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九章 환산만전투(環山灣戰鬪) (4)
“도움이 될까 해서 왔어.”
도천패가 등여산을 보며 말했다.
도천패는 금방이라도 참호로 뛰어들 듯한 기세였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대도가 참호전에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한 병기를 물색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있다 가요!”
등여산이 도천패를 말렸다.
도천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만? 지금 싸움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썩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일단 저놈 발목이라도 잡아놓으면 투망을 던지기가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잠깐만요.”
등여산은 일단 도천패를 만류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생각을 집중해야 해서요. 우리 잠시만 있다가 이야기해요.”
“뭐 이래? 도와준다는데.”
당홍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따가…… 귀검이 제 목을 치려고 할 때, 그때 도와주세요. 저도 죽기는 싫으니까요.”
도천패와 당홍은 등여산의 말에서 그녀가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 끼어들지 마라!
등여산의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마저 떠올랐다.
- 지금 바쁘다! 말 걸지 마라! 싸움에 집중해야 하는 데 방해만 되잖아. 한쪽에 물러서 있어. 지금 이런 얘기를 할 시간도 없으니까 빨리 물러서라고.
“그럼 이따가……”
도천패와 당홍은 엉거주춤 물러섰다.
도와주려고 왔는데, 등여산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음자들이 죽어 나간다.
그들은 등여산의 수하다. 그러니 외인이 나서서 가타부타 말할 거리가 안 된다.
천살단과 혈천방이 싸우는데 누가 개입하나.
“고집 되게 세네. 상황도 안 좋으면서. 도와준다고 할 때 받으면 어디가 덧나나?”
당황이 기분 나빠서 중얼거렸다.
도천패가 참으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잡아서 살며시 끌어당겼다.
당홍도 도천패의 손길이 싫지 않아서 그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은 싸움을 지켜봤다.
귀검은 놀라운 속도로 참호를 뚫었다.
그는 사람은 무조건 다 벴다.
음자는 무복을 입고 있지 않다. 음자라는 신분이 원래 바깥세상에서 숨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복이라거나 특별히 눈에 띄는 옷을 입지 않는다.
음자는 한편으로는 버려진 무인들이다
천살단에서 보수를 받지만, 천살단 무인이 아니다. 천살단 중 음자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병기도 일반 병기다. 천살단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다.
음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무인이 일반인을 벨 때는 상당히 신중한 편인데, 귀검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무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환산만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쒜에에엑!
검이 흐르고 음자가 쓰러졌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 귀검을 상대할 사람이 없다. 빠름에서 절대적으로 뒤진다.
귀검은 절정 무공인 지옥유부검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아니, 검공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막무가내식으로 검을 쓰는데, 너무 빨라서 맞을 수밖에 없다.
귀검은 오직 빠름만으로 죽인다.
호발귀와 싸울 때 사용했던 검초다.
“으! 살인검!”
음자가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살인검은 특정한 검을 일컫는 게 아니다. 어떤 검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살인검은 살인하면서 터득한 검이다.
살인검을 터득하는데 무공 수련 여부는 상관없다. 병기 다루는 법을 몰라도 된다. 계속해서 사람을 죽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잘 죽이는 법을 깨닫게 된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 어디를 어떻게 치면 어떻게 죽는다는 것을 배운다.
빨리 죽이려면? 고통스럽게 죽이려면? 숨 한 가닥만 남겨 놓으려면?
온갖 방법을 다 배운다.
이렇게 실전을 통해서 터득한 검법은 정형이 없다. 초식이 없다. 오직 강하거나, 빠르거나 둘 중 하나다.
귀검이 사용하는 검법이 살인검이다.
음자가 펼치는 무공도 거의 살인검이다. 그래서 귀검의 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런 검법을 상대하는 방법도 빠삭하게 꿰고 있다.
빠름에서 뒤질 때 어떻게 싸우나?
방법이 없다. 칼에 맞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냥 맞기는 억울하고, 한 대씩 사이좋게 나눠 맞는 게 좋겠다.
음자는 그런 의지를 담아서 공격했다.
쳐! 맞을게, 쳐! 어차피 항복해도 죽일 거잖아. 그러니 쳐! 하지만 나도 한 방 먹일 거야! 손에 칼을 들었으면 썩은 무라도 베야지. 내 목숨을 가져가는 대신에 피 한 방울만 주면 돼!
쒜에에엑! 쒜엑!
양쪽 병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당하는 쪽은 늘 음자다. 차이가 나도 웬만큼 나야 비벼보기라도 하지.
타앙!
일 검에 음자의 병기가 퉁겨나간다.
퍼억!
이 검에 목숨이 떨어진다.
두 번째 검을 맞으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다. 즉사다.
당장 숨이 끊어지지 않아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거나, 사지를 빳빳하게 경직시키거나 하다가 푹 무너진다.
귀검이 즉살 검을 사용한다.
최대한 빨리 죽인다. 상대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은 아니다. 죽는다, 검에 맞았다 하는 느낌도 일으킬 사이가 없다. 탁! 치면 푹! 꼬꾸라진다.
고통 여부에는 상관없이 제일 빠르게 죽이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게 오히려 고통 없이 죽이는 방법이 되었다.
살인검 중에서도 최고의 살인검이다.
음자는 계속해서 밀렸다. 저항이란 게 무의미하다. 그저 순서를 기다렸다가 검에 맞는다.
참호는 피바다가 되었다.
백발연시포나 십참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귀검이 너무 빨라서 사용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음자는 백발연시포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한다.
두 번째 판갈이는 애당초 불가능하고, 처음 재워놓은 화살 백 대를 쏘아내는 게 고작이다.
십참망도 쓸모가 없어졌다.
십참망은 십방진이라는 진법을 잘 알고 있어야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음자는 십방진을 모른다.
십 방을 구성한 음자 중 한두 명이 쓰러지면 당장 구멍이 뻥 뚫린다. 십방진을 모르기 때문에 흠집을 메꾸지 못한다. 투망을 던진다 한들 빈틈이 숭숭 뚫렸다.
“전멸은 기정사실이야. 지금이 아니면 도와줄 틈도 없어. 이다음은 우리 안전을 모색해야 해.”
당홍이 말했다.
도천패도 같은 생각을 했다. 아니, 그의 생각은 당홍보다 훨씬 비관적이다.
이미 도와주기에는 늦었다.
지금 바로 움막으로 물러서서 귀검이 음자를 모두 죽이고 달려올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등여산은 절박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착한 눈으로 싸움만 지켜봤다.
도천패는 등여산이 굉장히 무능해 보였다.
음자들이 모두 죽어 나갈 때까지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철수 시켜야 하지 않나? 설마 도망갈 곳도 없어서 모두 죽이려는가?
그러던 한순간, 등여산이 호각을 꺼내 짧게 불었다.
빼액!
호각 소리가 툭! 터져나갔다.
그러자 격렬하게 저항하던 음자들이 들불 만난 메뚜기처럼 참호에서 무질서하게 튀어나왔다.
후퇴다! 무조건 후퇴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살 수 있으면 살아라.
“후후!”
귀검이 가늘게 웃었다.
휘릭!
검을 허공에 휘둘러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호각 명령은 매우 간단해 보였다.
싸움은 끝났다. 음자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그러면 이제는 진짜 고수들만 남았다.
호발귀, 도천패, 홀리.
귀검은 당홍과 등여산, 해자수는 진짜 고수로 헤아리지 않았다.
두 여인은 살인검을 모른다.
비무를 하면 상당히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겠지만, 진짜 싸움터에 내놓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
해자수는 너무 약하다.
싸움을 아는 자 중에 그래도 검이나마 부딪쳐 볼 수 있는 자는 세 명뿐이다.
귀검은 잠시 주위를 쓸어봤다.
핏물이 참호 속에 흥건하다. 음자 시신들이 마구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다.
“아직 절반 밖에 못 죽였군. 서둘러야겠어.”
귀검이 중얼거렸다.
음자 모두를 죽일 생각이다. 등여산을 비롯한 환산만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
개미 한 마리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한다.
퍽!
어디선가 주먹으로 쌀가마니를 거세게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아니, 반죽이 된 밀가루를 내리치는 소리처럼 둔탁하면서도 찰진 소리였다.
그리고 숨 두어 모금 들이쉴 시간이 흘렀을까?
꾸두두둑! 투투둑!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느낌이 좋지 않은 소리였다.
무엇인가 짓이겨진다. 줄이 끊어진다. 제자리에 붙어 있지 못하고 비틀린다.
동시에 땅도 흔들렸다.
후르르릉! 꾸꾸궁! 화르르륵!
땅에 마구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환산만 전체가 마구 꿈틀거렸다.
귀검이 참호에서 신형을 뽑아내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퍼엉! 화아악! 파라라라락!
백발연시포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화살은 날아오지 않는다. 대신 하늘을 가득 덮는 아주 큰 그물이 활짝 펼쳐진 채 화르륵 덮쳐왔다.
지금까지 음자가 사용했던 투망과는 크기가 완전히 다르다. 하늘을 덮은 그물망은 투망 스무 개를 합쳐 놓은 것처럼 크다. 더욱이 사람이 던진 것도 아니다. 백발연시포에 실어서 쏘아냈기 때문에 강렬하게 거세다.
슈아앗!
귀검은 하늘로 솟구쳤다. 검으로 그물망을 찌른 후, 거세게 휘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물을 밀어내지 못했다.
촤아아악!
그물이 귀검을 덮었다. 그를 덮어씌운 채 다시 참호로 떨어졌다.
대 그물망이 땅으로 떨어지자 메뚜기처럼 튀어서 달아났던 음자들이 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그물망 끝을 잡고 어른 팔뚝만 한 쇠못을 댔다. 그리고 망치로 두들겨 박았다.
터엉! 텅텅텅! 텅!
쇠못은 금방 박혔다.
그 순간, 다른 곳에서도 움직임이 일어났다.
귀검이 지나쳐온 참호가 무너졌다. 흙벽 속에 심어놓은 화약이 터지면서 통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폭발은 참호 밖에서부터 일어나서 안으로 달려들었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귀검이 묻혔다.
폭발은 계속 일어났다. 그물망 안쪽에서 터지고 또 터졌다. 참호가 흙먼지로 뿌옇다. 흙더미가 참호를 모두 덮어버렸다. 대 그물망은 그냥 맨땅을 덮고 있다. 그물망 안쪽에서는 참호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아!”
도천패와 당홍은 너무 놀라서 입만 쩍 벌렸다.
귀검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물망이 그들 찍어 누르는 것과 참호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시간차가 매우 절묘했다. 음자들이 못으로 그물을 고정할 때, 귀검은 이미 매몰된 상태였다.
다른 길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폭발은 십방진의 형태에 맞춰서 사방 열 군데서 일어났다.
십 방이 모두 매몰되었다.!
음자는 절반이 죽고 절반이 남았다.
음자들은 모두 이런 최종 비책을 알고 있던 상태였다. 처음 죽은 절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있는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라고 뒤쪽을 맡아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까? 하지만 기꺼이 죽었다.
등여산이 하루 동안 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다독인 것이 이런 처절한 결기를 불러왔다.
빼애애액!
등여산이 호각을 또 불었다.
그러자 가죽 주머니를 든 음자들이 나타나서 주머니에 든 물을 그물망에 쏟아부었다.
치이이익!
강한 연기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피어났다.
“부시독(腐屍毒)!”
당홍이 깜짝 놀라서 소리 질렀다.
부시독은 지하 이십 장을 죽음의 땅으로 만든다.
귀검이 설혹 매몰된 땅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해도 부시독을 피할 수는 없다.
부시독에 닿으면 살이 썩는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점점 살이 썩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저, 저 여자. 무, 무섭네. 휴우!”
당홍이 도천패를 쳐다보며 큰 숨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