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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113화 (113/500)

第二十三章 위도(蝟島) (3)

등여산은 땅에 그린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혹, 그림을 보다가 잠이 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시간이 꽤 됐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않을까?”

해자수가 나직이 말했다.

마음이 조급해서 말을 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사색에 방해가 될까 봐 조심했다.

등여산이 생각에 잠긴 지 무려 반 시진이 지났다.

호수를 은밀히 건너와서 적진 한복판에 들어섰다. 몸 가릴 것 하나 없는 호숫가에서 무려 반 시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멀뚱하게 앉아있다.

밝은 달빛을 받으며 호숫가에 앉아있으면 은밀히 진입한 효과가 없지 않나.

남의 땅에 숨어든 사람에게 반 시진이라는 시간은 매우 길다.

매 순간이 억겁처럼 느껴진다.

이러다가 경계서는 무인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독이고 뭐고 아랑곳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

섬에 깔린 독이 무엇인지 모르니 피독단도 준비할 수 없다.

그러니 독이 없는 호숫가에서 싸워야 하는데, 영락없이 막다른 궁지에 몰린 쥐 꼴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등여산은 매우 편안해 보였다.

쭈그리고 앉아서 그림을 보고 있는데 얼굴에 윤택이 흐르고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굉장한 몰입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 탐구한다.

이것이 책사의 본래 모습인가.

휘익! 휙!

당홍은 연신 숲에 독가루를 뿌렸다.

독을 뿌려서 독을 자극한다. 그러면 뿌려진 독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때, 등여산이 고개를 들어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혼자 왔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나 혼자?”

“응. 혼자 왔다면.”

“난 이 길로 쭉 갔지.”

호발귀가 독 없는 길을 가리켰다.

호발귀도 독기를 알아챘다. 독섬칠공을 알고 있으니 당홍만큼이나 빨리, 정확하게 독기를 알아냈다.

물론 독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하지만 독이 있다거나 없다는 정도는 안다. 약한 독인지 강한 독인지도 구분한다. 부딪혀도 괜찮은 독인지, 아니면 반드시 피해야 할 독인지도 판단한다.

호발귀가 판단하기에 위도에 깔린 독은 매우 치명적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어서 피해야 한다.

그가 혼자 왔다면 당연히 독 없는 길로 간다.

등여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쪽 길은 사로야. 죽음이 기다리고 있어. 지금 이 섬에는 사로 아닌 곳이 없지만, 이 길은 정말 아니야.”

“그러면? 호호! 방법을 찾은 것 같네?”

홀리가 물었다.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 여기로 곧바로 뚫고 나가는 것.”

등여산이 땅에 그린 그림을 가리켰다. 북동 방향에서 남서쪽으로 사선이 길게 그어져 있다.

등여산은 사선 삼분지 이 지점을 꼭 짚었다.

“여기가 이호독진의 중심이야. 여기서 독이 뿜어져 나와. 여기를 가봐야 이호독진을 풀어낼 방법이 생겨. 이곳을 보지 않고는 풀어낼 수가 없어.”

호발귀가 사선을 보며 물었다.

“파해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이호독진은 낮과 밤이 달라. 낮에는 순한 양, 밤에는 맹수. 그러니 날이 밝으면 독도 사라지고, 사람도 나타나겠지?”

반가운 사람은 아니다. 귀문 문도다.

“그럼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면 되겠네.”

홀리가 말했다.

“아니, 순한 양이긴 하지만 여전히 독진은 독진이야. 저들이 독을 사용할 생각이면 낮에도 사용할 수 있어. 더욱이 우릴 발견했다면 우리를 향해서 집중적으로 퍼트리겠지?”

등여산은 옛날 모습을 보여주었다. 밝고, 명랑하며 활기차서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다.

그녀는 새침하지 않다. 새초롬하지 않다. 얌전을 떨지도 않는다. 오히려 털털하고 잘 치우지 않는 편이다. 오죽하면 주치균이 방 좀 치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까.

등여산은 외모보다는 내면을 중시한다. 굳이 내면을 중시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럼 일단 가야 한다는 거네?”

호발귀가 사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최소한 여기 독진 중심까지는 가야 해. 하지만 이 정도에서부터 문제가 생길 거야. 아마도 독진에 침입자가 생겼다는 것을 당장 알게 될걸?”

등여산이 사선 삼분지 일 지점을 짚었다.

“여기서부터 아마도 독진이 발동될 건데, 어떤 위험이 있는지는 몰라. 좌우지간 침투한 사실이 노출되기는 할 거야. 자, 그럼 힘내서 가봐!”

착!

등여산이 호발귀 등을 찰싹 때렸다.

“가 봐? 나 혼자 가는 거야?”

“그럼? 누가 같이 가?”

등여산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여기에서 독에 능한 사람은 두 사람밖에 더 있어? 하지만 언니는 내력이 약해서 오래 못 버텨. 그러니 혼자 가야지. 왜? 엄한 사람 끌고 가서 고생시키게?”

“이것들이 너나 나나 모두 언니래. 왜 내가 책사 언니야?”

당홍이 발끈해서 말했다.

“그럼 언니도 같이 들어갈 거예요? 들어가면 꽤 고생할 텐데. 고생은 사내가 하라고 해요. 우린 아침이나 지어 먹고 있죠, 뭐. 어차피 침투는 노출될 거니까.”

등여산이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독섬칠공은 독기를 흡수할 수 있어.”

당홍이 말했다.

호발귀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한정 흡수했다가는 몸이 견뎌나질 못해. 본격적으로 독섬칠공을 연마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처음에는 잘 흡수하다가도 결국은 중독이 될 거야.”

“그건 몰랐습니다.”

“독섬칠공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자, 앉아.”

당홍이 호발귀를 뒤돌려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등을 바라보며 앉아서 장심을 호발귀 등에 댔다.

“운기 해. 바로 따라갈게.”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일으켰다.

파아아앗!

밝고, 강하고, 사납고, 폭력적인 진기가 원정을 휘감았다.

파앙!

역천금령공 속에서 이령귀화가 튀어나왔다. 용암 줄기처럼 뜨거운 불기둥이 전신 경맥을 휘저었다.

츠츠츠츳!

명문혈을 통해서 당홍의 진기도 스며들었다.

그녀의 진기는 이령귀화와 섞이지 못했다. 섞이거나 유도할 만큼 강한 진기를 밀어 넣지도 않았지만, 그만한 진기를 밀어 넣는다고 해도 이령귀화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으으읏!

당홍의 진기는 살살 눈치를 보면서 이령귀화에 실려 갔다.

파앗!

진기가 백회혈에 이르자, 갑자기 당홍의 진기가 방향을 틀어서 코끝 소료혈(素髎穴)을 흘러내렸다.

소료혈은 호발귀가 지나치는 경맥이 아니다. 호발귀는 신정혈(神庭穴)에서 인중 수구혈(水溝穴)로 뚝 떨어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홍의 진기를 쫓아서 소료혈을 지켰다.

팟! 파파팟! 파파팟!

당홍은 소료혈에 머물며 촘촘하고 견고한 그물막을 만들었다.

‘음!’

호발귀는 당홍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령귀화는 세심한 진기가 아니다. 거칠게 밀고 나간다. 가로막는 것을 뚫어버린다.

당홍의 진기를 쫓아가려면 독공(毒功)을 꺼내야 한다.

수련한 적이 없는 독섬칠공을 본신 진기처럼 활용해야만 당홍을 쫓아간다.

진기를 일으키라고 해서 습관적으로 혈마 무공을 펼쳤는데, 지금 필요한 진기는 독섬칠공이었다. 독섬칠공은 이령귀화를 띄우면 저절로 따라 올라와서 특별히 독섬칠공만 끌어올린 적이 없는데, 이것이 문젯거리가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같이 움직이더라도 소료혈에서는 진기가 분리되어야 한다.

물론 당홍은 이런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호발귀의 진기 속에 독섬칠공이 녹아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호발귀가 독섬칠공 대신에 다른 진기를 끌어올렸다고 생각했다. 이미 운기는 시작했고, 독망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도 않기 때문에 그대로 시연해 보였다.

츠으으읏!

얇고 가는 그물막을 만든 당홍이 슬그머니 손을 떼고 물러섰다.

순간, 그녀가 만들었던 그물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를 따라서 떠나버렸다.

“외웠지?”

“네.”

“독망(毒網)이라고 해. 한 번 해봐.”

“독망이라고 하면……?”

“독기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걸러내는 데 쓰여. 독기가 몸으로 들어오기 전에 소료혈에서 걸러내는 거야. 하지만 완전히 걸러내지는 못하고 상당 부분 흡입될 텐데, 그 정도는 독섬칠공이 흡수해도 무방해. 여독이니까.”

“아!”

호발귀는 비로소 독섬칠공의 용법 중 하나를 온전히 배웠다.

광독풍파가 독섬칠공을 물려주고 싶어서 물려준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도둑질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당홍이 말했다.

“독망은 내 능력에 맞는 독만 통과시켜. 흡수해도 해가 될 독기는 걸러내. 이게 원래 독망의 효능인데, 연성할수록 영성(靈性)이 높아져서 효과도 뚜렷해. 그러니 시간 나는 대로 수련해.”

“뛰어난 절공입니다.”

호발귀가 감탄했다.

당홍이 뿌듯하다는 듯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어때? 혈마 무공보다 뛰어나지? 결코, 혈마 무공에 뒤지는 공부가 아니라니까.”

츠으읏! 파앗!

호발귀는 독망을 일으켰다.

독섬칠공의 진기를 섬세하게 분리하지는 못하지만 독망을 만들 정도는 만들어냈다.

독망을 유지한 채 숲으로 들어섰다.

“일 생기면 바로 튀어나와!”

도천패가 크게 소리쳤지만, 호발귀는 호흡이 흩어질까 봐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살갗이 따끔거렸다.

단지 숲을 걷기만 하는데도 누가 꼬집는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독이 강하게 밀려드는 것도 감지되었다. 다만 독망에 가로막혀서 체내로 스며들지 못했다. 일부 독기가 스며들기는 했지만, 곧바로 독섬칠공이 낚아채서 먹어버렸다.

호발귀는 숲에 들어선 후에야 등여산이 당홍을 보고 진기가 약하다고 했는지 이해했다.

사실 당홍은 진기가 매우 강하다.

진기만 놓고 본다면 홀리보다는 약할 것이고, 등여산보다는 강하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그런 진기로도 이호독진의 독기는 감당하지 못한다.

역천금령공은 대단히 강맹하다. 강맹할 수밖에 없다. 생기는 대자연의 기운이다. 자연이 일으키는 기운을 고스란히 빌어서 사용하는데 강맹하지 않을 수 없다.

독망은 독섬칠공이 만들었지만, 힘을 받쳐주는 것은 역천금령공의 생기다.

그만한 진기로도 간신히 버티고 있다.

당홍 같았으면 벌써 독망이 녹아내렸다.

등여산은 이호독진을 잘 모르지만, 얼마나 위험한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독진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이 호발귀뿐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등여산은 어쩔 수 없이 호발귀 혼자 들어가게 했다. 만약 여러 사람이 들어올 수 있었다면 결코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스으으읏!

독기를 걸러내면서 위도 안으로 들어섰다.

한순간 머리가 피이잉 돌았다.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독기보다 더 많은 독을 흡입했다.

이럴 때는 독섬칠공의 또 다른 기능을 활용한다.

내쉬는 숨에 여독을 실어서 토해냈다. 그러면 피독단을 복용한 것보다 더 빨리, 더 쉽게 해독된다.

사귀문은 독섬칠공이 없었다면 뚫지 못 할 뻔했다.

츠으읏!

호발귀는 걸음을 옮기는 한편, 생기도 찾았다. 자신만의 추적법을 운용했다.

생기는 읽히지 않는다

위도 전체를 휘감고 있는 독은 운무(雲霧)에서 묻어나온다. 한마디로 독무인 셈이다.

호발귀는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등여산이 반드시 발각될 것이라는 삼분지 일 지점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호발귀를 괴롭힌 적은 독밖에 없었다.

츠으읏!

다시 주변을 살폈다.

위도는 사람은커녕 짐승도 살지 않는 죽음의 땅이다. 아무도 없다. 독무가 이토록 짙은데 숨어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있나.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역천금령공을 피함과 동시에 독무까지 이겨낸 천고의 고수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발각된다는 거지?’

호발귀는 주위를 충분히 경계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때, 얼굴에 무엇인가 물컹거리는 것이 닿았다.

“웃!”

호발귀는 깜짝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도 없다. 텅 빈 허공이다. 그런데 물렁물렁한 것을 만진 것처럼 출렁거린다.

스읏!

손을 내밀어 허공을 더듬어봤다. 그러자 조금 전의 감촉이 다시 느껴진다. 물컹거리는 것이 손에 잡혔다.

“이거 뭐지?”

호발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야 물컹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실제로 만져지는 것은 없다. 물체는 없다. 물렁거린다는 느낌만 일어난다. 독기가 밀밀하게 밀집되면, 마치 물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니 허공을 누르면 물렁거리는 것이다.

“그렇군. 난 이미 이걸 만졌어. 이걸 만지면 다른 곳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귀문이 알아채는 거였네.”

스읏!

호발귀는 독기가 밀집된 곳을 뚫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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