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二章 살기충천(殺氣衝天) (3)
심지 타는 냄새를 맡았는데 폭발에 휘말릴까.
잡랑이 몸을 껴안는 순간, 마영심도는 잡랑의 팔을 잘라냈다. 잡랑이 일으킨 진기는 열 손가락에 운집되었지만, 그 전에 팔꿈치 부분에서 싹둑 잘려 나갔다.
폭발이 일어났을 때 호발귀는 이미 십여 장 밖으로 튕겨 나가 있었다.
폭발은 잡랑을 죽이는 데 사용됐을 뿐이다.
휘이이잉!
한바탕 혈겁이 몰아친 땅에 찬 바람이 몰아쳤다.
화약 냄새, 피 냄새, 살이 베이면서 풀기는 비린내, 죽음이 풍기는 서늘한 기운까지 겹쳐져서 한적했던 산골짜기를 아비규환,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렇다. 이곳이 지옥이다.
호발귀는 진기를 제자리에 가라앉혔다.
혈마는 되지 않았다.
이 순간, 사려분별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분명히 정상인이다. 장진 스님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혈마는 없었나?
있었다. 잡랑들과 싸울 때, 호발귀는 혈마였다.
사람을 죽이면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악마를 제거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잡랑을 벨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일어났다.
사람을 죽이는데, 쾌감을 느낀다? 살인마, 혈마다.
이런 느낌이 더 강해지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자가 된다면, 그게 바로 혈마다.
혈마는 혼자 있을 때 강해진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말리기도 하고 싫은 말도 한다. 그래서 살기를 죽인다. 혼자 있으면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살기가 마음 놓고 일어난다.
호발귀는 잡랑을 죽이는 순간, 정신을 놓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잡랑을 죽이면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느낌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집안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죽이는 기분이었다. 파리를 때려잡는 느낌이었다.
혈마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이 싸움이 자신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서 혼자 왔는데, 혈마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차후에는 언제 어느 곳에서 싸우든 혼자 싸우면 안 된다.
옆에 반드시 누구라도 있어야 한다.
혈마가 되면 죽여줄 사람이 있지만, 기왕이면 혈마가 안 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홀리는 할 말을 잃었다.
음문촌 사람들도 잔인한 면에서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데, 이처럼 처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다.
‘혼자서 이 많은 사람을!’
철퍽! 철퍽!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핏물이 튀긴다.
죽은 자가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서 발목을 낚아챌 것 같다.
죽은 사람은 여든 명 정도인데, 현장은 사오백 명을 죽인 것처럼 참혹하다.
이것이 정말 호발귀 혼자서 만든 작품인가? 그렇다면 호발귀는 의심할 여지 없이 혈마다. 겉모습은 멀쩡해 보여도 혈마의 독심이 없고서는 이런 검을 쓰지 못한다.
홀리가 호발귀에게 다가가 말했다.
“괜찮아?”
호발귀가 고개를 들어 홀리를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풋!”
호발귀가 피식 웃었다.
“이제 정말 천살단하고는 끝이네? 천살 단주를 찌른 일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살단을 이렇게까지 박살 냈으니 앞으로 참 볼만하겠다.”
홀리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정말로 호발귀의 앞날이 걱정된다. 이제는 혈천방과 천살단, 양쪽에서 협공을 받는 처지가 되지 않았나.
“아! 이게 뭐야? 간신히 시신 한 무더기를 땅에 묻고 왔더니 여긴 아예 떼거리로 있네? 이거, 이거는 어떻게 못 해. 이걸 어떻게 다 정리하나?”
해자수가 고개부터 내둘렀다.
당황하기는 도천패와 당홍도 마찬가지다.
호발귀가 혼자 나설 때부터 ‘너희들 이제 큰일 났다. 쟤 정말 화났어.’ 하는 심정이었는데, 막상 시신들이 쫙 깔린 현장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천패가 묵묵히 시신을 모으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을 하나씩 끌어다가 한 곳에 쌓았다.
“어떻게 하려고?”
홀리가 물었다.
“어떻게든 정리해야지. 이대로 놔두면 안 되잖아. 이건 누가 봐도 사람 짓이 아냐.”
도천패가 호발귀를 보면서 톡 쏘듯 말했다.
손속이 너무 지나쳤다는 질책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글쎄 이거 정리 못 한다니까. 아예 할 생각을 말아. 이걸 어떻게 다 정리해. 여기 피가 한두 군데 묻었어? 온통 피투성이잖아. 그렇다고 땅을 뒤집어엎을 수도 없고. 이 폭발은 또 뭐야? 아이구! 여기 바위도 그슬렸네? 살점도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고. 이건 아예 여길 싹 불살라 버리는 게 낫겠어.”
해자수가 연신 고개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 말에 홀리가 툭 말했다.
“풋! 현장을 치울 수 없으면 현장에 묻히면 되지.”
“여기 묻혀요? 그게 무슨 말…… 일까나? 우리도 같이 죽자는 말은 아니실 테고.”
홀리가 스읏 일어서다니 다짜고짜 땅에 묻은 피를 찍어서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 아씨! 아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걸 뭐하러 지워? 우리가 같이 있으면 되지. 이 사람들, 호발귀 혼자 죽인 게 아니야. 우리 전부 다 같이 싸웠고, 악전고투 끝에 승리한 거야. 우리가 몇 명이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명이 여든 명과 싸운 거야. 이러면 패거리 대 패거리 싸움이니까 떼로 몰려든 살단이 나쁜 놈이 되는 거지. 한 사람이 결딴낸 것보다 훨씬 낫지 않아? 몸에 분장 좀 하면 돼.”
호발귀가 혼자서 팔십 명을 죽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사람은 상상한다. 혼자서 팔십 명을 죽이는 상상…… 호발귀가 악귀처럼 날뛰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다섯 명이 팔십 명을 죽이는 상상은 내용이 달라진다.
팔십 명이 격렬하게 몰아붙이는 그림이 그려진다. 다섯 명이 처절하게 받아치는 모습, 궁지에 몰려서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 후딱 떠오른다.
호랑이가 쥐 떼를 물어뜯는 모습과 광란한 쥐 떼가 고양이 다섯 마리에게 달려드는 모습의 차이다.
“아! 그러네. 그게 맞네.”
해자수도 얼른 땅에 묻은 피를 찍어서 몸과 얼굴에 발랐다. 격렬하게 싸운 흔적을 만들려고 옷도 일부 찢어냈다.
도천패와 당홍이 서로를 쳐다봤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호발귀 혼자 싸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싸운 것이다.
두 사람도 재빨리 피를 묻히기 시작했다.
호발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겉모습이 아닌데. 잠시나마 살인을 즐긴 마음, 혈마가 문제인데.
“풋!”
호발귀는 혼자서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 * *
“삼당이 몰살당했다고?”
주치균이 싸늘한 한광을 쏘아내며 말했다.
“네!”
“호발귀 놈이 야밤에 기습해서 모조리 죽였습니다.”
잡랑이 보고했다. 그리고 육 당주가 말한 것도 전했다.
호발귀를 건들지 마라. 이놈은 악마다. 건드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음!”
주치균은 침음했다.
그는 육 당주가 누구인지, 어떤 인간인지 안다. 그가 그런 말을 전해왔다면 틀림없이 악마가 나타난 것이다. 육당주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초고수다.
‘아냐. 고수에 겁을 먹었을 리 없어. 이건 아주 강력한 살인마, 잡히기만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맹수를 만난 거야. 내 생각이 맞았어. 호발귀 그놈! 혈마다!’
주치균이 미간을 찌푸렸다.
삼당이면 살단 총력 중 삼 할이다. 열 개 당 중 세 개를 보냈다. 물론 그들이 호발귀 한 명에게 몰살당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삼랑에게 내린 명령은 호발귀의 흉성을 드러내라는 것이었지, 싸우라는 게 아니었다. 그 정도 명령을 알아채지 못할 당주들이 아니건만 싸움에 휘말렸다.
틀림없이 호발귀가 기습해왔을 것이다.
이건 복수도 하지 못한다.
이미 단주로부터 호발귀를 내버려 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기서 살단을 움직이는 것은 항명이 된다.
“후후후!”
주치균은 싸늘하게 웃었다.
이제야 전임 살단 총주가 왜 천살단주의 명령을 독자적인 행동을 했는지 이해된다. 천살단주는 밖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명령을 내린다.
지금은 공격할 땐데 놔두라니.
‘놔두라면 놔둬야지. 아직은 힘이 없으니.’
“놈이 삼당을 몰살한 장소가 어디냐?”
주치균이 물었다.
한 놈이 여든 명이나 죽였다면 살인 현장은 매우 처참할 것이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게 뻔하다. 아마도 전장이나 다름없을 터이다.
“우로 십삼 리 길 중간 부근입니다. 우물이 있어서 모두가 쉬어가는 황고개라는 곳입니다.”
“소문을 내라. 천살단 잡랑이 황고개에서 자고 있는데 혈마가 기습해서 모조리 죽였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잡랑이 혈마 따위에게 당할 리 없지만, 우물에 독을 풀어서 모두 사지가 마비된 상태였다. 통한의 눈물을 쏟으며 죽어갔다. 이런 내용으로 소문을 내.”
“네? 넷!”
이번 명령은 부대주에게 내린 것이다.
주치균은 잡랑의 위상도 높이고, 혈마의 잔인성도 부각할 생각이다.
“움직여!”
부대주가 잡랑들을 다그쳤다.
* * *
등여산은 야트막한 언덕에서 천막이 즐비하게 늘어선 들판을 내려다봤다.
살단이 머무는 천막이다.
살단은 야지에서 숙영할 때가 매우 많다. 천살단 밖으로 나오면 거의 숙영을 한다. 그래서 수레에 천막, 일용품 등등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 따로 있다.
호발귀를 찾아가는 길에 주치균을 만날 생각이었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주치균이 호발귀를 공격한 사실은 알고 있다.
단주가 활동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벌써 명령을 내린 후라고 들었다. 아니다. 그 정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 말을 흘리나.
오늘 저녁, 잡랑 한 명이 총총히 달려와 천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잡랑은 단체 생활을 한다. 움직일 때는 다 같이 움직인다. 첨병 같은 것도 운용하지 않는다. 정보는 천살단을 통해서 전해 듣고, 잡랑은 오로지 싸움만 한다.
외부에서 달려온 잡랑은 공격 나갔던 잡랑이다.
다 같이 돌아오지 않고 혼자만 돌아왔다. 그것도 꽁지에 불붙은 멧돼지처럼 서둘러 달려왔다.
삼당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주치균은 아직도 호발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호발귀가 살단 총주와 싸워서 창을 찔러넣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호발귀의 무공이 그만큼 강한 것이다. 그런데도 삼당을 보냈으니 죽음을 자초했다.
호발귀는 참회동에서 주치균을 격파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무공,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주치균은 벌써 잊었나? 결코,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었는데. 온전한 실력으로 검벽주를 눌러 앉힌 것인데.
호발귀를 공격하면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
살단 총주가 수련한다는 반야호신공을 수련했어도 마찬가지다.
심공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패배는 막지 못한다.
“휴우!”
등여산은 한숨을 토해냈다.
잡랑이 달려온 것을 보면 사단은 이미 벌어졌다.
그녀는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잡랑이 달려온 방향을 향해서 걷는다. 호발귀가 어디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날이 밝으면 그가 있는 곳을 알려줄 사람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 혈마가 ‘어디’에서 잡랑을 죽였대.
- 사람 새끼도 아냐. 어떻게 독을 써서 사람을 죽여? 시신들이 ‘어디’에 쫙 깔렸다며?
- ‘이렇게’ 생긴 놈을 보면 멀리 피해. 괜히 가만히 있다가 ‘어디’서 죽은 잡랑 꼴 나.
사람들이 호발귀에 대해서 떠들 것이다.
‘이렇게’ 생긴 혈마가 등장할 것이고, ‘어디’라는 구체적인 장소가 말해질 것이다.
‘어디’는 혈마 재림 장소가 된다.
혈마를 무림에 등장시킨 사람은 주치균이다. 그는 호발귀를 혈마로 만든 것이 아니다. 이백 년 전 혈마를 ‘어디’로 소환해서 무림에 재등장시킨 것이다.
이제 무림은 확 달라진다.
혈마가 나타난 시점, 어제를 기점으로 어제까지의 무림과 오늘부터의 무림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부터는 혈천방과 천살단의 무림이 아니다.
사박! 사박!
그녀는 풀잎을 밟고 걸었다.
호발귀에게 가는 걸음이 이토록 무거웠던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