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五章 혈마(血魔) 유인(誘引) (3)
살기를 있는 대로 전부 터트린다.
살기가 터져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기만 터뜨리는 게 아니다. 한편으로는 원충 노인의 팔십일수 무심무실공을 일으킨다.
사실 무심무실공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무심무실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니 무무공(無無功)이 되어야 한다. 궁극에 이르면 무공(無功)이 되어야 하고, 결국은 무(無) 한 글자로 끝나야 한다.
무심무실공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공부다.
두 무공을 한꺼번에 일으킨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일단, 무당파(武當派)의 양의심공(兩儀心功)이나 곤륜파(崑崙派)의 분심공(分心功) 같은 공부가 필요하다.
호발귀에게는 무정삼절이 있다.
무정삼절은 원래 두 가지 병기를 동시에 사용할 요량으로 만든 공부다. 검법과 창술처럼 사용 방법이 완전히 다른 병기를 동시에 떨쳐낼 수 있다.
무정삼절을 응용해서 한쪽으로는 역천금령공을 흐르게 하고, 다른 쪽은 무심무실공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게 안 된다.
병기라면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지만, 심공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쪽에서는 살기가 터져나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살기조차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있겠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된다. 이미 몸과 마음이 모두 살기로 휘감겼다.
평소,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생각했었다.
역천금령공과 무심무실공을 동시에 일으킬 수 있다면 혈마 걱정은 평생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했지만, 결론은 늘 똑같다. 안 된다.
역천금령공이 살기에 휘감기지 않은 상태에서는 가능하다. 두 가지 공부가 동시에 일어난다.
두 개를 같이 응용해서 사용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역천금령공이 살기에 휘감긴다면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팔팔 끓는 용광로 속에 물방울을 떨어트려봤자 금방 증발해 버린다. 물을 항아리째 쏟아부어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시냇물 정도는 끌어와야 용광로를 식힐 수 있다.
한데 그것도 정도 나름이다.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 줄기가 쏟아져 내린다면 시냇물로도 통제가 안 된다.
혈마 살기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완전히 육신을 지배한다. 그래서 무심무실공을 일으킬 자리가 완전히 사라진다.
‘일단 무심무실공은 잊는다. 가장 단순한 방법, 살기만 지켜보는 거야. 오직 쳐다보기만 하는 거야. 이거 하나만 유지하자.’
호발귀는 모든 무공을 잊었다.
살기가 일어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일어나게 내버려 둔다. 다만 지켜보기는 한다. 지켜보는 것은 의지로 할 수 있다. 정신을 잃지 말고 오직 지켜보는 눈, 눈길만은 꼭 잡고 늘어진다. 시선을 절대로 떼지 않는다.
지켜보는 눈은 의식이고 살기는 마음이다.
이 두 개가 별개로 쪼개시면 성공하는 것이다.
살기가 의식마저 삼켜버리면 혈마가 된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살인귀로 변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무조건 때리고, 죽인다.
보는 것이, 의식이 살기를 지배하면 본래대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미 살기가 거칠게 변했기 때문에 의식이 살기를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지금 상태는 살기가 백이면 의식은 영이다. 어떻게 영이 백을 이기나.
그러니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서로 쪼개자는 것이다.
살기는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다. 다만 의식도 조금만 남겨놓자는 거다. 완전히 살기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눈을 남겨놓자는 것이다.
호발귀는 살기가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화가 나면 화를 냈다. 검을 휘두르고 싶으면 휘둘렀다. 발로 차고 싶으면 발로 찼다. 신경질적으로 흙을 걷어차기도 했고, 호숫가로 가서 죽어 있는 귀문 문도는 짓밟기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여전히 살기가 맹렬하게 일어난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진다.
누구든 죽이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용히 무심무실공을 운용했다.
너는 너, 나는 나다.
밖에서는 때려 부수고, 안에서는 잔잔한 물결을 만든다.
이 물길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 물결로 살기를 가라앉히자는 게 아니다. 혈마가 되도록 내버려 둔다. 단지 완벽하게 미치지만 말자는 것이다.
지켜보는 눈을 놓지 않는 이상 넋 빠진 혈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악독한 짓을 하더라도 제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오직 하나, 살기를 지켜보는 이유다.
삐걱! 삐걱! 철썩!
도천패가 노을 저었다.
도천패는 자초지종을 알고 난 다음부터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도 도천패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결국, 도천패를 살린 대가로 호발귀가 혈마가 됐다는 얘기 아닌가. 그런 말을 듣고도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느 누가 편안할 수 있나.
호발귀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아니면, 어쩔 수 없었다.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도천패의 처참한 마음을 풀어줄 수는 없다.
하다못해, 말 많은 해자수조차도 멍하니 호수만 쳐다보고 있다.
끼이익! 철썩! 끼이익! 철썩!
도천패가 노를 저을 때마다 작은 배는 미끄러지듯 쏜살같이 쏘아나갔다.
도천패는 노를 천천히 저었다.
호발귀에게 최대한 시간을 주려는 듯 노를 저은 후에는 몇 번 숨을 골랐다. 하지만 워낙 힘이 세기 때문에 한 번 노를 저을 때마다 쾌속선처럼 쭉쭉 미끄러졌다.
“약속된 시간이 한 시진이라며? 이렇게 가다가는 반 시진도 안 걸리지 않을까?”
해자수가 말했다.
그 말에 도천패가 노를 놓았다.
모두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호수만 쳐다봤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홀리가 말했다.
“책사. 나는 언제까지든 기다려 줄 수 있어. 결정은 네가 해. 네가 들어가자고 말하면 그때 들어갈게. 내 생각에는 이미 혈기를 띄웠다면 늦은 거야. 지금 가나 나중에 가나 마찬가지라고. 급할 것은 전혀 없어. 알아서 결정해”
등여산은 침묵했다.
그녀도 이성적으로는 홀리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호발귀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홀리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혈마를 조종하면 수족이 돼. 병기가 되는 거야.”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해자수가 살짝 낮은 소리로 말했다.
홀리는 해자수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내 남자가 아니고 병기를 옆에 두는 건데, 난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 호발귀 말대로 죽여주려고 해. 생각이 다르면 말하고.”
등여산은 이번에도 말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까? ‘그래 죽여.’하고 말할까? 아니면 ‘아니야. 살려줘. 네가 조종해’ 그렇게 말할까.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노를 저어주세요. 이미 한 시진이 지났어요.”
등여산이 말했다.
도천패는 노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쭉쭉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도천패도 이번에는 노를 늦추지 않았다. 빨리 젓지도 않았지만, 멈추는 일도 없었다.
삐걱! 철썩! 삐걱! 처얼썩!
작은 배가 쑥쑥 나아가면서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
섬을 떠날 때는 몰랐는데 다시 돌아오고 보니 독무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 수 있다.
“어휴! 냄새.”
해자수가 역겨운 냄새를 이기지 못하고 코를 틀어막았다.
위도는 매캐한 냄새가 잔뜩 베여 있다. 섬 전체가 독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멀리서 봐도 독이 휩쓸고 간 자리가 뚜렷하게 보인다.
독무는 흔적을 뚜렷이 남겼다. 풀들이 다 죽었다. 나뭇잎이 회색으로 변해서 떨어졌다. 독기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땅조차도 시커멓게 변색하였다.
위도는 완전히 죽음의 땅이 되었다.
“모두 배에 있어. 절대 내리지 말고.”
홀리가 말했다.
“나도 혈마를 대하는 건 처음이기 때문에 조종술이 통할지 확신하지 못해. 내가 잘못되면 모두 물러서. 그리고 위도를 철저히 통제해. 혈마를 절대로 세상에 내보내지 마.”
“꽉 막힌 섬에서 혈마가 된 게 다행인가?”
해자수가 말했다.
“입 좀!”
홀리가 사납게 말하자, 해자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배에서 내리지 마. 내가 내 발로 나타날 때까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그냥 떠나.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내 말 잊지 마. 절대로 혈마를 세상에 내보내면 안 돼. 혈마후가 없는 혈마는 재앙이야.”
홀리가 혼자 배에서 내렸다.
사박! 사박!
그녀가 호숫가를 걸어갔다. 누구도 홀리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스읏!
등여산이 배에서 내렸다.
“아니! 저거…… 배에서 내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자수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당홍이 놀랄 눈으로 등여산을 보며 말했다.
호숫가에 내린 등여산은 길게 기지개를 쭉 켰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공기를 마신다는 듯이.
“호발귀, 혈마로 변했을 리 없어. 밥이라도 지어놓아야 하는데. 어떡하지? 여긴 모두 독이 묻어있어서 밥을 지을 수가 없네? 고기는 괜찮을까?”
등여산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호수를 쳐다봤다.
“하! 미쳤구나. 미쳤어.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미칠 수도 있나?”
해자수가 등여산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홀리는 섬을 한 시진이나 뒤진 끝에야 선 한 귀퉁이에서 간신히 호발귀를 찾아냈다.
호발귀는 호수가 보이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두 자리를 쭉 뻗고, 두 손은 허벅지에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푹 떨군 상태였다.
‘죽었나?’
첫 번째로 일어난 생각이다.
누구든 호발귀 모습을 보면 죽은 사람이 떠오를 것이다. 꼭 어디서 칼 맞아 죽은 시신이 호숫물에 떠밀려온 느낌이다. 그만큼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홀리는 호발귀에게 걸어갔다.
호발귀는 의식을 잃었다. 죽은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까무러쳤다.
홀리는 호발귀의 고개를 들어 이마를 살폈다.
혈마의 흔적은 혈선은 보이지 않는다.
혈선이 없다면 혈마가 되지 않았다. 혈마가 되면 이마 한가운데 붉은 혈선이 나타난다.
붉은 혈선은 점점 미간으로 이동해서 종래에는 미간 한가운데 둥그런 점이 생긴다.
제 삼의 눈과 같은 자리다.
천축(天竺) 여인들이 미간 한가운데에 찍는 붉은 점, 빈디와도 흡사하다. 빈디는 생명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다. 다른 말로는 ‘직관(直觀)의 눈’이라고도 한다.
혈점은 완전히 다르다. 혈선, 혈점이 왜 생기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혈점이 생기는 순간, 혈마는 혈신이 된다. 아무도 죽일 수 없는 무적의 살인 병기가 된다.
또 혈점이 생기는 순간, 혈마는 모든 초점을 오직 혈마후에게만 모은다.
혈마후가 세상에서 접촉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혈마후만 보게 되고, 혈마후의 음성만 듣고, 혈마후의 뜻을 좇아서 세상을 요리한다.
홀리는 전혀 표식이 없는 이마에서 붉은 혈선 자국을 찾아냈다.
겉보기에는 아무 표식도 없지만, 사실은 살 속 깊은 곳에 혈선이 잠재되어 있다.
‘기이한 현상이네.’
홀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선은 일단 나타나면 사라지지 않는다. 혈선이 미간으로 내려오는 과정은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지만 혈선 자체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호발귀는 혈선을 드러냈다.
등여산이 한 말이니 틀림없다. 설마 그녀가 혈선을 잘못 봤겠나.
아니, 혈선이 나타난 것은 맞다. 그렇지 않으면 피부 속에 숨겨져 있을 리 없다.
나타나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혈선이 사라지다니. 아예 지워진 것도 아니고 피부 속에 잠복하여 있다니.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현상이다.
“당신 참 희한한 사람이야.”
홀리는 호발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살며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처음에는 어깨만 기댈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곧 손을 들어서 호발귀를 껴안았다.
호발귀는 어쩌다가 이곳까지 왔을까?
왜 이곳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죽은 듯이 앉아 있는 것일까?
의식은 왜 잃었지?
홀리는 온갖 생각을 떠올리다가 곧 모든 생각을 지워버렸다.
호발귀를 껴안은 손에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쾅쾅 뛰는 움직임이 또렷하게 잡힌다.
이거면 됐지 않나.
“살아 돌아와서…… 고맙네.”
홀리를 호발귀를 더욱 깊이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