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五章 혈마(血魔) 유인(誘引) (4)
이호독진은 파훼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었다.
연통 위치를 멀리 떨어트려 놓고. 백발연시포를 잘 배치하면 도저히 깰 수 없는 진이 된다.
이호독진을 파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단점이다.
위도에 이호독진을 설치한 사람은 매우 고지식했다. 연통 위치를 독괴가 말한 대로 딱 그만큼의 거리만 벌렸다. 어쩌면 이호독진을 철저히 믿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호독진을 창안한 독괴는 독진이 파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또 무적으로 만들 방법도 찾아냈을 것이다.
독괴는 이호독진이 무적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누군가가 독진을 깰 수 있게끔 교묘하게 단점을 만들어 놨다. 물론 이런 단점조차도 찾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대부분은 진의 중심에 접근도 하지 못한다.
독괴가 왜 단점을 보완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 덕분에 이호독진을 파훼했다.
‘나중에 알 날이 있겠지.’
호발귀는 두 손으로 자신을 꼭 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는 홀리를 쳐다봤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살기가 무섭게 일어나는 것을 봤다. 위도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는 자신을 봤다. 검을 휘둘러서 나무를 모조리 베어냈다. 죽은 시신을 찌르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모두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한순간, 정신이 똑 떨어졌다.
그 이후는 생각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홀리가 자신을 안고 잠들어 있다.
호발귀는 정신을 차린 후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들어 있는 홀리가 너무 편안해 보여서 조금이라도 더 잠자게 깨우지 않았다.
홀리는 잠들지 않았다.
호발귀의 어깨에 기대서 조용히 심장 박동 소리를 아름다운 음악처럼 듣고 있었다.
그녀는 호발귀가 깨어나는 것을 알았다.
‘이대로 있고 싶어.’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호발귀를 처음 안아봤다. 듬직하고, 편안하고, 따뜻하다. 이 느낌을 계속 만끽하고 싶다. 꼭 껴안은 손을 풀고 싶지 않다. 이대로 조금이나마 더 있었으면 좋겠다.
호발귀의 마음속에는 등여산이 들어있으니, 조용히 손을 풀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이대로 있고 싶다.
그런데 호발귀가 손을 풀어내지 않았다. 마음에 있지 않은 여인이 몸을 안고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여자가 안고 있는 게 좋아서 내버려 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쳐다보더니 더 자라는 듯 움직임을 멈췄다.
이 남자 정말 위험한 남자다.
이렇듯 마음의 여운을 주면 계속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 틈이 보이는데 어떻게 포기하고 물러서나. 어차피 받아들이지 않을 여인이라면 냉정하게 쳐내야지.
홀리는 호발귀가 어떤 사내인지 안다.
지금 자신이 등여산을 보내라고 윽박지르면 등여산은 당장 쫓겨 나간다.
호발귀에게는 남녀 간의 정보다는 혈마가 되었을 때 자신을 죽여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 최우선이다. 절대적인 요건이다. 모든 문제는 다음에 들어선다.
호발귀에게 같이 자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 같이 잘 것이다. 첫 번째 절대적인 요건 속에 포함된 일이다. 도천패를 보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호발귀 주변을 마음대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호발귀를 얻는 것은 아니다. 호발귀 마음속에는 여전히 등여산이 남아 있다.
무슨 수를 써도 그 마음을 뺏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보여준 인정은 순수하다. 첫 번째 명제에 포함되지 않은 따뜻한 마음이다.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이 여인이라서 내버려 둔 것이 아니다. 홀리라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곤하게 자는 것처럼 보여서 차마 깨우지 못한 것이다.
‘이런 건 재미없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줘야지.’
“으음!”
홀리는 뒤척이는 척했다.
그래도 호발귀는 가만히 있다.
홀리가 고개를 쳐들어 호발귀를 쳐다봤다.
“어? 깨어났네?”
“좀 더 자지. 힘들었을 텐데.”
“몸을 안고 있는 사람은 난데, 마음을 안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같은 사람? 다른 사람?”
“……”
“또 딱딱하게 굳어진다. 재미없어. 그만 일어나야지. 사람들이 기다려. 여기 온 지 한참 됐어. 모두 어떻게 됐는지 눈이 빠지라 기다릴 거야.”
홀리가 벌떡 일어났다.
호발귀도 따라서 일어났다.
“몸은 어때? 괜찮아?”
“가뿐해.”
“그럼 운기 해봐.”
“……”
“혈마다 싶으면 죽여야지.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 혈마가 될 때 하필이면 중독되는 바람에 죽이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확인해 봐야지. 운기 해봐.”
“흠!”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발귀는 선 채로 역천금령공을 끌어올렸다.
진기를 일으키자 따뜻한 기운이 확 풍긴다. 호발귀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런데…… 혈선이 나타났다.
‘이런!’
홀리는 속으로 탄식했다.
확실히 혈선이다. 등여산이 잘못 보지 않았다. 호발귀는 혈마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혈선이 왜 사라지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혈마가 되어간다.
“지금 기분 어때?”
“괜찮아.”
“살기는?”
“괜찮아.”
“그럼 이제 혈천도법을 펼쳐봐.”
스릉!
홀리가 자신을 검을 뽑아서 내밀었다.
호발귀는 검도 잃어버렸다. 검은 어디에 내버리고 허리에 빈 검집만 차고 있다.
“됐어. 이 정도면. 다 괜찮아.”
“그래도 펼쳐봐. 정말 괜찮나 보게. 역천금령공을 최상까지 끌어내서 펼쳐. 그래야 확실하게 알지.”
“최상까지? 그건 좀 곤란한데.”
호발귀는 난색을 보였다.
역천금령공을 최상으로 펼치면 살기가 일어난다. 혈마로 변한다.
방금까지 지독한 살기에 휘감겨서 쩔쩔맸는데 그 순간을 또 경험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홀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혈천도법, 최상으로 펼쳐봐. 만약에 지금 혈마가 된다면 나중에도 될 수 있다는 거잖아. 나중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혈마가 되면 널 죽이지 못할지도 몰라. 어제처럼 불가항력이면 못 죽이지. 지금은 제대로 돌아왔지만 영영 못 돌아오면 서로 힘들어져. 난 봐야겠어. 품앗이했으니 볼 의무도 있고.”
호발귀는 홀리를 쳐다보더니 그녀의 손에서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혈천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쉬링! 쉬링! 쉬링!
검이 좌우로 교차해서 움직였다. 나비 날개를 그리는 듯 팔자를 그린다.
혈천도법이 아니다. 홀리가 보지 못했던 움직임이다.
“뭐 하는 거야? 혈천도법을 펼치라니까!”
호발귀는 홀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부드럽게 검초를 이어갔다.
팔자를 그리던 검이 상단으로 쭉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뚝 떨어져 내렸다.
팔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검은 적어도 세 배 또는 네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인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꽝! 떨어졌다.
“혈겁도!”
홀리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호발귀는 매우 가볍게 손을 썼다. 하지만 그녀가 전력을 다해서 펼친 것보다 훨씬 강한 도법을 쳐냈다. 호발귀는 아무것도 치지 않았는데, 검이 떨어지는 순간에 홀리는 ‘꽝!’ 소리를 들었다.
스읏!
호발귀가 다시 검초를 이어갔다.
휘리리리릭!
호발귀는 검을 놓았다. 검을 손아귀로 잡지 않는다. 손등으로, 손가락으로, 손바닥으로…… 손 전체로 휘감아 돌린다. 검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휘릭! 휘릭! 맴돈다.
“혈타조두!”
퓨아아악!
홀리가 도초를 알아보기 무섭게 검이 하늘을 향해 화살처럼 찔렀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의 머리털만 잘라낸다는 혈타조두가 터졌다.
홀리가 알고 있는 혈천도법이 아니다.
어제만 해도 호발귀는 그녀가 아는 혈천도법을 펼쳤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혈천도법을 펼친다. 훨씬 부드럽고, 빠르고, 강렬하다. 그녀보다 적어도 두 배는 강하다.
“아!”
홀리는 탄성을 토해냈다.
호발귀가 휘두르는 검에서 붉은 불꽃을 봤다.
무형의 진기가 유형화되어서 검에 실렸다. 검에 이령귀화의 불꽃이 담겨서 퍼져나간다.
극강에 가까운 혈천도법이다.
스륵!
호발귀가 검을 거뒀다. 그리고 검을 거꾸로 잡고 홀리에게 건넸다.
“괜찮지?”
“괜찮네. 살기는?”
“아직은 괜찮아.”
이 순간, 홀리는 놀라운 일을 봤다.
이마에 선명하게 드러났던 혈선이 스르륵 소멸하고 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피부 속으로 잠겨든다.
“이거 알아?”
홀리가 자신의 이마에 세로줄을 그어 보였다.
“내 이마에 뭐가 묻었어?”
“혈선.”
“혈선?”
“모르는구나. 혈선은 혈마가 된다는 징조야. 지금 이마에 혈선이 나타났어. 한데 이상한 게, 혈선은 한 번 나타나면 지워지지 않거든. 그런데 지금 사라졌어. 무공을 펼칠 때만 나왔다가 사라져. 밖에 나가면 두건부터 사야겠다.”
홀리가 검을 받아서 검집에 넣었다.
“정말 괜찮지?”
“괜찮아. 괜찮냐는 말, 이번에 물으면 열 번 째야.”
“여기 오기 전에 책사에게 말했어. 혈마가 되었으면 죽이겠다고. 조정하지 않겠다고. 정말 죽이려고 왔고. 그런데 이렇게 건강하게 있네? 고마워. 난 정말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앞으로도 내게 나쁜 역할 맡기지 마.”
말을 마친 홀리가 홱 돌아섰다.
홀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으로 혈천도법을 펼쳤다. 그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역천금령공을 끌어올릴 때 생기를 끌어내지 않았다. 푸른 빛을 담지 않았다.
생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살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도천패를 치료하면서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알았다.
푸른 빛을 쏘아냈는데, 연한 하늘빛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원정에 안착하자마자 무섭게 살기가 일어났다. 도천패마저 죽이고 싶던 마음, 생생하게 기억한다.
푸른 빛 생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근원이다. 그것만 손대지 않으면 무탈하다.
생기가 밖으로 나가면 굉장한 위력을 떨친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그냥 오지 않는다. 바깥에서 오염이 되었는지 이상하게 변질하여서 온다.
변질한 생기가 살기를 일으키는 것 같다.
이 부분은 호발귀도 조절하지 못한다. 생기가 왜 변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생기를 이용하지 않고 역천금령공을 최상으로 끌어올린 칼이 바로 지금 펼친 혈천도법이다.
방금 펼친 혈천도법은 역천금령공을 십 성 가득 담아서 펼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기를 실으면 지금과는 상대도 안 되게 강해진다. 생기를 담았을 때와 담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거의 십 분지 이 정도나 된다.
장난하듯이 이성 정도의 힘만 실어서 혈천도법을 펼친 것이다.
앞으로 두 가지를 알아가야 한다.
하나는 왜 생기로 무공을 펼치면 변질하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알아내지 못할 것 같다.
혈마 무공은 생기를 이용한 무공이다. 생기가 변질하여 살기를 일으킨다.
옛날, 혈마도 이 문제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혈마가 되었다. 혈마후의 조정을 받으면서 중원을 절반 이상이나 피로 물들였다. 극심한 살기로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였다.
혈마는 생기가 변질하는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혈마가 되었다.
자신이 혈마보다 뭐가 잘났다고 알아낼 수 있을까.
당분간 생기는 안 쓰는 게 최선이다.
두 번째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아니, 찾아내야 할 것이 있다.
어제 혈마가 되었다. 혈마가 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끈질기게 살기를 지켜봤기 때문에, 자신이 한 행동을 모두 기억한다. 어디를 어떻게, 어떤 짓을 하면서 돌아다녔는지.
그러다가 정신이 똑 떨어졌다.
살기를 주시하던 눈길이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였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진짜 혈마가 되었어야 한다. 호발귀로 돌아오지 못했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시 돌아왔나.
이 부분만 찾아도 혈마 무공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역천금령공과 이화귀령의 위치를 바꾼 후, 혈마에서 벗어난 줄 알았다.
아니다. 이화귀령이 생기를 훨씬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살기가 일어났다.
역천금령공은 생기를 훨씬 많이 감싼다.
그러니 둘의 위치를 바꿨을 때, 확연히 살기가 줄어들었던 거다.
“하아!”
호발귀는 홀리 몰래 한숨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