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八章 역전시도(逆戰試圖) (3)
등여산은 홀리를 만났다.
등여산이 홀리를 찾은 게 아니다. 그녀가 혈천방 제삼대에 가까이 접근하자, 해자수가 불쑥 나타났다.
“기분에 꼭 누군가 올 것 같더라니. 천살단에 가신 분이 여긴 어쩐 일이셔?”
해자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멋! 반가워요. 아직 여기 있는 거예요?”
등여산도 활짝 웃었다.
해자수가 이곳에 있다면 호발귀가 인근 어디엔가 있다는 말이다. 늘 붙어 다니니까.
“이리 오셔. 거기 있으면 저놈들 눈치챈다니까.”
해자수가 등여산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홀리는 편안하게 앉아서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있었다.
옆에는 독사가 십여 마리나 죽어있고, 사발에는 하얀 진액이 담겨 있다.
화살촉에 독을 묻히는 모양이다.
“왔네?”
홀리가 등여산을 마뜩잖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응. 왔어. 호발귀는?”
“벌써 일 저지르고 튀었어.”
“아!”
등여산은 다소 실망했다.
홀리와 해자수가 있어서 호발귀도 볼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가 없다는 말을 듣자 다소 맥이 빠졌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등여산이 어색함을 떨치려는 듯 홀리에게 물었다.
홀리가 문득 손을 멈췄다. 그러더니 다듬던 화살대를 놓고 일어섰다.
그녀가 걸어와 등여산 앞에 섰다.
“이거 징그러울지 모르겠는데, 한번 안아볼까?”
“뭐?”
홀리는 등여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왔네? 그때 내가 물은 것, 이게 대답이지?”
“응.”
“너만 없으면 호발귀는 내 건데. 넌 굉장히 강력해. 사실, 시작부터 반칙이었으니까. 넌 얌전하고 똑똑한 여자, 난 거칠고 사나운 여자. 이렇게 시작하니 될 것도 안 되지.”
“너 안 그래. 네가 왜 사나워.”
“그럼 호발귀 내게 양보할래?”
“……”
“그건 싫지? 호호! 그래도 와주니 반갑다. 사실은 네가 거의 올 것 같더라고. 그렇다고 호발귀를 양보한다는 말은 아냐. 난 여전히 호발귀 아내 위치야.”
“반칙이야.”
“뭐? 호호! 반칙이고 뭐고…… 좋아. 이제부터 널 동지로 인정해줄게. 우리 편 너무 없어서 외로워.”
홀리가 등여산의 등을 다독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등여산이 홀리를 꼭 껴안았다.
“그래, 고마워.”
“얘가 왜 징그럽게 꼭 껴안고 그래! 살짝 껴안으면 몰라도 너무 안으니까 징그럽다.”
홀리가 질색하며 물러섰다.
등여산은 활짝 웃었다.
등여산은 홀리와 함께 나무를 다듬어서 화살을 만들었다.
“몇 개나 만들려고?”
“가능한 한 많이.”
“호발귀가 일을 저지르고 도망쳤다는 말이 뭐야?”
등여산이 물었다.
그러지 해자수가 심심했다는 듯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그게 대가리만치고 튀었다는 말이지. 호발귀가 저기 대가리하고 몇몇 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해버렸는데, 그놈들이 꽤 강한 놈들이었나 봐. 저놈들 지금 대가리 잃고 어쩔 줄 몰라서 전전긍긍하거든.”
“그런데 이건 뭐예요?”
등여산이 화살을 가리켰다.
홀리는 화살을 꽤 많이 만들었다. 지금까지 만든 것만 해도 독화살이 무려 이백여 대다.
“글쎄 우리 아씨께서 저걸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된다네. 그냥 들이쳐서 박살 내야 한다는데, 아 물론 나는 반대 입장이고. 호발귀가 어련히 알아서 대가리만 쳤을까 싶거든.”
“호발귀를 혈마로 만들려는 거지?”
등여산이 홀리에게 말했다.
“응. 그러려고 했어. 네 생각은?”
홀리가 물었다.
“내 생각도 같아. 호발귀를 혈마로 만드는 게 좋겠어.”
등여산이 화살대를 다듬으면서 말했다.
“엉?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니, 책사까지 왜 이래? 혈마가 뭐가 좋다고? 호발귀가 여기서 혈마가 되면, 저 일곱 마을 사람들을 죽인 누명도 고스란히 뒤집어쓰는데, 그게 괜찮다고?”
“누명을 뒤집어쓰지 않으려고 혈마가 되자는 거예요. 여기서 혈마가 되면 일대일이 되는 거예요.”
“일대일?”
“선량한 마을 주민을 죽인 거 하나, 혈천방 마졸을 죽인 거 하나. 이렇게 일 대 일요. 그러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혈마가 둘일까? 정도 쪽 혈마 한 명, 마도 쪽 혈마 한 명. 아니면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혈마일까?”
“난 당연히 후자지 뭐. 이쪽저쪽 다 죽였다면 후자 아냐?”
“그러면 혈마가 한 명인 거죠. 집단이 아니라 한 명. 혈마와 혈천방이 아니라 혈마 한 명. 어느 쪽이든 정도 무림으로서는 다소 안심이 되죠.”
“말이 그렇게 되나?”
“혈마가 둘이라면 혈마끼리 싸울 공산이 크고, 혈마가 한 명이라면 집단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고.”
“아!”
해자수가 허벅지를 '탁' 쳤다.
“여기 제삼대를 철저하게 괴멸 시켜야 하는데, 방법이 있어? 쟤네 꽤 쎄.”
홀리가 말했다
“당 언니하고 보위가 올 거야.”
“그 사람들 강하로 안 갔어?”
“오라고 했어. 아마 오늘 아니면 내일쯤에는 도착할 거야. 그때 같이 공격하면 돼. 조금만 기다려. 섣불리 건드리는 것보다는 기다렸다가 혈마답게 쳐야 해.”
등여산이 말했다.
“사람 똥개 훈련해놓고 뭐! 튀어! 이 때려죽일 놈이!”
도천패가 상당히 화난 듯 씩씩거렸다. 하지만 이미 눈빛은 날카롭게 곤두서서 숲을 쏘아보는 중이었다.
눈앞에 그 유명한 혈천방 제삼대가 있다.
제삼대는 귀문과는 다르다. 귀문은 귀무살 수련을 받는 수련생들이고, 이들은 혈천방에서 정통으로 무공을 수련한 정통 무인이다. 개별적으로는 귀무살이 강할지 모르지만, 집단으로 싸우는 데는 이들이 훨씬 낫다.
“언니가 먼저 독을 써요. 보위께서는 가차 없이 칼을 쓰시고요. 혈마답게 공격해야 해요.”
등여산이 말했다.
“안 돼! 내가 앞장설 거야! 당매는 내 뒤에서 하독해!”
도천패가 당홍을 잡아끌어서 등 뒤에 세웠다.
“이러다가 내 독에 맞을 수도 있어.”
“괜찮아! 내가 위험한 게 낫지, 당매가 위험한 건 못 봐!”
도천패는 불쑥 말을 해놓고 갑자기 쑥스러운지 와락 앞으로 치달려갔다.
“의외로 순정파네?”
홀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내가 사내보는 눈이 있다니까. 너희들처럼 힘든 사람 붙잡고 아등바등하진 않잖아? 호호호! 난 이런 게 좋아.”
당홍이 도천패 쫓아서 급히 달려갔다.
숲에 독이 뿌려진다.
“크윽!”
“컥!”
제삼대 무인들이 침습하는 독을 막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들은 독에 취약하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약간의 해독단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누가 우물에 독을 풀었다. 그 덕분에 생고생해서 특별히 해독약을 구해놓았다.
“독이닷! 해독단을 복용해!”
누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당홍의 독은 독중독이다. 겨우 설사나 복통을 일으키는 미독(微毒)과는 성질이 다르다.
그 사이 도천패가 칼을 썼다.
휘루루룽! 퍼어억! 퍼억!
대력도강이 거침없이 터졌다. 머리 위에서 빙빙 돌려진 칼이 거침없이 육신을 후려쳤다.
도천패는 대력도강에 힘을 잔뜩 주었다. 가장 잔인하게 대도를 날렸다. 원래 패력으로 전개한 도법은 위력이 강하다. 몸통을 단숨에 갈라버리는 것은 예사다.
‘혈마가 한 짓!’
도천패는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시신은 자연히 참혹해질 수밖에 없다.
쒜에엣! 쒝! 쒯!
도천패가 미친 듯이 대도를 휘둘렀다.
홀리는 도천패의 뒤를 쫓으며 독화살을 쏘았다.
그녀가 하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지만 아무나 죽이지는 않는다. 도천패가 마음껏 칼을 휘두르는 데 방해가 되는 자만 제거한다.
제삼대를 휩쓰는 혈마는 도천패다.
다른 사람들은 도천패가 마음껏 칼을 휘두르게끔 도와준다.
그래야 살인 현장을 본 사람들이 치를 떨면서 입에 혈마라는 이름을 올린다.
쉐엑! 퍼억! 쒜에엑! 퍼억!
독화살이 날아가고, 한 사람이 꼬꾸라졌다.
그녀가 준비한 화살은 무려 삼백여 대에 이른다. 등에 멘 전통에 스무 대 가량이 들어있고, 나머지는 해자수가 봇짐처럼 등에 짊어지고 따라붙었다.
쒜에엑! 퍼억!
화살 한 대에 한 명이 정확히 꿰뚫렸다.
그녀의 화살에는 혈천공(血天功) 진기가 담겼다.
혈천도법을 펼치기 위해서 음문촌이 창안해 낸 신공인데, 혈천도법을 펼쳐내는 데는 혈마록 무공과 비교해서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제삼대 무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진기다.
호발귀가 은밀히 통과했던 경계망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여자들은 어떡해? 봐줘?”
당홍이 물었다.
“아뇨. 이곳 여자들은 평범한 여자가 아네요. 모두 마공을 수련한 마인이에요. 살심이 너무 짙어서 살려주면 애꿎은 사람이 죽어요. 그냥 손을 쓰세요.”
등여산이 말했다.
“그래? 그러면 속 편하지.”
당홍이 거침없이 손을 뿌렸다. 하지만 당홍은 곧 한계에 도달했다.
그녀가 준비한 독은 한정되어 있다. 언제까지고 무한정으로 뿌려댈 수 없다.
그녀는 제삼대 경계망을 뚫자마자 손을 털었다.
“나는 여기까지.”
“내 뒤에 꼭 붙어 있어!”
도천패가 소리쳤다. 그러면서 지금보다 훨씬 맹렬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전에도 맹렬했는데 이제는 더 사나워서 광풍 폭우가 몰아치는 것처럼 여겨진다.
쎄에에엑! 퍼억! 쒜엑! 퍽!
제삼대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이런 싸움은 등여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차분하게 계략을 짜는 책사지 개싸움을 하는 싸움꾼이 아니다. 무인과 싸운 적이 없지 않지만 거의 일 대 일 승부만 겨뤘다. 혈전을 벌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하나, 호발귀를 혈마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쒜에에엑! 퍼억!
태산파의 설화팔극검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흘리면서 쏟아졌다.
인(引), 검을 맞댄 후 검신으로 상대방의 검을 끌어당겼다. 전(轉), 상대방의 검신을 타고 검의 휘르륵 돌아갔다. 타(打), 검신은 상대방의 검신을 치고, 검 끝은 미간을 친다. 상대방의 검을 치는 탄력을 이용해서 미간을 뚫는다.
퍼억!
설화팔극검은 여덟 가지 용법이 조합을 이루면서 펼쳐진다. 용법이 두 개씩 합쳐지면 육십사 개의 운용법이 쏟아진다. 세 개씩 조합을 이루면 개수로 오백 개가 넘는다.
검을 쳐낼 때마다 눈꽃이 피어난다. 차가운 기운이 서릿발처럼 뻗어 나온다.
“제법이네.”
홀리가 등여산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내 딱 보니까 무공도 만만치 않겠더라니까. 하기는 천살단 책사가 아무나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해자수가 말했다.
“내공만 받쳐주면 굉장하겠어. 태산파 무공이 저렇게 좋았나?”
“세상에 좋지 않은 무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놈이 사용하느냐가 문제지. 식칼도 내 손에 들리면 요리하는 칼이 되지만 아씨 손에 들리면 사람 죽이는……”
해자수가 말을 잇다가 홀리의 사나운 눈길을 접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그날, 혈천방 제삼대를 철저하게 무너졌다.
호발귀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무공으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삼대를 완전히 박살 냈다. 혈마가 가장 강한 고수들을 죽였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주변을 정리했다.
“정말이라니까. 이 사람도 참. 내가 왜 따뜻한 밥 먹고 거짓말을 해. 하여튼 거기 가보면 어휴! 진짜! 거기 혈천방 제삼대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겠어? 아무도 몰랐지. 내 말 못 믿겠으면 가보라니까. 내가 거기가 이거 주워왔잖아. 이거.”
해자수가 보검 박힌 검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검을 보지 않았다. 검에 박힌 보석을 봤다.
“거기 가면 이런 게 지천이야 지천. 하지만 사람들이 워낙 처참하게 죽어있어서 얼마나 살 떨리던지. 이게 눈에 보이자마자 냉큼 주워서 냅다 도망쳤지. 킥킥!”
해자수가 부르르 치를 떨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시신이 많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 보옥 박힌 검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말만 들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이제 저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세상에 말할 것이다.
일곱 마을 살인 사건이 혈천방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면, 혈천방 제삼대 물살 사건은 저들 입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아이고 이 짓도 참 못 해 먹겠네.”
해자수가 투덜거리면서 보검을 허리에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