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六章 반격(反擊) (1)
마을 어귀에 공동 우물이 있다.
공동 우물을 지나면 실개천이 흐르고, 개천을 건너면 대략 이십여 호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해자수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
호발귀가 ‘죽은 마을’이라고 말했으니, 이 마을도 다른 마을처럼 온통 시신만 널려 있을 것이다.
“이 미친놈들이! 이것들이 정말!”
해자수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웬만한 잔인한 풍경은 다 봤지만, 지금처럼 잔인한 모습은 처음이다.
머리가 깨지고, 창자가 쏟아지고, 팔다리가 잘렸다.
곱게 죽은 시신이 하나도 없다. 모두가 엉망진창이 되어서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뭐라고 할까?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벌레를 짓밟은 느낌이다.
아주 징그러운 벌레를 밟아 죽였다. 몸뚱이만 죽인 게 아니라 영혼까지 소멸시켰다.
“음!”
시신을 볼 때마다 신음만 쏟아진다.
“그러면은 여기가 대략 한 백 명. 지금까지 거의 천 명 가까운 사람을 죽였다는 거네? 이것들이 인간인가?”
해자수는 넋을 잃어버렸다.
몰살된 마을이 무려 일곱 개다.
이들은 아무 죄도 없다. 다른 날처럼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날벼락을 맞았다.
이들에게서는 저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기습당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살귀들에게 사지를 난도질당했다.
핏자국은 삼호에서부터 쭉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을 살겁은 마을 어귀에 있는 공동 우물부터 시작된다. 우물에 독이 풀어져서 복용하는 사람은 즉사한다. 우물가에 가보면 온갖 짐승들이 피를 토한 채 죽어있다.
한 마을을 완전히 멸절시켰다.
사람만 죽인 게 아니다. 농민들이 기르던 가축도 모두 잔인하게 도륙되었다.
돼지 한 마리가 열 토막으로 갈린 채 널브러진 곳도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민간인들을 상대로 무공을 시험했다. 무공 수련을 한 것이다.
쉬익! 쉬이익!
해자수 곁에 두 사람이 내려섰다.
호발귀와 도천패다.
“마찬가지지?”
도천패가 물었다.
“마찬가지지 뭐. 이것들 사람이 아냐. 짐승이야, 짐승.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마구 찢어놨어. 그쪽은 뭐 소득이 있나?”
해자수가 고개를 내두르며 말했다.
도천패가 고개를 흔들었다.
쉬잇! 쉬이익!
등여산과 홀리가 내려섰다.
호발귀와 도천패는 동쪽을, 홀리와 등여산을 서쪽을 수색했다.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살인자들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 살펴볼 심산이다.
쉬이이잇!
가장 늦게 당홍이 도착했다.
당홍은 북쪽을 수색했다.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들이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방향이다.
“이쪽은 아무것도 없어.”
홀리가 말했다.
두 여자가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까지 뒤졌다. 하지만 무인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쪽도.”
호발귀가 말했다.
그렇다면 살인자들은 좌우를 살피지도 않았다는 뜻이 된다.
길을 쭉 따라와서 마을을 피바다로 만들고, 다시 길을 따라서 북쪽으로 이동했다.
살인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세상 눈치를 보지 않는다.
“한 명이야.”
당홍이 말했다.
“한 명? 한 명이 이 짓을 했다고?”
해자수가 놀라서 되물었다.
“한 명이 아니야. 한 명이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거지. 이런 식으로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려면…… 귀무살이네. 혈천방이 귀무살을 움직인 거야.”
홀리가 말했다.
“귀무살은 원하는 대로 흔적을 만들어낼 수 있어. 한 명이든 열 명이든. 한 명이 한 짓처럼 보이는 것은 저들이 흉수 한 명을 원했을 뿐이야.”
홀리 말이 맞는다.
마을 사람들은 대략 십여 명이 죽였다.
한 명이 이 많은 사람을 일시에 죽일 수는 없다.
죽은 사람들의 시반을 살펴보면 시차가 나지 않는다. 거의 동시에 절명했다.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갈기갈기 찢어놨다. 죽이는 데 시간을 들였다는 소리다.
살인이 시작되었을 때, 이 마을에는 비명이 넘쳐났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호발귀는 옛 동무, 동패와 왕소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중 동패가 고문을 당한 끝에 죽는 모습은 직접 봤다.
동패는 넋까지 잃어버렸다. 아주 잔인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지극히 조용한 밤, 동패는 산채로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있었다. 팔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목숨만 부지하려고 휘적휘적 도망치다가 죽었다.
귀무살은 잔인한 자들이다.
정녕 귀무살은 이 세상에서 지워져야 하는 존재인가.
강하 친구들을 생각하면 귀무살은 흰 놈 남김없이 모두 사라져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살단과 부딪쳐서 형편없이 구겨지는 모습을 봤을 때는 너희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개과천선할 여지가 있다고 봤다.
될 수 있는 대로 친구를 죽인 귀무살만 처단하자.
다른 귀무살은 죽일 필요가 있나? 그들이 공격만 가해오지 않는다면 내버려 두자.
어차피 혈천방과 싸우는 게 아니다. 친구를 죽인 귀무살만 처단하려고 한다. 또 사부만 빼내오면 된다. 그 외에는 무림에 간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호발귀는 그런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귀문을 공격하는 것은 혈천방에게 사람을 내놓으라는 소리다. 저들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알고 있으니, 그들만 내놓으면 더는 만날 일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을에서 저지른 일이 귀무살 짓이라면 이와 같은 일을 다른 곳에서도 했다는 얘기가 된다.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하기는…… 귀무살이 되기 위해서는 아흔아홉 명을 죽여야 한다. 귀무살은 탄생부터 피를 머금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절대적인 살인 기계다.
호발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순간, 호발귀는 귀무살을 세상에서 없애기로 작심했다.
귀무살이 되려는 자들, 귀문 문도 역시 싹 쓸어버린다. 지금까지는 원하는 것을 달라는 요구였지만, 지금부터는 혈천방 귀무살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다.
이것은 매우 단호한 의지다. 호발귀든 혈마든 누가 되었든 반드시 이행할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이를 악물며 지켜야 할 맹세다.
타탁! 타탁! 타탁!
그들은 논 한복판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보냈다.
마을에 들어가서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따뜻한 밥도 먹겠다는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니, 지금은 생각조차도 하지 못할 일이 되어 버렸다.
쉬이이잇!
멀리서 바람처럼 한 사람이 날아왔다.
해자수다. 그가 일행이 모여있는 모닥불을 향해서 쏜살같이 달려왔다.
“왔어요? 물부터 한 잔 드세요.”
등여산이 해자수를 반기며 뜨거운 물을 따라주었다.
“어휴!”
해자수가 불 가에 앉으며 차를 받았다. 그리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상황이 별로 안 좋나 봐?”
홀리가 물었다.
“이것 좀 마시고. 하! 이거야 원…… 후루룩!”
해자수는 뜨거운 물을 후후 불어가며 천천히 마셨다.
모두 해자수를 쳐다봤다. 하지만 해자는 물만 마실 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대충 짐작하고 있으니까, 말해봐.”
홀리가 채근했다.
“말할 게 뭐 있나? 책사 말대로지.”
해자수가 툭 말했다.
“역시 생각대로야. 소문이 벌써 쫘하게 번지고 있어. 뭐 혈마 탄생이라나 뭐라나. 혈마가 사람을 무참히 죽이고 있다. 사람만 보면 사정없이 죽인다. 삼호에 가봐라. 혈마가 만들어놓은 짓을 봐라. 뭐 이런 소문이지 뭐.”
해자수가 다시 물을 마셨다.
“혈마가 죽인 게 일반인이다. 마을 일곱 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렇지?”
“그렇지 뭐. 소문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보다도 훨씬 부풀려져서 번지고 있어. 거의 악마 수준이야. 소문 중에는 개새끼 목을 물어뜯어서 죽였다는 말도 있더라니까. 사람이 무슨 개도 아니고, 어떻게 목줄을 물어뜯는지 원.”
“혈마 이름이 뭐래요?”
등여산이 불쑥 물었다.
“……”
해자수는 슬쩍 호발귀를 쳐다봤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짐작했다. 호발귀를 쳐다본 눈길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설마! 이름까지 알려진 거야?”
홀리가 물었다.
“그렇다니까. 호발귀라는 이름 석 자가.”
해자수는 말을 이으려다가 호발귀를 쳐다보고는 꾹 다물었다.
모두 침묵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누명을 벗을 길이 없다.
호발귀는 혈마,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추종자가 된다.
“어떻게 할 거야?”
당홍이 호발귀를 쳐다보며 물었다.
호발귀라고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다. 솔직히 이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생각해 보죠.”
호발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허수아비가 길가에 바짝 붙어서 세워졌다. 논 한가운데에 있어야 할 허수아비인데……
허수아비는 한 손을 구부려서 등 뒤로 돌리고 있다. 다른 손은 하늘을 가리킨다. 사람이 뒷짐을 지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는 형상이다.
천살단이 보내는 명령이다.
- 귀환하라!
등여산은 아무것도 못 본 척 무심히 지나쳤다.
‘어떻게 하지?’
단주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말은 천살단이 호발귀에게서 손을 완전히 뗀다는 뜻이다.
원래는 호발귀를 이용해서 귀문을 공격하려고 했다. 천살단을 귀문 정보를 꽤 많이 수집했고, 적어도 두세 군데 정도는 더 공격할 자료가 남아있다.
그런데 이제 막 한 군데 쳤을 뿐인데, 돌아오라고 한다.
혈천방의 역습이 그만큼 주효했다.
혈천방이 호발귀를 직접 공격할 것과 지금처럼 간접적으로 돌려칠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두었다.
다만 시기가 조금 빨랐다.
귀문이 두어 개 정도 무너진 후에야 혈천방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했다.
완전히 허를 찔렸다.
설마 귀문 사문이 공격당하자마자 바로 역습을 가해올 줄이야.
일이 이렇게 진행된 이상, 앞에 펼쳐질 일은 아주 분명해졌다.
호발귀가 공격당한다.
우습게도 호발귀 공격에 혈천방과 천살단은 모두 빠진다.
두 집단은 일만 저질러놓고 쏙 빠졌다.
아마도 이번 공격은 중원 무림이 앞장설 가능성이 크다. 민간인이 도륙당한 사건이지 않나.
천살단에서 등여산에게 귀환 명령을 내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원 무림이 공격하는 곳에 천살단 책사가 있다면 일이 우스워진다. 천살단까지 오해를 받는다. 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혈마하고 어떤 관계인지는 소명해야 한다.
등여산 귀환은 천살단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됐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
등여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중원 각지에 격문이 돌고, 울분을 이기지 못한 무인들이 모여서 공격에 돌입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직은 안심해도 된다. 하지만 중원 무림과 충돌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니, 피할 수 있기는 하다. 은거에 필적할 정도로 완전히 잠적하면 된다.
하지만 호발귀는 물러서지 않는다. 지금 기세로 보면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혈마나 나타난다. 위도에서 보았던 살인귀가 반드시 나타난다.
혈천방은 어쩌자고 이백 년 전 혈마를 소환하는가!
‘어떻게 하지?’
등여산은 고민했다.
지금 이대로 귀환하면 두 번 다시 호발귀와 만날 수 없다. 양쪽 사이에 건너지 못할 강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곤경에 처한 호발귀를 버리고 돌아선 격이 된다.
등여산은 호발귀가 좋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과 천살단 일원으로 무림 정의를 지키는 일 중 어느 것이 우선할까?
등여산은 강한 시험에 들었다.
‘아!’
등여산은 남몰래 한숨 지었다.
그녀의 고민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