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九章 환산만전투(環山灣戰鬪) (3)
귀검의 싸움은 비자를 베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환산만까지는 사나흘 거리나 떨어져 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귀검과 등여산이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싸움이 시작되나?
귀검은 다르게 생각했다.
‘가자!’하고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몸을 숨겼다.
더는 고정 간자의 눈에 띄지 않는다. 비자도 찾지 못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두 눈 부릅뜨고 찾아도 찾지 못한다. 땅으로 꺼진 듯, 하늘로 솟구친 듯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귀검이 사라졌다는 보고네.”
재각주가 말했다.
‘온다!’
등여산은 즉시 상황을 감지했다.
“재각주님, 단으로 돌아가세요.”
“후우! 내가 그렇게까지 쓸모없지는 않은데? 옆에 있으면 도와줄 부분이 있을 거네.”
“누가 천하의 재각주님을 그렇게 봐요? 아네요. 재각주님은 저보다 단주님께 필요한 분이세요. 천살단 모든 식구를 위해서 돌아가주시라는 거예요.”
“음! 여기도 사정이 급하잖나?”
“귀검은 여기서 죽어요. 제가 반드시 잡아요. 하지만 굉장히 위험해요. 재각주님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요. 제 말, 아시죠? 절대 재각주님을……”
“알지, 알지.”
재각주가 미간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등여산이 말했다.
“음자들…… 태반이 여기서 죽을 거예요. 저 사람들한테 약속한 게 있으면 반드시 지켜주세요.”
“항상 그랬네. 걱정하지 말게.”
“남은 가족들, 꼼꼼히 살펴주시고요.”
“왜 마지막처럼 말하나. 그런 건 돌아와서 같이 해야지.”
“네.”
등여산이 활짝 웃었다.
등여산은 음자 칠십 명을 일일이 만났다.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요.”
“죽는 자리가 따로 있나요. 어디서든 운 나쁘면 죽는 거죠.”
“왜 음자 일을 택했어요?”
“이만한 일이 없었으니까요.”
“보수가 많아서요?”
“아뇨. 보수도 넉넉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죠.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한데, 싸우는 일이 짜릿해서요. 저는 음자가 아니면 혈천방 마인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싸우는 게 좋아요?”
“싸우는 것보다 살인이 좋다고 해야겠죠. 하하! 놀라셨죠? 그래서 아까 말했잖아요. 음자가 아니면 혈천방 마인이 되었을 거라고. 세상에는 우리 같은 인간도 있어요.”
“살인이 좋다는 건, 살인 충동?”
“네. 음자는 살인을 당당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살인 충동을 일으켜서 살인하는 자를 살인귀라고 한다. 살인마, 악마라고 한다.
등여산은 문득 호발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살인을 많이 하는 자가 혈마라고.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귀검인데, 겁나지 않아요?”
“여기 오는 순간부터 오늘내일 사이에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죠.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꼭 이 자리에서 죽을 거니까요.”
“부탁해요. 죽지는 말고요.”
“소저, 감사합니다.”
음자가 진정을 담아 인사했다.
등여산은 모든 음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에게 사정했다. 부탁했다. 명령만 내리면 되는데 마음을 담아서 간절히 부탁했다.
왜 귀검을 죽여야 하는지도 말했다.
단지 살단 총주의 복수 때문에 죽이려는 게 아니다. 귀검은 앞으로도 천살단 무인을 상당히 많이 죽일 사람이다. 요행히 죽일 기회를 잡았으니 지금 죽이고자 한다.
이곳에 있는 사람이 모두 죽는다면 칠십 명이 죽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귀검만 죽인다면 대성공이다. 귀검은 앞으로 칠백 명, 칠천 명을 죽일 수 있는 마인이다. 검공이 하늘에 닿은 검신이지 않은가.
등여산은 음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말했다. 두 명, 세 명이 모여있으면 다 같이 둘러앉아서 잡담하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결혼은 안 합니까?”
“해야죠.”
“좋아하는 사람은 있고요?”
“글쎄요? 호호!”
“자네 뭘 그런 걸 물어봐. 아직 몰랐어? 우리 책사님, 검벽주님하고 그런 사이야.”
“아! 그 말은 들었는데, 정말이에요?”
“아뇨. 검벽주하고는 친한 친구에요.”
“친구가 연인이 되고, 연인이 내외가 되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가요?”
“돌아가시면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친구에서 연인으로 갈 때는 누군가 용기를 내야 해요. 고백한다거나, 언질을 준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속 친구죠, 뭐.”
“알았어요. 생각해볼게요.”
음자들은 등여산의 신상에 대해서도 편하게 말했다.
등여산은 낯선 사내들을 단 하루 만에 가까운 지인으로 만들었다.
음자들은 재각주보다 등여산을 더 가깝게 생각한다. 재각주를 위해서 죽으라면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등여산이 죽자고 하면 죽을 것이다.
음자는 등여산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안다.
모두 이 자리에 뼈를 묻는다!
음자들의 결기가 하늘을 찔렀다.
“온다!”
“오고 있어!”
도천패와 홀리가 동시에 말했다.
두 사람은 같이 말을 하고, 서로가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두 사람이 동시에 침입자를 찾아냈다.
“동남쪽 골짜기.”
도천패가 홀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랑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물소리가 들려.”
홀리도 도천패를 쳐다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같은 소리를 들었다.
청각으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두 사람만 들었다.
“언젠가 당신과 한번 붙어봐야겠어.”
홀리가 말했다.
“나랑 붙은 놈들은 다 죽었어. 죽고 싶다는 놈들, 말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 죽고 싶으면 언제든지.”
도천패가 씩 웃었다.
“가만…… 두 사람은 듣는데 왜 호발귀는 가만히 있지? 운공 중에는 아무 소리도 못 듣나?”
해자수가 호발귀를 쳐다봤다.
소리가 들리기 전, 호발귀는 좌정을 한 채 운공 중이다. 등여산과 만난 후부터 온종일 운공만 한다.
홀리는 당장 호발귀 옆에 앉아서 운공했다.
호발귀에게 맞은 배가 아직도 아파서 운공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운공하는 자세만 취했을 뿐, 눈길은 호발귀를 뜨겁게 주시했다.
호발귀는 운공을 중단하고 눈을 떴다.
‘귀검!’
호발귀는 한 번 싸운 적이 있는 귀검을 떠올렸다.
귀검은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소리를 내면서 달리는데 눈치채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지. 자, 공격할 놈이 있으면 공격해 봐. 일단 너희에게 선수를 양보하지.
귀검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 들려!”
당홍이 뒤늦게 귀검의 기척을 잡아냈다.
퍼엉! 타타타타탁!
갑자기 화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콩 볶는 소리가 울렸다.
백발연시포가 터졌다. 혈천방 무인들이 호발귀에게 쓰려고 가져온 시포가 귀검을 향해 쏘아졌다.
몇 발이나 날아갔는지 대충 짐작된다.
화살을 헤아릴 수 없지만, 화약통이 폭발하는 소리는 십여 번 울렸다.
대략 천 대가 쏘아졌다.
꿰에에엑! 꾸와아악!
멧돼지, 노루, 염소 등 온갖 짐승이 울부짖었다.
짐승도 화살 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강시 천여 대라면 사방 이십 장을 뒤덮고도 남는다.
웬만한 사람은 고슴도치가 되었을 것이다.
귀검은 당하지 않았다. 백발연시포가 터졌는데도 달리는 속도가 변하지 않았다.
쒜에에엑!
검이 허공을 가른다. 사람을 벤다. 꾹 눌러 참는 듯한 비명이 연신 터진다.
“음!”
도천패는 침음했다.
소리만 듣고도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음자는 지리적 이점과 백발연시포를 사용한다. 대단한 우위다. 그런데도 형편없이 밀린다.
혈천방 무인들은 참호를 파고 안에 숨었다. 이동할 때도 바깥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서 비밀 통로를 만들었다. 밖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통로다.
귀검은 그 통로로 스며들었다.
통로를 이용하면 화살을 막으면서도 음자를 쉽게 칠 수 있다. 이동하기 편하라고 만든 통로가 음자를 죽이는 최대 악물(惡物)로 돌변했다.
귀검이 환산만에 이동 통로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사전에 와보기라도 했나?
아니다. 귀검은 와본 적이 없다. 이곳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원래 귀무살 귀문은 교두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설치한다. 위치선정에서부터 수련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교두 단독으로 설치하고 운영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귀문이 폐쇄될 때까지 완벽하게 비밀 유지된다.
단언컨대 귀검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귀검은 마치 자신이 통로를 설치한 것처럼 능숙하게 이동하고 있다.
이것이 귀검의 능력이다.
귀검은 전문적인 살수다. 귀무살부터 시작해서 교두를 넘어 귀무령까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참호와 통로쯤 발견하지 못할까? 백발연시포를 효율적으로 피하는 방법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쒜에에에엑! 퍼억! 퍽!
검이 바람을 가른다. 음자를 죽인다.
“십참망(十塹網)!”
날카로운 여인 음성이 들렸다.
등여산은 근접전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다. 참호가 깨질 줄은 몰랐고, 다만 귀검이 바짝 달라붙어서 시포를 쏘아낼 틈조차 없게 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대비한 것이 십참망이다.
열 명이 투망을 던진다. 투망에는 철침이 박혀 있어서 걸려들기만 하면 피투성이가 된다.
열 명의 위치는 십방진(十方陣)에 따른다.
등여산은 음자에게 십방진을 알려주지 못했다. 십방진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진법이 아니다. 능숙하게 펼치려면 최소한 반년 이상 손발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열 명의 위치는 선정해 줄 수 있다.
열 명이 각기 정해진 위치에서 투망을 던지면 사방 십 장이 완전히 갇힌다. 귀검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투망에 덮인다. 그런데!
슛! 퍽!
귀검이 죽은 음자를 발로 걷어차서 십참망으로 던졌다.
촤아아악!
투망은 죽은 음자를 덮어씌웠다.
귀검이 뒤에서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료의 시신을 잡아챌 수밖에 없었다.
슈웃! 퍽!
귀검이 투망에 휘감진 시신을 발로 밟고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뚝 떨어졌다.
“크윽!”
투망을 던지던 음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순간,
퍼엉! 타타타타타탁!
귀검을 노리고 백발연시포가 터졌다.
귀검이 허공에 뜨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쏘아냈으니 피할 틈이 전혀 없다.
순간, 귀검은 검 끝으로 투망을 걷어냈다. 검을 크게 휘둘러 강시를 막았다. 검 끝에 매달린 투망이 강시 백여 대를 낙엽 쓸 듯이 쓸어냈다.
귀검은 다시 참호로 파고들었다.
쒜에에에에엑! 퍼억!
음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일부를 병기를 휘둘러 보기도 했지만, 워낙 차원이 다르다. 귀검이 호랑이라면 음자는 하위동물인 개나 노루도 아니고 아예 굼벵이다.
“이거 아무래도 도와줘야겠는데. 안 갈 거야?”
도천패가 말했다.
호발귀는 침묵했다.
“이런 식으로 싸우면 전멸하는 건 시간 문제야. 누구든 귀검을 붙잡아 놔야 해. 그래야 십참망을 쓰든 시포를 쓰든 하지. 귀검을 붙잡아 놓지 않고는 안 돼.”
도천패가 침중하게 말했다.
“우리 싸움은 아니지만 가서 도와줘야겠다. 괜찮지?”
도천패가 물었다.
호발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홍이 즉시 일어섰다.
“네가 가면 나도 가야지. 바늘 가는 데 실이 안 갈 수 있어? 같이 가. 내가 뒤에서 도와줄게.”
“당매가 도와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거지. 하하! 그래, 좀 도와줘.”
도천패가 당홍을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