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七章 제삼대(第三隊) (4)
날이 밝았다.
지단은 조용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있다.
무인 두 명이 지키던 집도 마찬가지다.
무인들은 아침 교대를 했다. 밤사이에 교대를 한 번 하고, 아침에 또 했다.
그들은 방안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진시초(辰時初 : 아침 7시)가 되자 방문을 열고 여인이 나왔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무인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응. 수고 많아.”
여인이 인사를 받으면서 길게 기지기를 켰다.
여인의 사내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아니, 죽음 자체를 모르는 듯한 표정이다. 얼핏 보면 어제 죽인 집이 이 집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재미있군.’
호발귀는 피식 웃었다.
한 침상에서 같이 자던 사내가 죽었다.
사람이 죽으면 생기가 소멸한다. 그리고 몸이 텅 빈다. 기운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 기운이 없는 것…… 이것이 매우 기분 나쁘다.
이상하게도 아무 기운도 풍기지 않는 몸은 혐오감을 불러온다.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그래서 가까웠던 관계라고 해도 죽은 사람은 만지기 싫어진다.
인간이 아무런 기운도 풍기지 않으면 묘한 느낌이 드는데, 이것을 시기(尸氣)라고 한다.
시기는 사실 시신이 풍기는 싸늘하고 음침한 기운이 아니다. 아무 기운도 흘리지 않는 현상이다.
여인도 시기를 느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주변에서 보면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하고 편히 잠을 자다가 아침에 깨어난 후에야 죽은 것을 아는 경우가 있던데.
맞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여인은 아니다.
여인은 무인이다. 여인의 생기 속에 진기가 섞여 있었다. 이제는 그런 점을 분명하게 파악한다. 그저 푸른 빛만 보면 이 사람이 진기를 양성했구나, 아니면 진기를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는 구분이 단박에 일어난다.
여인은 기운에 민감하다. 기운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그러니 분명히 시기(尸氣)를 느꼈다.
시기를 느끼지 못했다고 해도 벌써 깨어났어야 한다.
사내의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가 침상을 흠씬 적셨을 것이다. 도저히 깨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사내의 죽음을 전혀 모른 척한다는 것은 이미 이런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대처방안이 준비되었다는 뜻이다.
일일십살 중 네 명이 여인과 같이 있었다.
그녀들, 네 명 모두 똑같이 행동한다.
방문을 밀치고 나와서 무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해를 쳐다보면서 길게 기지개를 켠다.
지금과 같은 때를 대비해서 행동지침이 세워져 있는 것 같다.
조용한 가운데 바쁜 움직임이 일어났다.
아침 일찍 급하게 전서구가 날아갔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지단에 일이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으니 당연히 본방에 보고할 것이다.
호발귀는 전서구를 추격하고 싶다는 충동에 휘감겼다.
전서구를 쫓아가면 혈천방 본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충동을 꾹 눌러 참고 지단을 살폈다. 지단에도 죽일 자가 많다. 본방 사람들은 놓치는 한이 있어도 이곳에서 반드시 죽여야 할 자가 있다.
‘귀무살!’
호발귀는 아직도 약초꾼을 죽이면서 키득키득 놀려대던 귀무살을 기억한다.
인간이 아닌 자들, 살인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죽어야 한다.
스스스슷! 스스스슷!
생기가 바쁘게 움직인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철저하게 숨어서 매우 은밀하게 움직인다.
순식간에 지단 전체에 경계망이 쫙 깔렸다.
겉보기에 지단은 여전히 평온하다. 일하는 사람들은 농담을 주고받는다. 오가는 사람들도 웃음을 짓는다. 밥을 짓는 사람도 태평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지옥이다. 경계서는 무인들,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바싹 타들어 갈 것이다. 입술이 마르고, 심장이 조일 것이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다. 너희들은 앞으로 지옥을 경험할 거야.’
호발귀는 저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읽었다.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인제 편하게 쉰다.
밤이 깊었다.
저들의 경계망은 풀어지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똑같은 경계망을 유지하고 있다.
바깥 경계망은 살피지 않았지만 아마 대폭 강화되었을 것이다.
저들은 흉수가 아직 안에 있다고 확신한다.
암중에 숨어 있는 자들은 지단 전체를 살필 수 있도록 배치되었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저들에게 발각된다.
‘자! 조사님! 이제 조사님 솜씨 한 번 볼까요? 제대로 된 무공이 아니면 원망깨나 들을 겁니다.’
호발귀는 원충노인에 투덜거리듯 말했다.
- 이놈아! 무공은 잘못된 게 없어! 제대로 펼치기나 해!
원충노인이 말하는 듯했다.
호발귀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쒝! 쉿!
빠르게 움직이고 멈춘다.
호발귀는 원충노인의 팔십일수 중 축지지망보(縮地蜘網步)라는 신법을 펼쳤다.
팔십일수에는 신법, 보법이 많다.
도둑놈, 소매치기를 양성하다 보니 은밀히 움직이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팔십일수에서는 신법과 보법을 통틀어서 동법(動法)이라고 하는데, 동법이 모두 열여섯 개나 된다. 은허신법이 그중 하나다. 어제 사용한 면사섬보도 마찬가지다.
축지지망보는 도둑질에 특화된 신법이다. 동법 열여섯 가지 중 가장 은밀하다.
여기 여섯 가지 심법 중에서 가장 은밀하다.
움직이고 멈추고 또다시 움직인다. 멈추는 동안에 이 주위를 경계한다.
인위적으로 한 번 움직인 다음에 멈춰야지 하고 생각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신법 자체가 그런 식으로 운용하도록 만들어졌다.
짧은 거리를 이동한다. 전력을 다해서 움직인다. 순간적으로 홱! 이동한다.
이때, 말하는 전력이란 말 그대로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힘이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데 전신 진기 모두를 쏟아내야 한다. 완전히 진기를 폭발시킨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이동한 거리는 짧지만, 진기는 즉시 고갈해 버린다. 완벽한 탈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본인은 탈진 상태를 의식하지 못한다.
순식간에 진기가 고갈되면 본인은 잠시 착각에 빠진다.
방금, 격하게 사용했던 진기의 느낌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탈진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여전히 진기가 충만하다고 여긴다.
이 순간에 진기를 보충한다.
몸은 이미 멈춘 상태다. 지망, 거미줄이라는 말대로 사방을 촘촘히 경계한다.
머리와 단전이 분리된다.
머리에 있는 시각과 청각은 극도로 날카로워져서 사방을 주시한다. 동시에 단전은 급히 잃어버린 진기를 보충한다. 머리와 단전이 각기 자기 할 일을 한다.
진기가 채워지면 다시 폭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난다.
축지지망보는 전력을 끌어내어서 움직인 만큼 무척 빠르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아도 발견하지 못한다. 천안통(天眼通)이라는 절정공부를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찾지 못한다.
팔십일수는 일본인을 겨냥해서 만든 무공이 아니다.
무인을 겨냥했다. 무인 앞에서 펼치도록 고안되었다. 천안통, 천시지청술 등등 모든 무공을 고려했다.
슷! 착! 슷! 착!
호발귀는 축지지망보를 펼쳐서 경계 무인들을 하나씩 따돌렸다.
그들은 호발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도 발견하지 못했다. 생기가 움직이지 않는다. 들썩거리는 일조차 없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다.
호발귀는 순식간에 지단 깊숙이 파고들었다.
오늘 또 일일십살을 시작한다.
오늘은 상당히 좋은 대접을 받는 자들을 일일십살 대상자로 정했다. 편안하고, 아늑하고, 경계가 삼엄해서 안전이 보장된 곳에 거처를 마련한 무인들이다.
이들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상당히 직책이 높을 것이다.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는 이미 낮에 정해놨다. 지단 한쪽 구석에 전각이 있는데, 지단 사람들이 상당히 조심한다. 전각 근처에만 가면 발걸음 소리조차 죽인다.
일일십살 대상으로 제일 적합하다.
쉬이잇!
축지지망보를 펼쳐서 전각 담장을 넘었다. 한순간에 담장을 넘고, 착지한 후에 잠시 멈췄다. 멈추는 동안에는 주위를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츠읏! 츠츠츳!
전각에서 생기가 감지된다.
전각에는 방 세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데, 각 방마다 한 명씩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죽일 사람은 세 명이다.
저들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혈천방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면 죽어 마땅하다.
파앙! 츗!
축지지망보는 경계가 삼엄한 곳에서 이동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 절정에 이르면 밝은 대낮에 수많은 사람이 깔린 곳에서도 물건을 빼낼 수 있겠다.
슷!
문을 열 때는 면사섬보를 사용했다.
손에 솜을 넣은 것처럼 부드럽게 만들어서 슬쩍 연다. 그리고 살며시 닫는다.
그 전에 하는 일이 있다.
스읏!
역천금령공을 끌어냈다. 생기가 따라서 올라왔다.
부드럽게 생기로 방 안에 있는 자의 생기를 다독거렸다.
푸른 빛 두 개가 어울린다.
방 안에 있는 자는 낯선 자가 방문을 밀치고 들어서도 경계하지 않는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 들어선 것으로 생각한다. 기운을 자신의 기운으로 느낀다.
생기를 사용해서 기척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발견이다.
이 방법이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다. 누군가의 등 뒤로 다가서도 상대방은 전혀 알지 못한다.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육감이 작용하지 못한다.
한데, 방안으로 들어선 호발귀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여기 있었군.’
자신이 줄곧 뒤쫓아오던 귀무살! 난검!
지단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 지 겨우 두 번째 날인데 운 좋게도 귀무살을 찾아냈다.
귀무살이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는 건 처음 알았다.
어떻게 할까? 깨울까? 깨워서 귀무살이 약초꾼을 놀리듯이 죽이던 것처럼 똑같이 죽여? 아니다. 귀무살은 그런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웃으면서 죽을 자들이다.
그냥 조용히 보낸다.
대신 고통은 최대한으로 가한다.
심장이 아니라 폐를 찔러서 죽인다.
폐를 찌르면 심장을 찌르는 것보다 고통이 훨씬 심하다. 고통이라야 촌각에 불과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고통을 제대로 안겨줄 생각이다.
호발귀가 사용한 살수는 매우 강렬해서 목숨을 매우 짧은 시간에 빼앗아버린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죽는다. 그러니 고통을 느끼는 시간도 짧을 수밖에 없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귀무살이 평생에 느꼈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안긴다.
스읏!
호발귀는 잠들어 있는 난검 앞으로 다가섰다.
웬만한 무인이라면 이 정도면 깨어난다. 무인이 아니라도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다. 낯선 자가 와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지 않나.
하지만 난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잠들어 있다.
생기로 생기를 보듬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어떤 느낌도 들지 않는다.
호발귀는 한 손으로 난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단검으로 허파를 푹 찔렀다.
푸우웃!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울렸다.
“웃!”
난검이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하지만 비명은 지르지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핏물이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난검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본능적으로 반격을 취하는 모양인데, 이미 늦었다. 어림도 없다.
“너한테는 참 편안한 죽음이다. 그렇지?”
호발귀가 속삭였다.
난검은 눈을 부릅뜨고 호발귀를 쳐다봤다. ‘너 누구냐!’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곧 눈동자가 위로 쳐들렸다. 검은 동공이 사라지고, 흰자위만 두 눈 가득히 담겼다.
슷! 푸우우!
호발귀는 단검을 빼냈다. 그러자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울렸다.
문득, 어쩌면 이곳 전각에 있는 다른 두 명도 귀무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상관없다. 모두 죽는다.
스읏!
호발귀는 축지지망보를 펼쳐서 신형을 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