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九章 환산만전투(環山灣戰鬪) (5)
저벅! 저벅!
호발귀가 걸어왔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음자를 유심히 쳐다보다 다가왔다.
“지독하군.”
호발귀가 미간을 살며시 찡그리며 말했다.
“살아날 수 있을까?”
등여산이 물었다.
호발귀는 고개를 저었다.
환산만 땅속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적어도 그물망이 덮인 곳은 죽음의 땅이다.
호발귀는 진한 사기를 느꼈다.
향후, 몇십 년간은 생명이 전혀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만들어지고 있다.
“당분간, 이 땅은 폐허가 되겠네.”
“땅을 매몰시키면서 회를 뿌렸어. 그래서 부시독이 밖으로 흘러나가지는 않아. 이 안에 있는 땅만 못 쓰는 거지.”
등여산이 그물에 덮인 땅을 가리켰다.
“화약을 터트리면서 회까지 뿌릴 수 있나?”
“가능해.”
“휘유!”
호발귀가 놀랐다는 듯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 있는 독기는 어느 정도가 가는데?”
“글쎄? 한 십 년?”
“이십 년. 이십 년은 지나야 사라져.”
등여산이 십 년이라고 말하자 당홍이 즉시 고쳐주었다.
“아! 그렇구나. 그건 몰랐네. 고마워요. 알려주셔서.”
등여산이 당홍을 향해 살짝 눈인사했다.
당홍은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이십 년 동안 죽음의 땅이 된다면 아무도 들어서지 못하게 경고판이라도 세워놔야 하는 거 아냐?”
“그러려고.”
“지독한 함정이야. 귀검을 방심하게 했어. 방심하지 않는 사내를 방심하게 만든다. 후후! 이런 함정이라면 누구라도 잡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나? 나도 잡을 거야?”
“혈마가 되면 잡을 거야.”
“하하하!”
호발귀가 밝게 웃었다.
“나 할 일 있어. 인제 그만 떠나줘.”
등여산이 다소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을 했다.
“떠나도 되나?”
“그래.”
“혈마가 되는 거, 두렵지 않아?”
“네가 한 말 믿으니까. 설혹 혈마가 된다고 해도 네 뜻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만큼 믿으니까, 너도 잘해.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악착같이 참아.”
사실, 그녀는 호발귀를 보내면 안 된다.
지금 호발귀는 혈천방이나 천살단 모두의 적이자, 보물이다.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물건이다. 적의 손에 들어갈 것 같으면 죽이기라도 해야 한다.
등여산은 그런 사람을 보내준다.
그녀는 귀검을 죽이라는 명령만 받았다. 호발귀에 대해서는 어떤 명령도 받지 않았다. 그러니 마음대로 보내도 본단에 책임질 것은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호발귀가 혈마가 될 것 같았으면 절대 보내지 않았다.
귀검을 잡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호발귀는 잡아두었다.
무공으로는 잡을 수 없고, 계책으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있다.
그녀는 호발귀가 한 말을 믿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호발귀가 혈마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을 믿는다.
“할 일이 또 남았어?”
호발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 말대로 할 일이 남은 것 같다.
음자들이 분분히 사방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들 손에는 횃불이 들려있다.
환산만 전체에 불을 놓을 생각이다.
환산만 뒤는 절벽이다. 골짜기에서 불을 놓으면 절곡 전체가 활활 타오른다. 뜨거운 불구덩이가 된다. 빠져나가는 불길이 전혀 없이 모두 안에서 태워진다.
만약 귀검이 살아 있다면 절벽 밑으로 뛰어내려야 한다. 그래서 절벽 밑에 음자를 배치했다. 그들이 귀검을 잡을 수는 없지만, 귀검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된다.
골짜기로 뛰쳐나올 수도 있다.
음자들이 골짜기를 포위했다. 빠져나오는 자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호발귀가 말했다.
“만 명 중 구천구백구십 명은 여기서 죽어. 하지만 만에 한 명은 살아날 수도 있어. 하늘이 도와주면 살아나는 거지. 그래서 그런 기회마저 없애려고.”
불만 놓으면 만에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휴우! 어떤 일이 있어도 너와 적이 되면 안 되겠다. 곱게 죽지 못하겠어.”
“혈천방은 다른 말도 해.”
“……”
“천살단과 전면전이 붙으면 제일 먼저 죽일 사람이 나라고.”
“그런 말 하고도 남지. 이걸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걸? 휘우! 간다.”
호발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바보. 어쩌면 너 때문에 나…… 실패했을지 몰라.’
등여산은 산에서 내려가고 있는 호발귀 일행을 끝없이 쳐다봤다.
모든 일에는 시간, 때가 중요하다.
점심에는 하늘도 가둘 수 있는 함정이 저녁에는 한낱 지푸라기보다도 못할 경우가 왕왕 있다.
귀검을 완벽하게 잡으려면 부시독을 뿌리는 즉시 불을 놓았어야 한다.
그런데 불을 놓지 않고 대기한다.
호발귀가 환산만을 벗어날 동안 기다리고 있다.
이 시간 차이가 어쩌면 귀검에게 살길을 열어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귀검은 대그물망 아래 갇혔다.
첫 번째는 화약에 당했을 거고, 두 번째는 매몰에 숨이 막혔을 거고, 세 번째가 부시독에 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남는다면 방법이 없다.
귀검이 살아난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하늘의 섭리를 거들먹거릴 필요도 없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계획에 틈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책사 자신이 실수해서다.
‘널 어제 보냈어야 하는데, 왜 보내지 않았지? 나도 모르겠어. 그냥 같이 있는 게 편했는데, 그게 실수였네. 책사로서는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야. 휴우! 귀검이 완전히 죽었기만…… 바래.’
“불을 놔요.”
등여산이 명령했다.
호발귀가 산은 완전히 내려갔다. 이제 사방에서 불을 놓아 환산만 전체를 태운다.
그녀는 절벽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절벽에 밧줄이 걸려 있다. 올라올 수는 없지만, 내려갈 수는 있다. 그곳으로 내려간다.
호발귀가 간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또 만날 수 있을까? 풋! 내가 무슨 생각을. 만날 일이 없어. 가는 길도 다르고. 그래도 혈마에서 벗어났다니 정말 잘된 일이잖아? 여기 오기를 잘했어.’
그녀는 일부러 활짝 웃었다.
하지만 마음은 왠지 계속 허전하기만 했다.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 * *
“자, 그럼, 여기서 우리도 헤어지자고.”
호발귀가 해자수를 보며 말했다.
“헤어져? 왜?”
해자수가 무슨 말이냐는 듯 호발귀를 쳐다봤다.
“말 하지 않았나 보네. 음문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내 눈에 띄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호발귀가 싸늘한 눈으로 홀리를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 싫어? 틈만 나면 사람을 떠나보내려고 하네?”
호발귀는 홀리가 뜻밖의 말을 하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그런 사람을 옆에 두고 기분 좋을 사람이 있나? 내가 잘못된 건가?”
“그런 생각 안 하면 되잖아.”
“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혈마 방식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니 나도 깨끗이 포기하려고.”
“뭐야?”
“나 솔직히 얘기해도 돼? 네가 좋아. 너 마음에 들어.”
홀리가 불쑥 말했다.
“후후! 못된 데다가 가볍기까지. 그래서?”
호발귀는 홀리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마음에 든다니까 말을 막 하네? 나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닌데?”
“설명할 필요 없다. 우리 그냥 앞으로는 만나지 말자고. 서로 안 좋은 인연 같아.”
“뭐 그렇다고 마음을 구걸한다거나 애원한다거나 하는 짓은 안 해.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나 싫다는 남자는 붙잡아 봐야 그저 그렇거든. 그냥 네가 마음에 든다는 것뿐이야.”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사이인가?”
“내가 정말 싫은 모양이네?”
“그러니까 싫고 좋고 하는 감정은 말할 사이냐고, 우리가? 더욱이 넌 내가 혈마로 변하면 장난감처럼 조정한다며?”
“무슨 사내가 그렇게 쪼잔해? 이런 식이면은 누가 사실대로 말해? 사실대로 말한 것도 죄야. 혈마를 조정할 수 있으니까, 조종할 수 있다고 한 건데. 그게 잘못이야?”
“뭐?”
호발귀가 기가 막혀서 멍하니 홀리를 쳐다봤다.
“내가 혈마를 조정할 수 있는데, 그럼 혈마가 생기는 게 좋지, 안 좋아? 혈마를 조정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제발 혈마가 되지 마세요.’하고 간살 떠는 게 더 나쁜 거 아냐?”
“하!”
“내가 그냥 입 다물고 있었으면 아직도 몰랐을 거 아니야. 진실을 숨기고 옆에서 살랑거리는 게 좋아? 그리고…… 혈마를 조정하면 그냥 주문 몇 마디 외우면 되는 줄 알아? 나도 희생을 한다고! 아주 큰 희생을.”
홀리가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냈다.
호발귀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홀리만 쳐다봤다.
적반하장인가? 방귀 뀐 놈이 성내나?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사내라면 한 대 쥐어패기라도 하지, 여자가 이러니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홀리가 말했다.
“그냥 옆에 있을 거야. 마음에 드는 놈이 어떻게 하는지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서로 마음 맞으면 시시덕거리기도 하고, 정 안 되겠으면 뻥 차.”
“아이고! 저 아씨. 저기, 저기, 저기 뭐냐. 중원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 말은 음문에서나 통하는 거고…… 여기서는 곱게, 곱게 말해야 한다니까요. 그리고 웬만하면 사내에게 ‘놈’이라고 말하는 건……”
해자수가 옆에서 홀리를 다독였다.
“히유!”
도천패가 기가 막혀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세상에 이런 여자도 있구나.
아니, 이런 모습…… 얼마 전에 봤다. 당홍이 자신에게 마음에 든다, 같이 살자 등등 온갖 말을 했다.
요즘 여자들은 이렇게 마음속 말을 막 하나?
도천패가 당홍을 살짝 쳐다봤다.
마침 당홍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마주치자 눈을 찡긋거렸다.
‘확실히 요즘 여자들은 다 이런 것 같아.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어. 히유!’
홀리는 해자수가 쩔쩔매면서 달래는 말을 무시하고 톡 쏘듯 말했다.
“여기 왜 온 건데?”
“뭐?”
“귀무살 찾으러 온 거 아니야?”
호발귀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홀리를 쳐다봤다.
“귀무살 중 누구를 왜 찾는지는 모르지만 찾기 힘들걸? 나도 그 사람을 찾아주지는 못해. 하지만 귀문으로 짐작되는 곳은 몇 군데 알아. 이만하면 쓸만하지 않아?”
“귀문을 안다? 귀문을 너만 아는 게 아닌데?”
호발귀가 당홍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홍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홀리가 보지 않는 사이에.
그녀가 아는 곳은 수련 장소라고 짐작되는 곳이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너무 막연하여서 그곳이라도 가볼 생각이었던 거다.
“이리저리 돌려까지 말고 그냥 말해. 안내해줘?”
주객이 바뀌었다.
호발귀가 홀리를 떠나보내려고 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붙잡아야 할 판이다.
홀리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지금 아쉬운 사람이 누군데 버팅기고 그래! 콱 무릎 꿇고 살살 빌 때까지 알려주지 말까 보다. 지금 내가 너 좋게 보고 있어서 봐준 줄 알아!”
홀리는 호발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당홍에게 걸어가 팔짱을 꽉 꼈다.
“언니, 나 언니 마음에 들어.”
“나? 날 왜?”
“언니 성격이 나랑 비슷한 것 같아. 그리고 언니는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내가 왜 언니야?”
“좀 봐줘. 여기서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
홀리가 당홍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만개한 장미꽃처럼 화사하게 빛났다.
거칠고 사나워서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상당한 미녀다. 듣기로는 척박한 산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얼굴에 티 한 점 없다. 살결도 보드랍기가 우유를 적신 것 같다.
‘얘 요물이네.’
당홍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홀리에게 끌려갔다.
홀리가 그녀의 팔짱을 낀채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