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102화 (102/500)

第二十一章 촉동(觸動) (2)

“해자수.”

홀리가 딱 한 마디 했다.

“그러니까 소저는 해자수를 기다리고, 그동안 우리는 귀문을 치고. 그럼 좋지 않냐 이거지.”

도천패가 홀리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왜 나서?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은 호발귀인데?”

“다, 당신? 하! 소저, 소저 해줬더니 이 새파란 것이. 야! 네 눈에는 내가 어른으로 뵈지도 않냐?”

도천패가 팔을 걷어붙였다.

홀리가 말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해자수를 기다려. 난 해자수에게 볼 일이 있어. 그리고 여기서 할 일도 있고.”

“하!”

도천패는 기가 막혀서 한숨만 토해냈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고 말을 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버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홀리가 원하는 대로 어딘지 모를 곳에서 묵묵히 세월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혈천방에 대한 정보는 오직 홀리만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하나만 묻자고. 해자수란 위인이 언제 오는데?”

“몰라.”

“하! 정말 이게 말끝마다 반말이야! 여긴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어떻게 모조리 내게만 반말들이야!”

도천패가 모두 들으라는 듯 버럭 고함질렀다.

오랜만에 편히 휴식을 취한다.

도천패도 한가한 나날이 싫지 않았다. 옆자리에 늘 당홍이 붙어 있는데 싫을 리 있나.

나무할 때도, 사냥할 때도 두 사람이 같이 다닌다.

둘 사이가 언제부터 그렇게 좋았다고 아예 밥을 먹을 때도 찰싹 붙어 앉았다.

“정말 후회 안 해?”

“안 해.”

“내가 어디가 좋다고 그래. 볼 것 하나도 없는데.”

“맞아. 볼 것은 없어. 하나만 빼고.”

“하나? 뭐?”

“덩치.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아서 독존(毒尊)으로 만들 거야. 그럼 혈마도 무릎 꿇릴 수 있어.”

“끄응!”

도천패가 이 앓는 소리를 냈다.

당홍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그녀가 한 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홍은 종자를 개량한다는 이상한 말을 했었다.

“그래도 남이 들으니까 다음부터는 듬직해서 좋다고 할 수 없을까? 듣기도 좋고.”

“그게 뭐 어렵다고. 알았어. 그렇게 말해줄게. 듬직해서 좋았어.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

“큭큭큭!”

두 사람은 옆에 사람이 있건 없건 가리지 않고 키득거렸다.

홀리는 상당히 거칠고 사나운 여자다. 강한 무공으로 밀어붙이는 싸움을 좋아한다.

그런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서 호발귀 세숫물을 받아온다. 아주 당연한 듯이.

그녀는 매일 사냥을 한다. 하루에 한 마리는 꼭 잡는다. 그리고 사냥한 짐승을 직접 손질한다. 가죽을 벗기고 등뼈 옆에 붙은 등심살을 떼어내서 직접 굽는다. 물론 호발귀 식사다. 이런 수발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한다.

잠자리도 직접 챙긴다.

같이 잠을 자려고 하지는 않지만, 담요를 펴고 개는 것은 직접 한다. 또 잠도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곳에서 청한다. 대략 사오 장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홀리는 해자수를 기다리면서 호발귀에게도 연정을 드러내고 있다.

처음에는 호발귀도 무심히 호의를 받았지만, 하루도 되지 않아서 홀리의 뜻을 눈치챘다.

“이러지 않아도 돼.”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난 부담이 돼.”

“내가 싫지만 않으면 돼. 언젠가는 날 좋아하게 될 거야.”

“널 좋아하게 되면, 그때는 네가 해주는 것을 받지. 하지만 지금은 하지 마.”

“내게는 관심조차 없네?”

“……”

“알았어. 나도 헛고생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아. 그만둘게.”

홀리가 흔쾌하게 말했다.

“호발귀 여자 있지?”

도천패는 홀리를 쳐다봤다.

홀리의 표정이 매우 담담하다. 질투라거나 아쉬움 같은 표정이 일절 엿보이지 않는다.

“하! 그게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도천패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 순간, 도천패는 등여산을 떠올렸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딱히 어떤 관계라고 말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어떤 감정 표현도 하지 않았다. 둘은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나누지 않는다. 둘이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 무림에 관한 말뿐이다.

혈천방, 귀무살, 귀문…… 주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러니 무슨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때 동굴에서 본 게 있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여자가 있네.”

홀리가 도천패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도 짐작한 모양이다.

“혹시 천살단 책사 등여산?”

“하!”

“여자가 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네.”

홀리가 피식 웃었다.

해자수는 기다린 지 열이레째 되는 날, 모습을 드러냈다.

해자수는 홀리를 보기 무섭게 그녀를 이끌고 단둘만 이야기할 수 있는 한적한 장소로 갔다.

“음문촌이 기습당했어요. 제가 갔을 때는 온통 잿더미만 남아 있어서…… 거의 뭐 절반가량은 그 자리에서 죽은 것 같고 나머지 절반은 끌려간 것 같은데.”

“끌려갔을 리 없어.”

홀리가 단박에 말문을 막았다.

“내 생각도 그렇긴 한데……”

해자수가 옷 안으로 손을 넣어서 등을 긁었다.

“촌장님이 보통 사람이라야지. 호랑이 아니우. 호랑이. 그런 분이 잡혀갔을 리 없지. 또……”

해자수는 말을 이으려다가 뚝 그쳤다.

촌장은 자식이 오남 이녀가 있다. 일곱 명 모두 맹수들이다. 사납기가 말도 못 한다. 그들이 끌려갔을 리 없다. 하지만 홀리는 그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말을 하려다가 말고 중간에서 그쳤다.

홀리가 말했다.

“만약에 끌려갔다면 일부러 어차피 간 거야.”

“그렇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음!”

홀리는 신음을 흘렸다.

“음문촌을 버리고 혈천방으로 들어갔다면, 우리를 버렸다는 건데. 솔직히 말해! 호발귀 상태, 보고했지! 혈마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어, 안 했어!”

“하! 나 참 그게…… 내가 뭐 쥐뿔이나 있는 사람인가. 아무것도 없는데 촌장님은 자꾸 뭘 말하라고 하지, 말할 건 없지.”

“말했네.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이, 아씨도! 아씨도 내 입장이 되어봐요. 말 안 할 수 있나! 옆구리를 자꾸 쿡쿡 쑤시는데 말 안 하고 어떻게 배깁니까!”

홀리는 해자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제야 아버지와 형제들이 혈천방에 끌려간 일이 이해된다.

음문촌은 호발귀에게서 혈마의 씨앗을 보지 못했다. 호발귀가 혈마 무공은 배웠지만, 혈마는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혈마가 되지 못하는 사정은 알 필요가 없다. 혈마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럼 남은 길은 혈천방이다.

음문촌은 진작부터 혈천방에서 혈마 냄새를 맡았다.

옛날, 혈마가 사람을 죽인 방식 그대로 사람이 죽었다. 특히 구뢰마권에 뼈를 맞으면 뼈가 모래처럼 부서지는데, 그런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혈마를 만들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도 가짜 혈마이기에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다. 가짜 혈마일망정 직접 혈천방으로 뛰어들어서 미완성 혈마에게 작업을 걸 생각이다.

그러면 혈마를 조정할 수 있는 사람, 혈마환객이 있어야 하는데.

‘토초(菟炒)!’

음문촌에는 홀리 외에도 혈마후가 될 수 있는 또 한 명의 여자가 있다. 홀리의 언니, 오녀(五女)인 토초다. 여자라기보다는 사내 싸움꾼에 가까운 언니.

토초가 가짜 혈마를 조정할 것이다.

혈천방에서 조작한 혈마가 옛날 위세를 떨친 혈마라면 틀림없이 조정된다. 하지만 겉모습만 혈마라면 심언이 먹히지 않는다. 혈마와 혈마후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아버지와 오빠. 언니는 괜히 잡혀간 것밖에 안 된다.

홀리가 말했다.

“모두 혈천방에 승부를 건 것 같네. 하지만 난 호발귀에게 승부를 걸 거야. 호발귀가 혈마가 안 되더라도 혈마 무공을 이어받았으니…… 우리 일족은 혈마에게 헌신해야 해. 내가 머물 곳은 여기야. 해자수도 선택해.”

“그럼 촌장님과는 무조건 갈라지시겠다는 말씀이시죠?”

“풋! 우리가 언제부터 하나였다고. 모두 뿔뿔이 제 살길을 찾잖아? 그쪽은 그쪽 갈 길을 가는 거고, 나는 내 길을 가는 거고. 내 길은 여기 밖에 없어.”

“하! 어렵네.”

해자수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해자수가 호발귀의 소매 끝을 이끌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저기 거시기 그 무엇이냐.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이상하게 듣지는 말고. 사람 사는 게 뭐 별것도 아닌데. 앞뒤 딱 끊어버리고 간단하게 말할게. 품앗이 어때? 품앗이.”

“무슨 소리야?”

호발귀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해자수를 쳐다봤다. 다짜고짜 품앗이라니.

“저기 듣자 하니 아씨 정연(情然)을 거절했다며? 음문촌에서는 서로 마음에 들면 물도 떠다 주고, 고기도 주고 그러거든. 그걸 받으면 서로 좋다는 뜻이고, 안 받으면 끝이지. 그런데도 한쪽에서 마음에 있으면 거래를 제안하는데…… 그래서 내가 품앗이를 하자는 거지. 아씨도 하나를 주고, 너도 하나를 내놓고.”

“난 품앗이 할 게 없는데?”

“에이. 없기는. 그 뭐야, 혈천방 귀문 정보도 알아야 하고, 귀무살도 찾아야 하고. 사부는 어디 계시나? 사부도 찾아야 할 거 아냐. 그거 우리가 다 알아봐 준다니까? 대신 알지? 단도직입적으로 톡 까놓고 말하면 우리 아씨가 뭐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다 그런 거지 뭐.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고. 좀 좋아?”

호발귀는 손가락을 들어서 해자수의 이마를 딱 때렸다.

“아이쿠!‘

해자수가 두 손으로 이마를 잡고 아파서 쩔쩔맸다.

“사람이…… 어떻게 부부지연을 품앗이로 하자고 하나? 이게 지금 말이야?”

“저기 이해 못 하나 본데. 음문촌에서는 이런 거래가 심심찮게 이루어진다니까? 서로 필요하면 하는 거지 뭐. 그리고 우리 아씨, 좀 예뻐? 솔직히 품앗이가 아니더라도 우리 아씨 정도면……”

해자수가 말을 하다가 움찔거리며 물러섰다.

호발귀가 또 손을 들었다.

“거참 사람이 왜 자꾸 손찌검하려고 그래! 세상에 중매꾼을 패는 법이 어디 있어!”

“말이 말 같아야 대꾸를 하지. 어휴!”

호발귀는 해자수를 한 대 쥐어박을 듯이 주먹을 들어 보인 후 돌아섰다.

해자수가 한 말은 헛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홀리와 해자수는 혈천방 정보를 품앗이로 내세웠다.

어떻게 이런 것이 배우자를 얻는 조건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음문촌에서는 종종 이런다고 하니,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홀리와 호발귀는 혈천방 정보를 말하지 않는다.

만약 두 사람에게서 정보를 받는다면 홀리를 배우자로 인정한 후일 것이다.

호발귀와 도천패는 흐르는 개울을 멍하니 쳐다봤다.

서로 상의라는 것을 하는 중이지만, 딱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개울만 쳐다본다.

“내 생각에는 그 품앗이라는 거 딱히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솔직히 홀리가 성질이 세서 그렇지 저 정도 여자도 찾기 힘들어. 여걸이야, 여걸.”

“……”

“혹시 등여산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도천패가 호발귀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 여자는 안 돼. 송충이는 솔잎을 먹으랬다고, 우리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지레짐작은. 아무 관계도 아냐.”

“킥! 정말? 그 여자는 많이 배우고, 머릿속에 든 것도 많고. 주변에 허여멀겋고 때깔 좋고 돈 많은 놈이 득실거리잖아. 주치균인가 뭔가 하는 놈도 왕족이라며? 잘 생겼고. 언감생심 한낱 소매치기가 쳐다볼 여자가 아냐.”

도천패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는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려고 했다.

동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잊어버리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미 살을 섞은 여인이라면 쉽게 잊혀질 리 없을 테니까.

“형수가 귀문을 안다고 했지?”

“원래 우리가 가려고 했던데?”

“일단 거기로 가자.”

“귀문이 아직 있을까? 그러잖아도 거길 물어봤는데,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고 대략 알더라고.”

“그럼 가야지. 일단 확인해 보는 거야.”

호발귀가 일어섰다.

“저 두 사람은 어떻게 할 건데?”

호발귀는 홀리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홀리는 갈 곳이 없다. 본의 아니게 두 사람 대화를 들었다.

두 사람은 은밀히 대화를 나눴지만, 속삭이듯 말하는 소리가 호발귀 귀에 가는 실처럼 연결되어 들렸다.

역천금령공과 이령귀화의 위치를 바꾸자 내력이 나날이 강해진다.

- 우리 일족은 혈마에게 헌신해야 해. 내가 머물 곳은 여기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홀리의 공개 청혼을 받아줄 수는 없지만, 그녀를 내칠 수도 없다.

호발귀가 말했다.

“따라오면 같이 가고, 제 갈 길로 가겠다면 보내주고. 우리가 움직이면 알아서 선택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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