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三章 위도(蝟島) (1)
호발귀와 등여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쌍룡폭으로 걸어왔다.
“어? 저, 저……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해자수가 깜짝 놀라서 홀리를 쳐다보다가 호발귀를 쳐다봤고, 또 등여산을 봤다.
세 사람의 표정을 살피느라 눈을 한군데 두지 못했다.
도천패와 당홍도 당황했다.
두 사람도 해자수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때 같으면 반색을 하면서 반길 사람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호발귀와 홀리가 품앗이를 맺었다. 홀리의 조건이 부부이니, 이미 부부인 것이다.
호발귀는 등여산과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다.
홀리도 호발귀에게 등여산이라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
호발귀가 아니라도 부인했지만 이미 연적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여자와 함께 왔다.
“난 몰라. 한바탕 뒤집힐 것 같은데?”
당홍이 도천패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천패도 홀리와 등여산을 번갈아 쳐다보는 중이었다. 천살단 책사가 왔는데도 한달음에 달려가서 반겨주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호발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홀리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책사가 우리를 도와주러 왔……”
홀리는 호발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일어섰다. 그리고 호발귀를 쏘아보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한마디라도 더 하면, 당신 지금 혈마 된 것으로 간주해서 콱 죽여버릴 거야.”
홀리는 호발귀를 침묵시킨 후, 등여산에게 걸어갔다.
“우릴 도와주러 왔다고?”
“네.”
“반말은 미안. 원래 습관이 이래.”
“여기 원래 반말이 습관인 사람이 또 있어요. 이미 경험해 봐서, 괜찮아요.”
홀리가 호발귀를 흘겨봤다.
“경험해 봤으면 알겠네. 너도 말 놔. 그런데 우리, 참 껄끄러운 관계다. 넌 천살단, 난 혈마 수족 음문촌. 넌 이 사람 마음속에 있는 연인, 난 품앗이 부인.”
“품앗이 부인요?”
“이 사람이 말 안 했어?”
“혼인했다고는 들었는데……”
“혼인은 쥐뿔. 억지로 내 옆자리에 끌어앉혔는데, 네가 딱 나타난 거야. 완전히 유혹해서 내 남자를 만든 다음에 나타났으면 좋았을 텐데.”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은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네요. 강하 혈천방으로 가는 길에……”
“뭐 이런 덜떨어진 남녀가 다 있지?”
홀리가 등여산 말을 끊었다.
“난 그래도 솔직하게 감정 표현을 하고 있어. 두 사람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품앗이는 아직 유효. 난 계속 이 사람 유혹할 거니까 잘 버티기를 바라야 할 거야. 그리고 책사 너, 너도 그렇게 하면 이 사람 놓쳐. 나한테 뺏기고 가슴 저리지 마. 자!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배고프지? 당장 먹을 건 과일밖에 없어.”
홀리가 등여산의 손을 이끌고 그녀가 누워있던 곳으로 갔다.
“재 보통 아니네. 완전 여우야. 이거 재미있어지는데?”
당홍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도천패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하! 이제 어떡하냐? 혈천방, 천살단만 해도 골치 아픈데, 안에서까지 눈치 봐야 하는 거야? 문주, 저거 불쌍해서 어떡하지? 이리저리 치이게 생겼어.”
“제 발등 제가 찍은 거지 뭐. 아무리 도와주겠다고 해도 그렇지, 홀리가 있는데 어떻게 책사까지 데려와? 품앗이하지 말던가. 이건 아니지.”
“좋게 생각해. 책사가 도와주면 좋지 뭐. 당장 천살단 공격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래서 이 상황이 좋다고?”
순간, 도천패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움찔거렸다.
당홍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홀리도 보통이 아니지만, 나도 보통은 넘거든? 만약, 내게 이런 상황이 닥치면 난 무조건 당신부터 굳힐 거야.”
“굳혀? 뭘 굳혀?”
“몸뚱이. 딱딱하게. 마혈에 짚인 것과 똑같은데, 다른 점이 있다면 신경이 모두 녹아버렸다는 거? 그래서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거? 신경이 물처럼 녹아버렸으니 해약이나 진기도 필요 없지, 아마?”
“헉!”
도천패가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내 앞에 다른 여자 세우지 마. 난 홀리처럼 여우짓 안 해. 당장 움직이지.”
“누, 누가 여자를 만난다고 그런 삭막한 말을……”
“나 추워. 안아줘.”
당홍이 도천패의 가슴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도천패는 얼떨결에 당홍을 안았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도와주러 왔으면 일해야지? 이리 와봐.”
홀리가 등여산을 불렀다.
모두 두 귀를 쫑긋 기울였다.
등여산이 온 후로 홀리가 무슨 말만 하면 긴장감이 감돈다.
환산만에 있을 때도 두 여인은 마주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품앗이하지 않았던 때라서 오히려 등여산 쪽이 호발귀와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홀리가 말했듯이 자신은 분명히 ‘품앗이 부인’이고 등여산은 ‘전 여자’로 단정 지었다.
등여산의 입장이 어정쩡하게 되었다.
사실, 호발귀와 등여산은 양심에 가책될 게 전혀 없다. 그래서 호발귀도 편한 마음으로 등여산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홀리가 마치 사랑했던 남녀 사이처럼 생각하면서 말하는데도 두 사람은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왜 반박하지 못하는지 이유는 모른다.
왠지 홀리가 따갑게 쳐다보면 눈을 피하게 된다.
홀리는 등여산을 앞에 앉히고 그림을 그렸다. 반듯하지 않은 부정형의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작은 원을 그렸다.
“이게 삼호야. 이게 위도.”
홀리가 말했다.
그러자 등여산이 바짝 다가앉으며 그림을 봤다.
“삼호 바깥쪽은 나무가 빼곡해. 배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 외에는 없고, 가장 가까운 거리는 여기.”
홀리가 삼호 좌측 편을 찍었다.
“여기까진 아는데, 다른 건 전혀 몰라. 경계가 어떻게 되고, 어떤 준비가 갖춰져 있고. 분명한 건 위도에 들어간 사람은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했어.”
홀리가 등여산을 쳐다봤다.
등여산은 홀리가 삼호를 그린 후부터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홀리가 쳐다봐도 그녀조차 보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아니요. 없어요.”
“아니요? 없어요? 야! 너 왜 이렇게 얌전한 척해! 우리 나이도 비슷한데 말 놓으라니까! 정 족보 까서 선후를 가려야겠어? 지금 당장 족보 까?”
“아니. 그냥 말 놓을래.”
등여산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게 낫지? 내가 성질이 좀 못돼서 얌전한 척하는 예들을 보면 배알부터 꼴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처지에, 침상도 없이 길에서 자면서. 안 그래?”
“호호! 그래.”
등여산은 홀리에게서 악의를 읽지 못했다.
음문촌 사람들은 매우 사납고, 잔인하다는 말은 들었다. 홀리가 사납다. 성격이 거칠고 난폭하다. 하지만 말이나 행동 속에 가식이나 악의는 담겨 있지 않다.
입으로 하는 말이 전부인 여자다.
홀리가 다시 그림을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를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네. 너 머리 좋다며? 네가 방법 좀 찾아봐.”
“더 참고로 해줄 말은 없어?”
“이런 것도 도움이 되려나? 이미 다 말한 건데, 여기는 귀문 사소야. 사두는 삼수창 풍공공. 이제는 정말 없어.”
홀리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호발귀는 운공을 하지 못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심무실공을 일으키고, 다시 역천금령공으로 넘어가서……
운공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자꾸 중간에 사념이 끼어든다.
‘방법을 찾을 수 없을 텐데.’
눈이 떠지고, 눈길이 등여산에게 간다. 그러다가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는 급히 눈을 감는다.
등여산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도와주려고 왔으니 방법을 찾아주는 것은 당연하다. 또 등여산은 일행 중 가장 병법에 밝으니 믿을 수 있다.
그런데도 자꾸 눈길이 간다.
‘이러면 안 돼.’
호발귀는 눈을 질끔 감았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등여산을 생각하는 마음이 보통 이상이다. 아주 깊은 편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홀리에게 매인 몸이 되었다.
그 점이 억울하지는 않다. 자신은 언제든 혈마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옆에서 죽여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살인귀가 되어 중원을 떠도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홀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녀가 필요하다면서 마음은 등여산을 쳐다본다는 것은 사내가 할 짓이 아니다. 홀리에 대한 배신이다. 품앗이 남편일망정 남편 의무를 다해야 한다.
사박! 사박!
홀리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운공 안 하지?”
“……”
“호호! 안 하는 거 알아. 책사가 오니 품앗이한 게 후회돼? 나와는 말도 섞기 싫은가 봐?”
“아니. 미안하다.”
“뭐가 미안?”
“그냥 미안해지네. 내가 너무 못난 것 같다. 그냥 미안하다.”
“재미있어. 미안한 이유는 말하지 못해?”
“네 말대로 책사를 좋아하는 것 같아. 자꾸 마음이 가. 며칠만 여유 주면 내가 알아서 정리하지. 사실, 여자를 쳐다볼 만큼 한가하지도 않잖아.”
“호호호! 바보네. 그런 말은 절대로 하는 게 아니야. 어떻게 아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해?”
“……”
“호호호! 정말 바보다. 또 말문 막힌 거야?”
“……”
“마음 정리하지 마. 그런 말은 날 무척 비참하게 만들어. 난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 네가 뭐 죽고 못 살 정도로 잘난 것도 아니고. 내가 말했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평생 같이 자지 않겠다고.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책사가 좋으면 가.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말은 아냐. 아무래도 지금은 책사가 유리한 것 같은데, 나도 최선을 다할 거니까. 나중에는 내게 올 수도 있잖아?”
“홀리.”
“그래. 그렇게 밀쳐내지만 마. 고마운 줄 알아. 지금 양손에 떡을 쥔 거야. 참! 아까 고마웠어.”
“……?”
호발귀가 홀리를 쳐다봤다.
“책사를 만났을 때, 혼인한 거 숨기지 않았잖아. 당당하게 말했고. 음문촌 사람들은 숨어서 듣는 재주가 있거든. 그 말 듣고 가슴 벅찼지 뭐야? 진짜 혼인한 느낌이 들더라고. 고마워.”
홀리가 손을 들어서 호발귀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그리고 일어나서 걸어갔다.
등여산은 그림에 푹 파묻혀서 호발귀와 홀리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서 아주 똑똑히 들었다.
“이거 정말이야, 가식이야?”
당홍이 눈을 끔뻑이면서 말했다.
“우리 아씨, 원래 성격이 저래요. 화끈하죠. 가짜, 절대 아닙니다. 믿어도 좋다니까요.”
“와! 괜찮은데? 야만스럽게만 봤는데, 아주 매력 있어.”
도천패가 말했다.
“뭐라고?”
당홍이 도천패를 노려봤다.
“아니, 문주놈 짝으로 말이야. 누가 내 눈에 매력 있대? 내 눈에는 한 여자밖에 없어.”
“흥!”
당홍이 웃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아씨가 원래 이렇게 툭툭 터는 성격인데, 이 성격이 형제간에는 별로 안 먹히더라고. 마음에 안 드는 건 그냥 막 쏴대거든. 그러니 순전 적만 생기지.”
“그런데 왜 아씨라고 불러? 사연이 뭐야?”
“사연은 무슨…… 내가 음문촌에 다니면서 촌장 자식놈들 다 겪어봤는데, 그래도 날 인간 대접해 준 사람은 아씨밖에 없더라고. 처음에는 귀여워서 놀리는 말로 아씨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그냥 입에 베여버렸네?”
해자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등여산은 삼호에서 답을 찾았다.
호수 주변은 울창한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너무 울창해서 밀림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중원 한복판에 이만한 호수가 있으면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을 리 없다. 어부도 생기고, 유람객도 오간다. 당연히 호숫가에는 객잔도 지어진다.
삼호 주변은 나무뿐이다.
귀문 무인이 삼호 경계에까지 나왔다. 싸움은 위도가 아니라 삼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삼호를 구경하러 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한 가지…… 귀문 무인들이 경계를 서기에는 삼호가 너무 넓다.
무인들이 삼호 경계에까지 나온 것은 확실하지만, 어떤 식으로 경계를 서는지 파악되지 않는다.
“음!”
등여산은 밤이 깊은 것도 잊고, 계속 그림만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