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101화 (101/500)

第二十一章 촉동(觸動) (1)

귀문을 공격하는 데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은사곡 귀문처럼 골짜기 전체가 폭발하기도 하고, 환산만 귀문처럼 함정이 가득하기도 하다.

천살단에 전해져 오는 말이 있다.

귀문을 공격하면 죽이는 숫자만큼 아군도 죽는다는 말이다.

백 명을 죽이면 백 명이 희생된다. 천 명을 죽이면 천 명이 희생된다.

죽이는 숫자만큼 죽을 각오를 하고 치라는 말이다.

한데 이제 털끝만큼도 손상을 입지 않은 체 귀문을 공격할 방도가 생겼다.

무림 문파나 무인들은 귀문을 찾지 못한다. 굳이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찾기가 무척 어려운 곳에 숨겨져 있다. 또 설혹 찾았다고 해도 공격하지 못한다. 혈천방의 보복이 두려워서 쉽게 공격하지 못한다.

그런데 혈천방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공격하는 자가 나타났다.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방법이 생겼는데, 어떻게 할까? 지켜보기만 할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까?

사박! 사박!

등여산은 대나무 숲길을 걸었다.

단주 집무실로 가는 길이다.

바람이 불어와 대나무 숲을 흔든다. 댓잎이 살랑거리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선물한다.

대나무 숲길을 걸어가면 항상 기분이 좋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오늘은 조금 낯설다. 검벽주가 바뀌어서인가? 주치균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숲마저 낯설게 느껴지나?

한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토록 크다.

원래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했다.

들어온 사람은 표시가 나지 않지만 나간 사람은 당장 표시가 난다. 그가 만졌던 물건과 머물던 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대숲에는 검벽 무인들이 쫙 깔려있다.

다른 때 같으면 인사를 해왔을 사람들인데,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다. 각기 맡은 일에만 열중한다.

사박! 사박!

등여산은 익숙하지만 낯선 대숲을 걸어갔다.

“단주님, 부르셨어요?”

등여산은 편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물어볼 게 있어서. 차?”

“아뇨. 오면서 맑은 공기를 마셨더니 개운해요. 여운을 더 즐기고 싶어요.”

“그것도 괜찮지.”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천살단은 조용하다.

호발귀와 연관된 사건이 아니면 특별하게 일이라고 할 것도 없다. 천살단 사람이 신경을 썼다 하면 모두 호발귀와 연관되어 있다.

단주가 부른 이유도 호발귀 때문일 것이다.

단주가 말했다.

“편하게 묻지. 호발귀와 어떤 관계냐?”

“네?”

“이상한 소문이 들려서. 호발귀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젊은 사람들 일에 간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만, 그래도 사실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단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글쎄요? 호발귀하고 관계라면…… 우호적이라고 할까? 나쁜 감정은 없어요.”

“그것뿐이냐?”

“네.”

“그럴 것으로 생각했지.”

단주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후룩 마셨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혹여 호감이 생기더라도 삼가고. 호발귀가 살단 총주를 공격한 일이 있으니 진상 파악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아무래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게 좋겠지.”

“무슨 말인지 알고 있어요. 염려되는 일, 경계하겠습니다.”

“역시! 한마디 하면 척 알아들으니 얼마나 좋아. 후후!”

단주가 손가락을 들어서 오른쪽 볼을 살살 긁었다.

단주의 오래된 습관이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으레 나오는 버릇인데, 본인도 굳이 숨기지는 않는다.

“호발귀하고 단지 우호적인 관계라면 일도 할 수 있겠군. 일하는 데 지장이 있으려나?”

“호발귀와 관계된 일요?”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없어요.”

“그래, 그런 일 좀 해.”

“네. 무슨 일을?”

“호발귀에게 가서 우리 쪽 정보를 알려줘.”

“……?”

“호발귀가 혈천방 귀문을 공격하고 다니니…… 우리 쪽에서 수집한 정보를 알려주지. 호발귀도 귀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거고. 서로 좋은 거지.”

등여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책사가 가지 않아도 된다. 천살단 무인 중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귀문에 대한 정보를 종이에 적어서 건네주기만 하면 호발귀가 알아서 공격할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에게 가라는 것은, 앞으로 있을 혈천방의 역습에 대비하라는 뜻이다.

혈천방이 공격만 당하고 가만히 있을까? 반드시 반격한다. 그 반격을 최대한 막아보라는 거다.

단주의 뜻은 호발귀를 보호하는 데 있다.

단주가 말했다.

“책사가 옆에 붙어서 잘 도와줘. 습격 작전 같은 것도 짜주고. 보아하니 그 친구, 너무 무모해.”

“네.”

등여산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천살단 지원이 필요하면 뭐든 요청하고. 전격 지원하라고 말해 놓을 테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등여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주가 호발귀를 도와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그것도 매우 좋지 않다. 점심 먹은 게 가슴에 얹힌 듯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뭔가 빠진 게 있어. 빠진 부분을 채워야 해. 출발하는 것은 급하지 않아.’

등여산은 비보전을 찾았다.

“오늘부터 여기서 좀 자야겠어요, 숙박비가 얼마죠?”

등여산이 농담조로 말했다.

“식사까지 하실 건가요? 식사는 한 끼에 스무 냥 추가입니다.”

비보전주도 농담으로 받았다.

“제 자리 비었죠?”

“웬만하면 잠은 숙소에 가서 자지 그러십니까? 요즘은 밤 기온이 제법 차요.”

“호호호!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또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나서. 웬만한 한기쯤은 거뜬하거든요.”

등여산이 환하게 웃었다.

비보전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등여산은 툭하면 비보전에 와서 잠을 청했다. 잠자리라고 변변하게 있을 리 없다. 잠이 쏟아지면 그저 책상에 엎드려서 선잠을 자는 게 고작이다.

식사도 가져다주기는 하는데, 책들을 쌓아놓은 곳이라서 주먹밥을 만들어서 가져다준다.

이래저래 불편하다.

하지만 등여산이 무엇엔가에 팍 꽂힌 이상, 말린다고 해도 듣지 않는다.

비보전주가 말했다.

“소동 한 놈 붙여놓겠습니다.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면 훨씬 빨리 찾을 겁니다.”

사륵!

등여산은 비보전에 있는 종이 뭉치들을 읽어나갔다.

비보전은 중원 소식을 수집한다. 비보전 무인들이 수집한 정보를 선별한다. 거짓 정보, 확인되지 않은 정보는 따로 추려놓고, 진실한 정보만 보고한다.

비보전에는 뜬소문에 불과한 정보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등여산은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읽었다. 가짜 정보로 확실하게 분류된 것까지 모두 읽었다.

예상했던 대로 호발귀와 얽힌 사건이 많다.

호발귀는 중원 무림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혈천방, 천살단뿐만 아니라 중원 무림 전체의 안위가 한 사람의 행동 때문에 요동치고 있다.

그러니 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다 알아야 한다.

사실, 등여산은 비보전에 있는 정보를 거의 알고 있다

하지만 무림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놓친 부분이 없는지 자세히 살펴봤다.

사르륵!

책장 넘기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호발귀에게 달려가고 싶다. 이런 일은 헛수고다. 이럴 시간이면 벌써 십 리는 달려갔다. 그만큼 호발귀를 빨리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들뜨려는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정보를 읽었다.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갔다.

근래, 무림은 태평성대다. 풍파가 전혀 없다.

천살단은 혈천방을 공격하지 않고, 혈천방도 천살단을 치지 않는다.

강하에서 십육 비자가 혈마록을 탈취하지 않았다면 정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호발귀가 칼을 들기 전까지 무림은 조용했다.

혈천방은 천살단 무인 정보를 알고 있다. 암살을 시도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혈천방이 숨죽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귀무살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중원 전역에 걸쳐서 상당히 많은 사건에 간여 되어 있다.

그런데 묘하게 천살단을 건드리지 않는다.

천살단 역시 같다. 혈천방을 건드리지 않는다. 혈천방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건드리지 못하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전면전을 우려해 공격을 삼간다.

혈천방이 강하에 본방을 두고 있을 때만 해도 그랬다.

물론 강하게는 독림이 본방을 방어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까짓 독림쯤은 뚫기로 작심하면 얼마든지 뚫을 수 있다.

아예 뚫을 생각이 없었다.

혈천방과 천살단은 전면전을 벌일 경우, 서로 공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엽적인 충돌은 계속 벌이지만, 본방이나 본단을 공격하는 결정적인 공격만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역은 호발귀다.

호발귀가 혈천방도 무너뜨리고 천살단 살단 총주도 공격했다. 양쪽을 모두 쳤다. 하지만 더 타격을 많이 받은 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혈천방이다.

귀문 두 개가 날아갔고, 귀무살 수장인 귀무령도 죽었다. 아니 실종되었다. 비보전 밀지에는 귀무령이 죽었다고 적혀 있지만, 등여산은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은 정보는 믿지 않는다.

귀무령 죽음은 아직 확신할 수 없다.

그런 마당에 단주가 명령을 내렸다.

호발귀에게 정보를 줄 테니 귀문을 쳐라?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과연 단주에게 혈천방과 전면전을 벌일 의지가 있을까?

등여산은 비보전에서 단주의 심중을 헤아려 볼 생각이다. 그러자면 모든 정보를 상세히 파악해야 한다. 특히, 혈천방이 어느 정도나 강한지 판단해야 한다.

“으음!”

등여산은 침음했다.

혈천방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무림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잡초다. 어지간한 호미로는 파내지 못한다.

혈천방이 이 정도로 강하다면…… 결국 호발귀는 사용하다가 미련 없이 버리는 소모품인가.

혈천방이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다면 천살단은 결코 뒤를 막아주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혈천방 귀문을 무너뜨린 것은 천살단이 아니다. 호발귀다. 그러니 호발귀가 모든 책임도 져야 한다. 혈천방의 공세를 단신으로 막아야 한다.

자신은 또 이런 점을 알면서도 호발귀에게 가서 귀문 정보를 주어야 한다. 그가 공격할 수 있도록.

스읏!

등여산은 일어섰다.

단주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았다.

어쨌든 귀문을 없애는 일은 한다. 그 일은 호발귀뿐만이 아니라 천살단도 해야 할 일이다. 천살단 책사를 맡았을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다.

비보전을 나서던 등여산은 마침 비보전으로 걸어오던 천원주 주당염을 만났다.

“비보전에서 살았다며?”

“네.”

“며칠 동안이나 있었던 거야?”

“열흘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열흘? 비보전에 열흘씩이나 머무를 일이 있나? 비보전 정보는 이미 다 전해 받았잖아?”

“그렇게는 한데 다시 뒤져보니까 볼 게 많네요. 저도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어요. 한 사나흘이면 될 줄 알았는데.”

“뭐 신기한 거라도 찾았나 보지?”

“그게 아니라 좀 더 명확하게 볼 게 있어서요.”

천원주가 활짝 웃었다. 그러다가 손을 살짝 잡으며 물었다.

“참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

“호발귀하고 무슨 관계야? 깊은 사이야? 검벽주, 아니 이젠 살단 총주지. 살단 총주 표정이 살벌해졌어. 알아? 세간에 들리는 소리는 다 헛소리지?”

“글쎄요. 어떤 소리든 듣기 마음이잖아요.”

등여산은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았다.

일단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이미 소문을 반쯤은 믿었기 때문에 물어본 것이다. 정말로 아닐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묻지도 않는다.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며 피식 웃고 말 것이다.

이것이 사람 마음이다.

단주도 그렇고 천원주고 그렇고…… 당사자에게 직접 물었다는 건 이미 어느 정도는 소문을 믿고 있다는 거다.

천원주가 말했다.

“호발귀하고 무슨 관계든 너무 깊이 빠져들지 마. 나중에 힘들어져. 내 말 꼭 새겨들어.”

천원주가 단주와 똑같은 충고를 했다.

“네.”

등여산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모두 왜 같은 말을 하는지 안다. 호발귀가 쓰다가 버릴 소모품이라서 그렇다. 그것도 혈천방 싸움 최전선에 배치했으니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등여산은 천원주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후, 걸음을 재촉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