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章 질투(嫉妬) (3)
멈춰!
명령을 받고 멈췄다.
앞을 주시한다. 숨을 고르게 쉬면서 기척을 흘리지 않는다. 사방을 경계하면서 다시 움직이라고 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다. 서두르지 않는다.
향 한 자루 태울 시간이 무심히 흘렀다.
숨어있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긴 시간인데, 여전히 움직이라는 명령이 없다.
소요귀명이 끝났다.
어떻게 움직이든 발각될 수밖에 없다.
호발귀가 봐도 그렇다. 이제는 어떻게 움직이든 발각된다.
앞에 동굴이 보인다. 동굴 주변으로 경계 무인이 여덟 명이나 늘어서 있다.
저들의 무공은 매우 높은 편이다.
지금 당장 귀무살이라는 이름을 걸고 움직여도 부족하지 않을 듯하다. 아니, 어쩌면 귀무살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몸에서 풍기는 예기가 강하다.
그런 자가 여덟 명이나 동굴을 지키고 있다.
소요귀명은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은밀히 동굴 안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가 끝인가?’
호발귀는 허리춤에 꽂혀있는 단창 두 자루를 만졌다.
길을 오면서 병기를 준비했다.
그동안 칼도 써보고 검도 써봤다. 몽둥이도 써봤다. 다양한 병기를 휘둘러 봤다.
그중 단창이 제일 편했다.
단창은 살단 총주를 상대하면서 처음 써봤다.
남이 쓰던 병기를 빼앗아서 휘둘렀는데, 뜻밖에도 손에 착 달라붙었다.
그 후, 단창의 감촉을 잊지 못했다.
혈마록에는 단창을 사용하는 무공이 없다. 혈천도법, 마령심도, 소요귀명검법 등 칼과 검을 사용하는 무공은 있지만, 여타 병기를 사용하는 공부는 없다.
하지만 어떤 공부도 응용해서 사용할 수 있다.
호발귀는 자신의 애병을 단창을 선택했지만, 공들여서 명창을 만들지는 않았다. 아니, 정 반대다.
언제 버려도 좋은 것, 값싸고 투박한 단창을 택했다.
병기에 애착을 느끼면 그때부터는 병기의 노예가 된다.
툭!
허리춤을 만져서 단창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단청이야 꽂힌 그 자리에 있겠지만, 낯선 병기라서 싸움 시작 전에 만져봤다.
스스슷! 스스스슷!
호발귀는 은허신법을 펼쳤다.
호발귀의 모습이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너무 빨라서 흐릿한 잔영만 보이는 듯했다. 은밀하고 허허하다는 은허신법의 요체를 정확하게 펼쳤다.
옛날에 펼치던 은허신법이 아니다. 어떤 절정 신법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현묘하다.
쒜에에엑!
동굴을 지키던 무인이 검을 쳐왔다.
귀검의 검을 봐서인지, 무인의 검은 한 없이 느렸다.
조금만 과장한다면 검에 새겨진 검명(劍名)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할까?
스읏!
호발귀는 손을 쳐올렸다.
삼마돌각수로 검을 잡았다. 일지공으로 손목을 쳐서 검을 떨구게 하고, 빼앗은 검을 상대방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퍼억!
검이 심장 깊숙이 틀어박혔다.
무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거칠게 나가떨어졌다.
다른 무인이 칼을 쳐냈다.
호발귀는 이번에도 손끝으로 칼을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비틀었다.
혈천방 무인의 손아귀가 억센 힘에 떠밀려 북 찢겼다.
그는 검을 놓쳤다. 불행하게도 호발귀에게 빼앗겼다. 그 순간, 그의 검이 그의 머리를 쳤다.
탁!
머리를 치는 소리가 명쾌했다. 마치 칼로 돌을 치는 듯 맑은 음향이 들렸다.
상대는 피식 쓰러졌다.
호발귀의 손에서 원충노인의 팔십일수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일단 상대방의 병기를 잡는다. 그 후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발로 차기도 하고, 팔꿈치를 꺾기도 한다. 정강이를 차서 주저앉히기도 한다.
상대는 죽여달라는 처지가 된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호발귀는 절대자의 처지에서 상대를 쳐다본다.
병기를 돌려준다. 상대방의 몸에 꽂는다.
상대방의 병기를 빼앗아서 상대방에게 돌려주는 수법은 호발귀가 창안한 것이 아니다. 엄연히 원충노인의 팔십일수에 기재된 공부 중 하나다.
창환수(搶還手)라고 한다.
원래는 닿는 즉시 돌려준다.
전낭에 손을 대는 즉시 돌려준다. 허리춤을 만지는 즉시 돌려준다. 행낭을 만지는 즉시 돌려준다.
배수가 극치에 이르면 빼앗고 돌려주는 게 피부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빨라진다. 창환수를 무공에 접목하면 상대방의 병기를 잡는 순간이 돌려주는 순간이 된다.
상대방은 호발귀가 어떤 초식을 펼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절명한다.
호발귀는 이번 싸움에 일부러 원충노인의 팔십일수를 꺼내 들었다.
싸움을 빨리 끝낼 심산이라면 그냥 단청을 꺼내서 혈천도법이나 마령심도를 사용하면 된다.
그러는 편이 혈천방 무인을 상대하기에는 훨씬 좋을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는 혈마 무공이 팔십일수보다 훨씬 익숙해졌기 때문에 저절로 나온다.
그래서 일부러 팔십일수를 사용했다.
사문의 무공을 잊으면 되겠나. 어떤 경우에도 잊으면 안 된다. 더욱이 팔십일수가 혈마 무공에 뒤지지도 않는다.
이런 판단은 두 무공을 모두 수련해 본 호발귀만이 내릴 수 있다.
호발귀는 팔십일수 중 태반을 사용해보지 않았다. 사용할 틈이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수련할 생각이다.
또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속도 면에서 보면 팔십일수나 혈마 무공이나 비슷하다.
촌각의 차이도 나지 않는다.
실전 경험은 늘리면서, 걸리는 시간이 똑같다면 당연히 사문 무공을 써야 하지 않나.
슈웃! 푹!
상대방의 검을 잡고, 팔을 꺾었다. 그러자 검이 목을 그었다.
혈천방 무인은 자신의 검에 목을 베였다.
그는 목동맥이 잘려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 소리는!”
당홍이 벌떡 일어섰다.
“발각됐네. 이렇게 되면 우리 쪽에서도 쳐주는 게 좋아. 양쪽에서 쳐야지 돼.”
스릉!
홀리가 칼을 뽑았다.
그녀는 도천패나 당홍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칼을 뽑자마자 곧장 은사곡을 향해 치달렸다.
쒜에에엑!
그녀가 흘리는 바람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저 여자 정말 호발귀를 좋아하나?”
도천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달려가는 걸 보면 정말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아직도 호발귀가 혈마로 변할 거라고 믿나? 음! 음문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정말로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아.”
당홍이 말했다.
“여자의 직감인데. 호발귀를 쳐다볼 때는 눈이 빛나. 반짝반짝. 분명히 좋아하고 있어.”
“그래? 좋아하면 안 되는데.”
“왜?”
“호발귀에게는…… 그, 그 뭐냐……”
도천패가 갑자기 말을 더듬거렸다.
“책사하고 무슨 일이 있었구나!”
당홍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여자 문제이고, 호발귀 곁에 여자라고는 등여산밖에 없어서 재빨리 그녀를 끄집어냈다.
“아니, 그, 그게……”
“무슨 일인데?”
“아, 아무래도 호발귀가 책사를 거, 건드린 거 같아서…… 아! 정신을 잃었을 때라…… 뭐 그런 일이 있었어.”
도천패가 말을 흐렸다.
“그래? 전혀 몰랐는데? 두 사람, 전혀 그런 낌새가 안 보이던데?”
당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런 일은 모른 척하고……”
“물론 모른 척하지. 그럼 이런 이야기를 내놓고 할까. 그런데 정말이야? 어떻게 건드렸는데?”
“하! 지금 이런 얘기할 때가 아니잖아. 가자!”
도천패가 대뜸 신형을 날렸다.
당홍도 뒤질세라 쏜살같이 뒤따라와서 옆에 바싹 붙으며 물렀다.
“그런데 그 말 정말이야? 건드렸다는 말은 같이 잤다는 거지? 서로 껴안고.”
“하!”
“확실해?”
“아니, 확실한 건 아니고. 옷 찢어진 것만…… 아, 됐다. 이 이야기는 그만!”
“궁금하게. 뭐야! 나중에 다 말해줘야 해?”
쒜에에에엑!
당홍이 대뜸 독침을 뿌렸다.
두 사람 앞을 가로막던 혈천방 무인 중 한 명이 독침을 피하지 못하고 풀썩 꼬꾸라졌다.
혈천방 무인들은 보통 무인이 아니다. 적어도 십 년 이상은 고련을 쌓았다.
골짜기 입구에서 경계서는 무인이라고 얕보면 큰코다친다.
혈천방 무인들이 재빨리 포위망을 펼쳐서 세 사람을 에워쌌다.
땡땡땡땡! 땡땡땡땡!
골짜기에 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골짜기 위쪽에서도 방울 소리가 들린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울렸다.
혈천방 무인들은 둘로 갈려서 달려갔다.
호발귀는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구르르릉! 구르릉!
동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소리는 무시했다. 어디 수작 부릴 게 있으면 마음대로 부려봐라 하고 거침없이 달려 나갔을 것이다.
이제는 무심히 듣지 못하겠다.
귀검이 기관진식에 당했다. 무공에 당한 것이 아니라 함정에 빠져서 죽었다.
동굴에서 울리는 소리는 분명히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다.
등여산이 임시로 만든 기관도 상당히 위협적인데, 하물며 동굴에 설치한 고정 기관은 얼마나 위험하겠나.
자칫하면 당한다.
기관이 움직였다면 십분 조심해야 한다.
츠으으읏!
진기를 뿜어냈다.
역천금령공으로 원정을 붙잡고,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이화귀령을 슬그머니 뻗어냈다.
츠읏! 츳! 탁탁!
이화귀령이 동굴에서 생기를 탐색했다.
모두 아홉 명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생기가 매우 미약하게 감지되는 것으로 봐서 동굴 석벽 안쪽에 숨어있는 게 틀림없다.
호발귀는 동굴 벽을 살폈다.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다. 구멍에서는 차가운 쇳기운이 감지된다.
암기가 발사되는 구멍이다.
‘여기는 사지군. 호굴(虎窟)이야.’
이화귀령이 탐지한 아홉 명은 모두 벽 속에 숨어있다. 동굴 저쪽 편에 사람 숨을 곳이 있다. 하지만 검으로 치지는 못한다. 두께가 어른 몸통보다도 굵다.
저벅! 저벅!
호발귀는 거침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간,
철컥! 철컥! 척!
동굴 벽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곧 새까만 벌떼가 확 쏟아져 나왔다.
쎄에에에엑! 쒜에에엑!
강침 더미다. 벽에 뚫린 대롱을 통해서 수천, 수천 개의 암기가 쏟아진다.
호발귀는 장삼을 벗어서 사방으로 휘돌렸다.
휘리릭! 휘릭!
장삼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암기가 한 뭉텅 씩 쓸려나갔다.
쒜에에엑!
호발귀는 신법을 펼쳐서 빠르게 쏘아갔다.
이번 공격은 위치만 이동시켜도 피할 수 있다. 동굴에 구멍을 내서 암기를 쏘는 것이라면 약간만 위치를 변동시켜도 제대로 목표를 잡지 못한다.
시야가 제한된다. 강침이 맞힐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
실제로도 그랬다. 호발귀가 앞으로 쏘아나가자 강침 세례가 뚝 멈췄다.
저벅! 저벅!
호발귀는 다음 공격을 예상하며 차분히 걸었다.
직접 공격을 가해오지 않고 기관으로 싸운다면 상당히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령귀화로 이미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구르르릉!
동굴이 다시 울었다.
‘이번 울림은 심상치 않은데? 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커.’
호발귀는 이령귀화를 이끌어 생기를 찾았다. 진기를 끌어낸 김에 기관이 움직이는 모습까지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기관은 찾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