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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110화 (110/500)

第二十二章 살기충천(殺氣衝天) (5)

“책사님!”

사내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등여산도 사내를 한눈에 알아봤다. 길에서 서신을 건네준 바로 그 사내다.

“아! 또 뵙네요?”

“저기 산 보이죠? 저기로 가면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작은 폭포가 나와요. 이름은 거창하게 쌍룡폭(雙龍瀑)이라고 하는데, 이무기 폭포도 안 됩니다.”

“네.”

“호발귀가 거기 있어요. 며칠 쉬어갈 요량인지, 아예 잠잘 터까지 다듬더라고요.”

사내가 친절하게 말했다.

“비보전 소속이세요?”

등여산이 물었다.

“인사가 늦었나요? 삼비자(三秘刺)입니다.”

사내가 새삼 포권을 취해 보였다.

“아! 네.”

등여산은 다시 경탄했다.

십육비자 중에서도 일이삼 세 명의 비자는 가장 은밀한 비자에 속한다. 십육비자는 우열을 논하지 않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삼비자와 십삼비자로 나눌 수 있다.

십육비자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비자 세 명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이 사내다.

“삼비자이시면 비보전 소속이 아니죠? 단주님 직속인가요?”

“소속이야 비보전이죠. 단주님이 명령을 내리시면 전주님이 전해주시니까.”

사내가 씩 웃었다.

“그럼 우리 앞으로도 자주 뵙겠네요?”

“별다른 일이 없다면 제가 계속 연락을 맡을 겁니다. 최대한 빨리, 충실히, 은밀히. 그럼!”

삼비자가 두 손 모아 포권한 후, 신형을 쏘아내 사라져갔다.

‘삼비자.’

등여산은 방금 사라진 사내를 생각했다.

단주가 자신에게 삼비자를 붙인 것만 봐도 호발귀를 얼마나 중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그럼 이제 살단은 절대로 움직이지 못해.’

등여산은 한시름을 덜었다.

살단이 움직이면 단주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전임 충주 오택골은 무공이라도 강해서 거칠게 행동했지만, 주치균은 오택골에 비해도 한참 뒤진다.

주치균이 약한 게 아니다. 오택골이 워낙 강했다. 오택골을 죽인 귀검은 더 강한 것이고.

사박! 사박!

등여산은 호발귀가 있다는 쌍룡폭을 향해 걸었다.

모두 호발귀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뭘 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준비하면 호발귀 앞에 갖다 놓을 뿐, 같이 모여서 먹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기로 했다.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쌍룡폭을 벗어나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춤추고 싶으면 덩실덩실 춤을 추면 된다.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정말로 잠만 자도 된다. 누가 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호발귀는 기회다 싶었는지 깊은 생각에 몰입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아니면 운공 삼매에 몰입했다.

‘등여산? 풋!’

호발귀는 피식 웃었다.

등여산이 쌍룡폭에 나타날 리 없다.

이곳은 인근 마을 사람밖에 모르는 작은 개울이다. 쌍룡폭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졌지만, 폭포 높이가 겨우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다. 그러니 폭포도 아니다.

등여산이 자신을 찾아올 리도 없지만, 이런 곳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오겠나. 그녀는 천살단에 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녀를 생각하지?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인데.’

호발귀는 다시 운공에 집중했다.

츠으으읏!

역천금령공으로 원정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자 생기가 푸른 빛을 확 토해냈다.

주변의 기운이 읽힌다.

두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생기가 감지된다. 해자수다. 그늘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다. 다섯 걸음쯤에 또 생기가 있다. 홀리다. 산에서 따온 과일을 물에 씻고 있다.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생기가 또 있다. 두 개가 하나인 듯 바싹 붙어 있다. 언제나 떨어지지 않고 함께 붙어 있는 생기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또 하나!

호발귀는 분명히 또 하나의 생기를 읽었다.

확실하다! 방금 읽은 생기는 짐승이 흘리는 생기가 아니다. 원정에서 흘러나온 강한 빛, 그리고 몸 전체를 감싸는 푸른 기운…… 사람이 분명하다!

푸른 빛은 생기이고, 하얀색에 분홍 반점이 섞여 있는 태산강기(泰山剛氣)다. 태산파의 절공을 수련한 사람만 표출하는 독특한 표식이다.

‘등여산!’

등여산이 근처에 있다.

호발귀는 운공을 풀고 일어섰다.

“어디가?”

홀리가 물었다.

“산책.”

“같이 갈까?”

“아니.”

“그래. 그럼 갔다 와.”

홀리는 과일 씻는데 온 정신을 쏟는 듯 무심히 말했다.

호발귀는 소로를 따라서 천천히 산에서 내려갔다.

생기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고 있다. 운공을 풀면 생기를 쫓을 수 없지만, 위치는 기억한다.

맞다. 정말로 등여산이다. 산을 얼마 내려가지 않아서 등여산을 찾았다.

등여산은 햇볕 잘 드는 바위에 앉아서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등여산!’

호발귀는 반가움에 버럭 이름을 부르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이름을 부르면서 반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서로 가는 길도 다르다. 등여산은 천살단에 있고, 자신은 어제만 해도 잡랑을 죽인 살인귀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여자다.

호발귀는 등여산을 향해 걸어갔다.

등여산도 호발귀를 봤다. 일어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눈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호발귀를 계속 쳐다봤다. 호발귀가 바로 앞에 설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여기는 어떻게?”

“건강해 보이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첫 한 마디를 꺼내고 나니 헤어진 적이 없던 사이처럼 편안해졌다.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풋! 후후! 잘못 봤어. 그렇게 건강하지 않아. 아무래도 여기 문제가 생긴 것 같아.”

호발귀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댔다.

등여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가 혈마가 된다, 아니면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이미 등여산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부분에 집착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그저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기만 했다.

“앉을래?”

그녀가 옆자리를 톡톡 쳤다.

호발귀가 바위 위로 올라와 앉았다.

등여산이 호발귀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쉬고 있어. 한 삼 일정도 쉬어갈 생각이야. 아무래도 내 상태가 심상치 않으니까 시간을 벌어주는 거 같아. 나도 생각할 게 있어서 쉬는 중이야.”

“살심도 좀 가라앉히고? 전에 혈마에서 벗어났다고 했잖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데?”

“후후! 혹시 살수를 쓰면서 쾌감을 느껴본 적이 있어.”

“아니.”

“그런 게 느껴지더라고. 아주 강한 쾌감. 술주정뱅이가 술을 마실 때의 쾌감이랄까? 일종의 안도감 같기도 하고, 익숙한 일을 이제야 찾았구나 하는 느낌 같기도 하고.”

“그렇구나.”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네?”

“조금은 이해하니까.”

등여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호발귀의 상태는 누구도 단언해서 말할 수 없다.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일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다. 옛날에 딱 한 사람, 혈마만 겪어봤다.

혈마!

혈마는 단지 살심이 일어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세상에 지독한 살인자가 무척 많지만, 그들에게 혈마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혈마는 보통 미치광이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지독하고, 제일 악독하고, 제일 난폭한 자다.

과거 혈마가 행한 일은 지옥에서 튀어나온 귀신조차도 혀를 내두를 만큼 잔인했다. 대륙 절반이 피로 물들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멀쩡했던 사람이 천하제일의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해 본 사람이 누가 있나.

지금 호발귀의 모습만 보면 ‘걱정하지 마’, ‘괜찮아 보여’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또 ‘무슨 길이 있을 거야. 같이 찾아보자’ 이런 말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말도 들어맞지 않는다. 그저 호발귀가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최대한 욕심을 부려본다면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 좋고.

등여산이 말했다.

“잡랑이 공격한 건 미안. 단주님 뜻이 아냐.”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지.”

호발귀가 별것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서 쉬었다가 어디로 갈 건데?”

“홀리가 귀문을 말해줬어. 사소. 삼호 위도에 귀문이 있는 것 같아. 귀무살을 찾으려면 계속 혈천방을 쳐야지. 지금쯤은 혈천방도 내가 찾는 사람을 알고 있을 테니, 싸우든가 내주던가 할 거야.”

“후유! 나도 도와주려고 왔는데.”

“그래?”

“그런데 내가 가지고 온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네. 나도 삼호 위도를 말해줄 생각이었거든. 하지만 나는 거기가 사소라는 것도 몰랐고. 솔직히 귀문이 있을 거라는 추측만 했지 확신하지도 못했어. 홀리 소저가 나보다 낫네.”

등여산이 웃었다.

“날 도와주러 왔다면 어디까지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위치만 말해주지는 않았을 거고.”

“전부 다 도와주라고 하셨어.”

“천살단주가?”

“너무 마음 풀지는 마. 결국은 이용하는 거야. 이용하다가 끝내는 버리게 될 거야.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내 능력 전부를 다해서 도와주려고 했지.”

“그럼 도와줘.”

등여산이 호발귀를 쳐다봤다.

‘네가 옆에 있으면 편해. 지금 안 건데, 널 좋아하나 봐.’

호발귀는 마음속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동안 난 혼인했어. 홀리하고.”

“정말?”

등여산은 축하한다는 듯 반색했지만,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잘됐네. 홀리 소저, 정말 예쁘잖아. 무공도 강하고. 네 반려자로는 아까워. 누가 먼저 혼인하자고 했어? 아니다. 좋아한다는 말부터 해야 하잖아. 어떻게 시작했는데? 정말 잘 됐다.”

등여산이 그녀답지 않게 침착하지 못했다. 두서없이 아무 말이나 하는 느낌이었다.

음문촌은 엄연히 혈마의 수족이다.

혈마를 조정한 사람은 혈마후이고, 다른 일족들은 혈마의 명령에 따라서 충실히 오른팔 역할을 했다.

중원의 절반을 휩쓸었다.

음문촌 사람에게 죽어간 무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많은 무공을 보게 되었다. 비급도 얻었고, 절기도 수집했다.

무인은 더 강한 무공을 수련하고 싶어 한다.

중원을 정복해 나가면서 쓸만하다 생각되는 무공은 모두 수집했다.

정종 무공, 사공, 마공 등 어떤 무공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모두 살폈다.

그때 선별해서 추려놓은 무공이 고스란히 음문촌에 전해졌다.

그중 하나가 이체분령(二體分靈)이다.

천안통(天眼通)과 흡사한 공부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듯 사실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좋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진기만 움직인다. 진기를 허공에 띄우고 사방을 살핀다. 진기는 파괴력을 갖지 못한다. 다만 사방 이십 장까지 살피는 눈 역할만 한다.

적을 탐지하거나 주위를 경계할 때 매우 탁월한 공부다. 도주나 추격할 때도 매우 좋다.

혈마가 죽고 이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음문촌에 전해지는 무공이라면 그만큼 탁월한 무공이다.

홀리는 이체분령을 펼쳤다.

몸은 쌍룡폭에 붙잡아 놓고 진기만 호발귀를 따라나섰다.

호발귀는 산책한다고 나갔지만, 뭔가 어색했다. 말을 하는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요즘 들어서 호발귀의 진기가 침침해졌다. 분명히 거센 살기가 치밀고 있다. 본인 스스로 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기 때문에 더 걱정된다.

그러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런데…… 보고 말았다.

호발귀가 등여산과 만났다.

자신을 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편안히 웃음을 짓는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정함을 보였다.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손은 잡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 마음이 고스란히 읽힌다.

‘이 여자, 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네.’

홀리가 눈을 뜨면서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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