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一章 촉동(觸動) (5)
아직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
묶인 사람이 또 있다. 방금 죽은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른쪽에 한 사람 더 묶여 있다.
이제는 움직이기도 겁난다.
사내를 향해 다가서면 또 어떤 함정이 불쑥 튀어나와서 묶인 사람을 죽일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경험상 묶인 자를 구하지 않고 가는 게 최선이다.
어떻게든 구하겠다고 움직이면 함정이 발동된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네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듯이 놀려댄다. 아니, 그런 짓을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인다.
“그냥 가지.”
호발귀가 묶인 사람을 내버려 두고 길을 재촉했다.
길을 더듬어가면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길이 아닌 곳으로 걸어갔다.
왼쪽에 있는 사람이 이미 죽었다.
그러니 왼쪽으로 더듬어간다. 오른쪽에 묶여 있는 사람이 안전하기만 바라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아! 조마조마해.”
당홍이 묶인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도 예상치 못한 일이 툭툭 터져서 오른쪽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왼쪽으로 걸어가지만, 눈은 묶인 사람을 연신 쳐다보게 된다.
한 걸음, 두 걸음, 이 장, 삼 장, 십 장.
묶인 사람에게서 무려 이십여 장이나 뚝 떨어졌다. 묶여 있는 모습이 엄지손톱만큼 작게 보였다.
“휴우! 다행히 아무 일 없네. 앞으로는 이런 일 있으면 모른 척하고 가야겠어.”
도천패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슷!
왼쪽 선봉 위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웃!”
그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해자수다. 해자수가 손을 들어서 왼쪽 산봉을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 저…… 저 뭐 하는 거지?”
모두 해자수가 가리킨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산봉에 나타난 자는 무척 작게 보였다. 너무 작아서 작은 양이나 염소만 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스읏!
그가 활을 꺼내더니 화살을 걸었다.
“저, 저놈 저거! 이거 완전히 미친놈들 아냐!”
패애애앵!
도천패는 고함을 지르자마자 신형을 쏘아냈다.
어떻게든 묶인 사람에게 달려가서 화살을 막아줄 심산이었다. 도중에 함정을 건드려도 어쩔 수 없고.
스읏! 패애애앵!
산봉에 있는 자가 거침없이 화살을 날렸다.
산봉과 묶인 사람 간의 거리는 오십여 장에 이른다. 상당히 먼 거리다. 한데도 화살을 쏘았고, 허공을 찢은 화살은 정확하게 묶인 자의 목을 꿰뚫었다.
상당한 명궁(名弓)이다.
도천패는 미처 다가가지 못했다. 신법으로 다가서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졌다.
무려 이십여 장 거리다. 한달음에 달려갈 수가 없다.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날아가 달려가서 구할 수 없는 거리다. 저들은 호발귀가 충분히 멀었을 때까지 기다렸다.
“야! 내려와!”
도천패가 산봉에 있는 자를 향해 고함쳤다.
그가 다시 화살을 활에 재우더니 도천패를 겨냥했다. 그리고 대뜸 쏘았다.
쒜에에엑! 패애애앵!
화살은 도천패를 와락 덮쳤다. 하지만 도천패를 꿰뚫지는 못했다.
도천패가 이미 대도를 꺼내 들었고, 날아오는 화살을 중간에서 뎅겅 잘라냈다.
“내려와! 새끼야!”
도천패가 고함을 질렀지만, 그는 산봉 너머로 사라졌다.
“아미타불!”
호발귀는 느닷없는 불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사람을 파리 죽이듯이 죽이다니. 휴우! 이 지독한 업보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호발귀는 장진 스님을 쳐다봤다.
이제 앞으로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혈마 무공의 원령이 나타났다.
마음에서 혈기가 들끓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혈기가 잠들어 있던 장진 스님을 깨워서 밖으로 내보냈다.
“역천금령이 생기를 감싸고 있어서 편안히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뭐가 불편했나 보네.”
“내가 반갑지 않아? 오랜만에 봤는데.”
“아미타불. 부처님은 잘 계시고?”
“아미타불! 부처님을 희롱하면 벌 받아. 이게 다 업보라니까. 입으로 짓는 업보를 구업(口業)이라고 하는데, 삼업(三業) 중 하나야. 그만큼 중하다는 거지.”
“오늘은 무슨 조언을 해주려고 오셨나?”
“아무래도 오늘은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말에 가시가 가득 들어있어. 후후! 조언이라…… 이번에 살수를 쓸 때는 마영심도 십칠 식을 써봐. 마음에 끓었던 울분이 싹 가실 거야. 때로는 통쾌하게 울분을 풀기도 해야지.”
“혈마가 되라는 소리군.”
“혈마 무공을 수련했으면 본의(本意)에 따라야지. 후후! 몰랐나 본데, 넌 평생 피를 뽑아먹으면서 살 팔자야. 내가 말했잖아. 내가 모시는 부처가 혈불이라고.”
“아!”
호발귀는 탄식했다.
혈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크게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장진 스님이 다시 나타나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
혈불 대신 활불을 말하던 모습은 사라졌다. 참회동에서 봤던 장진 스님으로 돌아갔다.
혈마가 되는 길은 많다.
지금까지는 무공에서만 길을 차단하면 혈마가 되는 것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은 게 아니다. 살기가 혈기로 변하면 혈마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살기가 크게 일어나고 있다.
강하에서 벗을 죽인 귀무살에게 원한을 품듯, 잡랑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러자 장진 스님이 모습을 보였다.
혈마는 무공의 문제이기도 하고, 살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호발귀는 장진 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아버렸다. 마음을 꼭꼭 닫아걸었다.
타닥! 타닥! 타닥!
모닥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호발귀는 움직임을 멈췄다. 가던 길을 멈추고 제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죽은 사람이 빤히 보이는 곳에서 잠이 오나?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멈출 수밖에. 일단 멈춘 다음에 생각이란 것도 해보고 방책이 세워지면 움직이려고 한다.
호발귀가 모닥불을 보면서 독백처럼 말했다.
“나 오늘 살계를 열려고. 한데 사실은 자신이 없어. 진짜로 살기를 마음껏 드러냈을 때 내가 어떻게 변할지 짐작도 못 하겠어. 그때는 나, 죽여줄 수 있나?”
호발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모두가 다 알았다.
홀리에게 하는 말이다.
호발귀가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살기를 마음껏 드러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혈마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때는 정말로 나 좀 죽여줘. 조정하지 말고.”
“날 못 믿잖아.”
홀리가 말했다.
“믿어. 너라면 해줄 것 같아.”
“그러면 품앗이해.”
홀리가 당연한 듯 말했다.
도천패가 눈을 부라리며 와락 말했다.
“아니, 사람이 진중하게 말하는데 그런 말이 나와? 말을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는 거지!”
해자수가 재빨리 도천패의 손을 톡톡 치며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우린, 우린 제삼자니까. 지금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진중하게 말하는 거지, 농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품앗이라는 게 말은 좀 그렇지만, 신랑 하자는 거니까.”
“끄응!”
도천패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확 찡그렸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무심히 타들어 갔다.
“내가 혈마가 되면 날 죽여야 하는데, 품앗이가 무슨 소용이 있지?”
“혈마가 되면 그렇지. 하지만 안 된다면 내 지아비가 될 수 있잖아. 나 너 마음에 든다니까. 지금 이건 엄밀히 말하면 품앗이가 아니라 내기야.”
“그렇게 해서 네가 이긴다고 해도 얻는 것은 껍데기뿐이야. 서로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일단 그거면 돼. 내 사람이라는 명분. 그래야 천살단 책사가 널 넘보지 못하지.”
“……”
“네 마음속에 있는 여자, 그 여자잖아. 내가 혈마후가 못 된다면 그 여자 때문이겠지. 뭐랄까? 내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연적?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고.”
호발귀도, 홀리도 이 순간만은 농담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홀리는 난폭한 듯하지만,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다. 그래서 거침없이 매듭을 지으려는 것이다.
호발귀가 말했다.
“품앗이하지. 내가 혈마가 되면 틀림없이 죽여주는 것으로.”
“혈마가 되기 전까지는 내 남자야.”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 되는 게 그렇게 두려워? 그거 되면 내가 죽여줄게! 당장 가서 그 품앗이인가 뭔가 하는 거 때려치워!”
도천패가 우악스럽게 말했다.
“내가 혈마가 되면 아무도 못 막아.”
“내가 막아준다니까!”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모두 죽어.”
호발귀가 진중하게 말했다.
도천패는 발작하지 못했다. 호발귀가 농을 싹 빼고 진담만 말하고 있다.
“무공의 순서를 바로잡은 후부터 혈기가 진정되는 것을 느꼈어. 그래서 혈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참…… 세상일 마음대로 안 되네.”
“무슨 징조라도 있었던 거야?”
“풋!”
호발귀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징조 같은 게 어디 있어. 만일에 대비해서 준비해둔 거지. 정말 아무 일 없다니까.”
호발귀는 도천패를 안심시켰다.
도천패를 보위라는 직분으로 끌어들였는데, 이제는 친형 같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도천패는 투심문을 잊어버렸다.
요즘 들어서 ‘문주 놈’이라는 호칭도 입에 담지 않는다. 아예 호칭 없이 말한다.
호발귀는 문주가 아니라 형제로 보고 있다.
호발귀도 마찬가지다. 도천패의 진심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목숨도 내놓을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아무 조건 없이, 투심문에 상관없이.
그래서 도천패가 하는 말은 존중한다.
도천패가 볼멘 표정으로 말했다.
“홀리가 좋지 않다는 게 아니야. 좋지. 좋은 여자지. 거칠지만 좋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럼 등 소저는 어쩌고?”
“등여산?”
“괜히 안 그런 척하지 말고.”
“하하하! 책사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었나? 모두 왜들 그래? 마치 나하고 책사하고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데, 보위도 그랬잖아. 책사하고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정말 아무 관계도 아냐. 책사와 나, 완전히 깨끗해. 아무 관계도 아냐.”
호발귀가 다짐하듯 말했다.
책사 등여산하고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모두 등여산을 말한다.
‘아무 관계도 아냐.’
하지만 가슴이 텅 빈 듯 허전하다.
‘품앗이’를 하겠다고 말할 때부터 소중한 것을 잃은 듯 쓸쓸함이 밀려왔다.
등여산이 생각난다.
모두 등여산을 말하니까 생각나는 것이겠지만,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예쁘다. 사랑스럽다. 그녀를 사랑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게 아니다. 등여산의 모습을 보면 모든 사내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다시는 만날 일도 없는데…… 잊어버리자. 나와는 관계없는 여자야.’
“저기, 품앗이 말이 나왔을 때 아예 동침까지 밀어붙이는 게 어떨지. 아예 살까지 섞어버리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이라서 품앗이 어쩌고 할 것도 없고.”
해자수가 홀리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도 자존심이 있어.”
“네? 아니, 계약에 무슨 자존심이…… 품앗이면 서로 필요한 것 주고받고 하는 게……”
“저 사람이 날 원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원하지 않으면 평생 합방 안 해.”
“네에? 아이구야! 그럼 왜 밀어붙인 겁니까?”
“확인할 게 있어서.”
“아니, 확인할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지, 품앗이까지 들먹일 필요가 뭐가 있다고.”
“저 사람, 확실히 등여산을 좋아하고 있네. 호호! 좋은 연적이 생겼어. 등여산이 먼저 선수를 쳐서 내가 좀 힘든 상태인데. 나도 자신 있거든.”
“하아! 난 모르겠다. 잘 해보슈.”
“사람 마음은 오직 마음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거야. 그걸 모르니 여태 혼자 살지.”
“하아! 이 무슨 섭섭한 말씀을. 아니, 내가 아이를 낳았으면 아씨만 한 자식이 있을 텐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해자수가 일어서서 걸어가는 홀리 뒤를 졸졸 쫓아가며 종알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