늉만 해도 당장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혈마가 된다.
호발귀는 검을 뽑지 않았다.
자리가 없으면 순순히 물러났다. 음식 재료가 떨어졌다고 하면 물 한 그릇만 먹고 나왔다.
절대로 화를 내지 않았다. 철저하게 보통 사람으로 지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숲으로 갈까? 노숙해도 여기보단 편하겠다.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이게 뭐야? 별 볼 일 없는 것들에게 무시나 당하고.”
홀리가 투덜거렸다.
“안 된다니까. 어떻게든 여기서 버텨야 해.”
등여산이 말했다.
그녀는 계속 호발귀 눈치만 살폈다. 주변에서 약간 언짢은 일만 벌어져도 호발귀부터 봤다.
호발귀가 화를 내면 곤란하다. 혈기가 일어나고, 살기로 변하고, 검을 뽑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러니 어떻게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있나.
등여산이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계속 이 사람들 눈앞에 있어야 해.”
삘릴리! 삘릴릴리! 삘릴리!
밤이 깊어서 자정을 넘길 무렵, 은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엇! 이건!”
해자수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음문촌 신호다.
신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음문촌 뿔피리 소리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아씨를 부르는 거야!”
해자수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야밤을 울리는 피리 소리는 음문촌 신호가 맞다.
해자수는 검을 차고 밖으로 나서는 홀리와 마주쳤다.
“아씨, 안됩니다.”
해자수가 급히 홀리를 막아섰다.
“아씨하고 음문촌하고는 이미 사이가 틀어졌잖아요. 저쪽에서 좋은 감정으로 오지 않았을 텐데. 지금 나가면 안 된다니까요. 못 들은 척하시고 주무세요.”
“날 부르잖아. 가봐야지. 너무 걱정하지 마.”
홀리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면 저기 호발귀라도 데리고 가는 편이.”
“아니, 이건 음문촌 일이야. 나 혼자 가야 해.”
“어휴! 아씨! 왜 이렇게 고집이 세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음문촌에서 아버지 빼고 날 이길 사람은 없어. 정 상대가 안 되겠으면 그냥 몸을 빼면 되니까. 그 정도도 못할까 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자.”
홀리가 해자수를 지나쳐서 피리 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해자수는 고민했다.
홀리 말이 맞는다. 음문촌 일은 음문촌 사람만 해결할 수 있다. 외인이 개입하면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후,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내?
음문촌과 홀리는 호발귀 때문에 완전히 틀어졌다.
홀리가 음문촌과 뜻을 같이하지 않기로 한 순간, 모든 혈연관계가 끊어졌다.
음문촌은 혈천방으로, 홀리는 호발귀에게.
혈천방과 호발귀가 적이듯, 음문촌과 홀리도 적대관계가 되었다.
물론 호발귀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막연히 짐작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홀리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면 기가 막힐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강요할 수 없지만, 최소한 홀대해서는 안 된다.
홀리는 음문촌과 관계된 모든 것을 등졌다.
막말로 말하면 음문촌과 칼을 겨뤄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음문촌 사람들은 혈연관계도 쉽게 끊는다. 그리고 일단 끊어진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는다. 양쪽 중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인연이 끝난다.
그래서 홀리에게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하아! 이거 곤란하네. 어떻게 하지?”
해자수는 갈피는 잡지 못하고 객잔 마당을 서성거렸다.
등여산과 호발귀가 머무는 방은 불이 꺼져 있다. 당연하다. 벌써 자정이 훌쩍 넘었다.
“안 되겠어. 나라도 쫓아가 봐야지. 난 외인이라고 할 수 없으니 괜찮아.”
쉬이이잇!
해자수는 급히 신형을 날렸다.
홀리는 피리 소리를 따라서 걸었다.
뿔피리 소리는 비상 연락을 취할 때 사용하는 음률을 흘려낸다.
근처에 음문촌 사람이 있으면 누가 되었든 빨리 달려오라는 구조 신호다.
음문촌 사람 중에 누가 다쳤나?
그럴 리 없다. 뿔피리 소리는 분명히 자신을 불러내고 있다. 자신이 호발귀와 함께 강릉에 있다는 사실은 만천하가 다 알고 있다. 새삼스럽게 찾을 필요도 없다.
“느낌이 좋지 않아.”
홀리는 뿔피리 소리에서 진한 피 냄새를 맡았다.
피리 소리가 강가로 이어졌다. 강가 특유의 물비린내와 풀냄새 진하게 맡아졌다.
강릉은 이수(夷水)를 끼고 형성된 도읍이다.
아마도 이수로 부르는 것 같다.
잠시 후, 홀리는 강변 바위에 앉아 있는 토초를 찾아냈다.
토초는 사내처럼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있다. 다리 사이 백사장에 검을 푹 박아놓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린 채 홀리가 걸어오는 모습을 노려봤다.
홀리는 토초에게 걸어갔다.
“오랜만이네?”
홀리가 먼저 말했다.
“사내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년이 사내 때문에 일족을 버려? 어떤 낯가죽인지 보려고.”
“일족이 나를 버린 거지. 날 믿지 않고 혈천방에 몸을 맡겼잖아. 내가 호발귀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무엇 때문에 호발귀를 만났는지도 알잖아?”
“그래서? 촌장이 맡긴 일은 했어?”
“아직 혈기가……”
“킥킥킥! 킥킥! 미친년. 헛소리는.”
토초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홀리가 마음만 먹었으면 호발귀는 벌써 혈마가 되었다. 혈기가 숙성하지 않아도, 혈마가 되지 않아도 귀색혼령대법은 호발귀를 혈마로 만들어준다.
촌장은 그 일을 하라고 홀리를 보냈다.
호발귀가 진짜 혈마라면 당장 혈마후가 되어서 수중에 장악하고, 가짜 혈마라면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라는 것이 홀리에게 내려진 명령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홀리는 촌장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래. 좋아. 변명 안 해. 그래서?”
“네년이 싹수없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일족을 버린 주제에 더럽게 당당하네.”
“그런 말을 하려고 부른 거야?”
“그렇다면 어쩔래?”
“미안하다고 말하면 될까?”
“킥킥! 킥킥킥!”
토초가 웃었다.
사실, 음문촌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은 낯간지럽다.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이 없다. 설혹 미안한 일이 생겨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미안하면 상대를 죽여버린다. 그러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토초가 정색하며 말했다.
“말 몇 마디 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너 대신 호발귀를 차지하려고. 넌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역시 그런 목적이었네. 그러면 여기서 날 죽이려고?”
“그렇지.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
“지금 검을 뽑으면…… 우리 인연은 완전히 끝나. 원래 끊어진 인연이지만, 그래도 한쪽 피라도 섞였잖아. 그냥 돌아가. 널 죽이고 싶은 생각, 없어.”
“네가 날 죽인다고? 킥킥!”
토초가 연신 웃었다.
홀리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원래 토초는 그녀보다 한 수 아래였다. 몇 번에 걸쳐서 싸웠지만, 매번 이겼다. 토초 몸에 새겨진 상처 중에는 그녀가 만든 것도 몇 개 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자신만만할까?
그때 토초가 말했다.
“봤지? 좋은 적수가 될 거야. 죽여.”
그녀가 말을 끝내자 어느새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표홀히 서 있었다.
“외인? 음문촌 일에 외인을 끌어들여? 토초, 너 타락했구나? 이 정도로 망가진 거야?”
홀리가 미간을 상큼 치켜올렸다.
“외인이라니? 잘 보고 말해. 외인인가.”
홀리는 토초의 말을 듣고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대단히 침착하다. 아니,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듯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마에…… 혈선!
“혈마!”
“큭! 봤어?”
“이 사람이 바로!”
“그래 맞아. 태허문을 몰살시킨 흉수야. 어때? 흉수를 만나니까 죽이고 싶지?”
홀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예상은 했지만, 혈천방이 가짜 혈마를 만들어냈다.
홀리는 가짜 혈마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안다.
단순한 실혼인은 의미가 없다. 역천금령공과 버금갈 만한 무공을 지녀야지만 가치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혈천방은 방법을 찾아냈다.
갓난아기 때부터 약물로 벌모세수를 시킨다.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육감을 발달시킨다. 근육은 말할 것도 없다. 전신 근육이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무려 삼십 년 이상 약물로 제련된 인간이다.
거기에 보아하니 귀색혼령대법까지 펼친 흔적이 엿보인다. 완전히 혈마와 혈마후의 관계가 되었다.
“내가 함정에 걸려들었네? 좋아! 한데 이 혈마를 움직이면 우리 인연은 정말 끝이야. 인연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토초가 말했다.
“얘를 혈마로 만들고 나니까 성에 차지가 않아. 가짜는 가짜일 뿐이야. 아무래도 시원치가 않아. 진짜를 가져야겠어. 이해하고 죽어. 널 죽이고 바로 작업 시작할 거야.”
토초가 냉정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