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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127화 (127/500)

第二十六章 반격(反擊) (2)

호발귀는 논길을 걸었다.

논 위에 서리가 곱게 앉아 있다. 날씨도 제법 차가워졌다.

겨울 초입에서 아주 좋지 않은 일이 눈앞에 닥쳤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때 잘못된 물건에 손대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강하에서 태평스럽게 남의 주머니나 뒤지면서 잘살고 있을 텐데.

그때 삶과 지금 삶은 완전히 다르다.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일까?

그때 비하면 지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그때 삶이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사람을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편안하고 아늑한 삶이다.

호발귀는 서리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다.

팟!

생기가 여전히 강한 느낌을 토해낸다.

호발귀는 생기로 사람을 찾아냈다.

혈마록에도 존재 여부가 적혀 있지 않은 생기 추적법은 매우 정확하다. 눈과 귀로 찾아내는 어떤 추적법보다도 훨씬 빨리, 정확하게 상대를 찾아낸다.

호발귀는 생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생기는 오래전부터 한 곳에 있었다.

상대는 인기척을 흘리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한 장소에 조용히 머물고 있다.

마을 사람이 살육된 현장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 해도 관심을 끈다. 한데, 그는 그냥 도망가지도 않는다. 살육 자체를 모른다는 듯 태연히 머문다.

호발귀가 감지하는 생기는 인간의 생기와 짐승의 생기를 구별하지 않는다. 모든 생기는 다 똑같다. 그러니 숲에서 풍기는 생기가 짐승 것일 수도 있다.

아니다. 사람이다. 생기가 매우 강렬하다. 단지 생기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진기가 보태졌다.

이런 종류에 생기는 인간밖에 품지 못한다.

호발귀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 산책하듯이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생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오십 전후의 중년 여인이 쓰러진 고목 위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여인은 지난밤을 모닥불도 없이 지새웠는데,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 옷매무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매우 깔끔하고, 화려하며, 아름답다.

옷이 미모와 썩 잘 어울린다.

여인은 아름답다. 중년 나이인데도 겨우 서른 초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 주름도 없고, 피부에는 탄력이 넘친다. 상당히 곱게 늙었다.

“역시. 왔네.”

중년 여인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방긋 웃었다.

“제가 올 줄 아셨습니까?”

“다른 사람 같으면 내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르겠지만, 혈마라면 찾아오겠지 싶었어. 역시 혈마네?”

“누구십니까?”

“천살단 천원주 주당염.”

“아! 네.”

호발귀는 급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날 알아?”

천원주가 웃으면서 물었다.

호발귀의 표정에서 반갑다는 뜻이 읽혔다. 급히 포권을 취하는 모습에서는 당황하는 마음마저 엿보였다. 마치 알고 있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다.

“책사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도 되어주시고, 언니도 되어 주신다고.”

“그랬구나. 사실, 그것 때문에 왔어. 책사를 염려해서.”

“네. 말씀하시지요.”

“책사, 돌려줘.”

호발귀는 천원주를 쳐다봤다. 천원주도 눈길을 피하지 않고 호발귀를 빤히 쳐다봤다.

천원주가 말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 대충 짐작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잖아? 그 길에 꼭 책사를 데려가야 하나? 둘 사이에 간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책사를 아끼는 뜻에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쯤에서 놔줬으면 해.”

“책사를 저한테 보낸 게 천살단입니다.”

“맞아. 그래서 말했잖아. 책사를 아끼는 뜻에서 말한다고.”

“저는 책사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해서……”

“왜 이래?”

천원주가 빙긋 웃었다.

“우리 그냥 터놓고 이야기할까? 책사는 떠나지 않아. 성격이 외골수라서. 마음이 확인됐다면, 천살단보다는 마음을 쫓을 아이야. 그 정도는 알고 있잖아?”

“……”

호발귀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이다. 그녀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천원주가 아픈 상처를 콕 짚었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다는 건 떠나보내기 싫다는 거겠지. ‘네가 결정했어.’라는 핑계를 달아서 마음의 짐도 덜고. 그래도 할 말은 없어. 다 큰 사람들이 결정한 문제를 제삼자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지. 하지만…… 내 말 알 거야.”

터엉! 터엉! 터어엉!

호발귀는 천원주가 말하는 동안 계속 생기의 울림을 들었다.

천원주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음성은 담담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서 말하는 중이다.

말을 하는 중에 생기가 바르르 떨렸다.

이런 격동, 생기까지 뒤흔들 정도의 격동은 진심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저려 울려야지만 일어난다.

천원주는 짐심으로 책사를 걱정하고 있다.

천원주가 말했다.

“책사를 돌려줄 수 없을까? 이런 결정은 지금 아니면 늦을 것 같아서 왔는데.”

호발귀는 천원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돌려보내겠습니다.”

“고마워.”

호발귀는 천원주를 향해 두 손 모아 포권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휘적휘적 걸었다.

보내라. 알겠다.

더는 할 말이 없다.

지금 호발귀가 책사를 보낸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난다.

더 이어질 수가 없는 여건이다.

그러니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정도로 곤란해졌나?’

호발귀는 자신이 상당히 곤란해졌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어떤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니 천원주가 직접 책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넌 이미 끝났어’라는 사형 선고다.

호발귀는 천천히 걸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길이다. 올 때도 천천히 걸어왔지만 갈 때는 더 천천히 걷는다.

만약 그렇게 앞날이 절망적이라면 등여산을 보내는 것이 맞다. 등여산뿐만이 아니다. 도천패, 당홍 등등 옆에 있는 사람을 모두 떠나보내야 한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결코 좋은 길이 아니다.

누명을 쓰고 혈마가 된다. 앞으로 땅을 적시는 피가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 길을 다 같이 가자는 것은 욕심이다.

단순히 천살단이나 혈천방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었다. 중원 무림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후후! 강하 깡촌 놈이 출세했구나. 중원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라니. 이 정도면 정말 출세한 건데, 기분은 상당히 더럽네. 하하하!”

호발귀는 혼자 툴툴 웃었다.

“이거 화나서 안 되겠어. 밤새도록 분해서 한 잠 못잤어. 이 살인들을 내가 저질렀다 이거지.”

아침을 먹는 중이다. 모두가 둥글게 모여 앉아서 따뜻한 밥 한 끼 먹는다.

호발귀가 밥을 먹다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두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정말로 분한 듯 얼굴로 핏기가 올라와서 안색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혈천방이야 그렇다고 쳐. 그놈들은 얻어맞았으니까 무슨 짓이라도 하겠지. 그러면 천살단 이 새끼들은 뭐야? 기껏 정보를 줄테니 귀문을 두들겨 패라고 해놓고, 이제와서는 완전히 무시해? 천살단에서 뭐 들은 말 없지?”

호발귀가 등여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

등여산은 밥을 먹다 말고 묵묵히 호발귀를 쳐다봤다.

“천살단은 내가 혈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잖아? 그런데 왜 한 마디도 안 해!”

완전히 등여산에 대한 추궁이다.

처음부터 호발귀의 분노는 등여산을 향하고 있었다.

귀문 정보를 주겠다는 말도 등여산이 했다.

천살단은 자신이 흉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아무런 변명도 해주지 않으니 화가 난 건가?

호발귀는 화를 가라앉힌 듯 다시 밥을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식지 않는 듯 저금으로 뜬 밥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책사하고 있으면 항상 싸움이 생겨. 이상하게도 싸울 일이 계속 나타나. 더 웃긴 것은 싸우면 싸울수록 나만 나쁜 놈이 된다는 거야.”

호발귀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 뒤에 할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밥그릇을 들고 있는 등여산의 손길이 달달 떨렸다.

“그렇게 혈마가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인제 가짜 혈마까지 되어서 싸워야 해. 이게 말이 되나? 천살단은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 천살단도 내가 혈마가 되기를 원하나?”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등여산이 말했다.

호발귀는 잘 걸렸다는 듯 대뜸 쏘아부쳤다.

“그럼 솔직히 말해보자. 책사가 나한테 뭘 해줄 수가 있는데? 사람만 실컷 이용하고, 막상 일이 터지니까 뒤로 쏙 빠졌잖아. 아! 싫다! 가라. 더는 천살단에 우롱당하고 싶지 않아.”

호발귀가 벌떡 일어섰다.

“야! 문주! 너 간밤에 뭐 잘못 먹었냐! 어떻게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아얏! 왜?”

도천패가 호발귀에게 한마디 하다가 당홍에게 꼬집히자 곧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나보고 떠나라고 하는 거야?”

등여산이 호발귀를 보며 말했다.

“그럼 머무를 거야? 봐! 여기 전부 손에 피 묻힌 사람들이야. 책사는? 우리처럼 피 묻힐 수 있어? 어차피 혈마가 갈 길은 뻔해. 중원을 굴복시키던가, 내가 죽든가. 중원 굴복 속에는 천살단도 포함될 거고. 천살단 공격할 때 앞장 설 수 있다면 같이 있고.”

“정말 못 됐어.”

“책사,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 여기서 접자. 천살단 책사 처지에 날 따라다니기도 힘들 테고. 혈마가 되어서 마음껏 칼춤 추어야 하는데, 옆에서 거치적거리면 곤란해. 자꾸 쓸데없는 데 신경 쓰는 것도 싫고. 밥 먹고 가라.”

호발귀가 일어섰다.

등여산은 호발귀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말을 듣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호발귀는 천살단에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살단이 손 떼는 것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천살단을 아군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언제 등을 돌려도 이상하지 않다.

한데 오늘 아침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

아침에 산책 갔다 온 후부터 이상해졌다.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어.’

호발귀가 이런 말을 하는 요점은 결국, 가라는 말이다.

천살단으로 돌아가라!

호발귀는 자신이 혈마 편에 서서 피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라고 해도 놀랍지 않다. 말하는 순간이 예상보다 조금 빨랐을 뿐, 이런 말은 언제든 반드시 나왔다.

지금은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상황이 매우 급하지 않은데, 무슨 일이 있었지?

이런 말은 무시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호발귀 말대로 잠시 떠나려고 한다.

그녀는 다른 생각을 했다.

천살단은 호발귀에게 씌워진 살인 누명을 벗겨줄 수 있다.

단주가 직접 나서서 호발귀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해준다면 최소한 혈겁은 피할 수 있다.

물론 문제는 있다.

연유야 어쨌든 호발귀는 혈마 무공을 수련했다.

중원 무인들이 혈마 무공에 관해서 물어볼 때, 혈마 무공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할 때, 할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호발귀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해 줄 곳은 천살단뿐이다.

‘천살단에 다녀와야겠어.’

등여산은 떠날 생각을 굳혔다.

호발귀가 가라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단주에게 사정을 해볼 생각이다.

마침 천살단에서 귀환 명령을 내렸으니 일단은 귀환해야 한다.

이별 통보는 섭섭하지 않다. 지금은 천살단으로 떠나지만, 곧 다시 만날 수 있다.

문제는 호발귀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이다.

새벽까지만 해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차가운 사람으로 돌변했다.

틀림없이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

“전 천살단으로 가야겠어요.”

“가려고? 하! 마음 같아서는 붙잡고 싶지만, 가는 길이 다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쟤도 마음이 심란하니까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말이 좀 과하긴 과해서. 하지만 뭐 어쩌나. 본인 마음이. 저렇게 심란한데.”

해자수가 말했다.

“네.”

등여산이 대답했다.

“이번에 귀환하면 단주님께 부탁을 드려보려고요. 혹시 누명을 벗겨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동안 할 수 있으면 충돌을 최대한 막아주세요.”

“충돌이야 쌍방 간에 일어나는 일이지.”

홀리가 툭 쏘아붙였다.

“우리가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저쪽에서 공격해오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건 나도 아는데, 지금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지 알잖아.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게.”

“흥!”

등여산은 찬바람을 등에 안고 몸을 돌렸다.

사박사박 걸어가는 그녀의 등이 비 맞은 참새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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