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九章 환산만전투(環山灣戰鬪) (1)
호발귀는 혈마가 될 것 같지 않다.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는다. 멀쩡하다. 안색도 매우 편안해지고,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모두 헛발질했다.
호발귀를 환산만으로 데려온 광저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호발귀를 혈마로 만들고자 살인을 유도했던 홀리 역시 단단히 헛발질했다.
모두 계획이 틀어졌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정말 괜찮은 거야?”
등여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아.”
호발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는?”
“뭐?”
“동굴에서의 그거.”
“아! 괜찮아.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일 다시는 안 생길 것 같아.”
“아! 잘 됐다!”
등여산이 활짝 웃었다.
순간, 호발귀는 등여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백합이 활짝 피었다. 하얀 얼굴에 노란 웃음이 걸렸다.
이 여자, 아름답다.
백합의 꽃말은 순결이다. 이외에도 순수한, 깨끗한,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말도 포함한다.
등여산이 그런 여자다.
실제로 등여산이 그런 여자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등여산과 깊은 교분을 맺은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호발귀 눈에는 그런 여자로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혈마 무공을 쓰는 한, 항상 혈마가 될 위험이 있잖아? 혈마 무공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괜히 나 마음 편하라고 말하는 거 아냐?”
“내가 혈마가 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
“……!”
등여산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말을 했나? 아! 했구나. 혈마가 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다는 뜻으로 말했구나.
내가 호발귀를 걱정하고 있나? 혈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정도 무림을 위해서. 그래, 정도 무림을 위해서 걱정하는 거야. 그런 거야 당연하지.
“당연하지. 혈마가 되면 우리 적이 되잖아. 혈마, 되지 마.”
“자신 없어.”
“뭐? 방금은 혈마가 되지 않는다고 했잖아?”
“혈마가 되지 말라는 말, 못 들어줄 것 같아. 지금 말하는 게 이백 년 전에 있었던, 정신을 잃고 살인을 저지르던 혈마라면 그건 안 될 자신이 있어.”
“다른 혈마도 있어?”
“혈마라는 게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게 혈마 아냐? 살단 총주도 혈마, 귀검도 혈마, 나도 혈마. 난 지금도 혈마인 것 같아. 이미 혈마가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안 되나.”
“그렇구나. 호호! 그럼 우리 모두 혈마네?”
“책사는 아니지. 솔직히 사람 죽여본 적이나 있어? 내가 보기에는 없을 것 같은데?”
등여산은 책사라는 호칭에 거리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직함으로 부를 때는 당연하다는 듯이 들었는데, 호발귀가 직함을 부르니 왠지 섭섭하다.
“앞으로도 힘든 싸움을 해야지?”
“해야지.”
“많은 사람을 죽일 거고.”
“그럴 거야.”
“좋아. 그런 혈마는 봐줄게. 내가 말하는 혈마, 알지? 그 혈마만 되지 마.”
두 사람은 산길을 걸으며 담소를 나눴다.
산에는 음자들이 경계를 섰다. 혈천방 무인들이 숨어있던 자리에 음자가 대신 들어섰다.
그들은 호발귀와 등여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호발귀는 대체 어느 쪽인가? 정도인가, 마도인가?
호발귀는 살단 총주의 가슴에 창을 찔러 넣었다. 분명히 살천단과 싸웠다. 또 혈천방 마인을 가차 없이 죽인다. 시신 백여 구를 남겨 놓기도 했다.
호발귀는 정사마 어느 쪽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호발귀는 정사마 외 일(一)이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호발귀는 자신을 건드리는 자는 모두 공격한다. 누가 되었든 사정 봐주지 않고 친다. 단순히 겁만 주는 것도 아니다. 무자비하게, 확실하게 죽인다.
어쨌든 천살단의 보물이 호발귀같이 마공을 수련한 놈과 같이 거닌다는 게 못마땅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혈천방이 상당히 조심했을 텐데.”
“마부.”
“마부가 누군데?”
“육 비자.”
“아!”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살단 모든 정보는 비보전에서 관장한다. 당연히 십육비자도 비보전 소속이다.
그들 십육비자는 특별한 일에 투입된다.
이번에도 특별히 투입되었다. 살단 총주가 호발귀를 쫓는 순간부터 혈천방에 숨어들어 암약했다.
등여산이 그 정보를 얻은 것이다.
등여산은 비보전주로부터 육비자 소식을 들은 후, 육비자가 전한 소식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천살단 내에도 혈천방 수족이 있다. 그가 누군지 모른다.
완벽한 차단만이 완벽한 성공을 가져온다.
특히 이번 일은 귀검을 척살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육비자의 존재는 그만큼 중요하다.
비보전주와 등여산, 그리고 천살단주만 아는 비밀이 생겼다.
마부는 호발귀는 환산만까지 실어 왔다. 그리고 그 정보가 천살단으로 날아갔다.
귀검이 환산만으로 온다는 정보는 없다.
십육비자가 부지런히 귀검을 쫓고 있지만, 환산만으로 방향을 돌린다는 소식은 없다.
등여산은 그래도 귀검이 환산만으로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호발귀가 환산만에 있기 때문이다.
“귀검을 죽여서 살단 총주의 복수를 하려고?”
“맞아.”
“그러니까 귀검이 여기로 올 거라는 거지?”
등여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검을 죽여? 안 돼. 못 죽여. 오히려 책사가 당한다.’
호발귀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등여산은 귀검의 무공을 보지 못했다. 귀검의 검공은 신에 가깝다. 그는 검신이다. 그를 죽이려고 했다가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되려 죽는다.
그를 죽일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서면 되는데……’
그렇다. 자신이 나서면 된다.
자신이 나선다고 해서 귀검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 깨달은 혈마 무공이라면, 손잡이를 제대로 잡은 무공이라면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호발귀가 말했다.
“최근…… 새로운 무공을 깨달았는데, 써보고 싶어서. 귀검, 내가 먼저 상대해야겠어.”
“나 도와주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도 좋고.”
“그때 그 일 때문에 도와주려는 거라면 안 해도 돼. 참! 그 일, 그만 잊어. 우리 아무 일도 없었잖아. 우리 서로 그때 일은 잊는 게 좋겠어.”
등여산이 담담히 말했다.
‘잊을 수 없어. 그 일을 잊으면 책사마저 잊어야 할 것 같으니까. 난 마인, 책사는 천살단. 가는 길이 다른데, 그만한 인연이라도 없으면 만날 일도 없잖아.’
호발귀는 담담히 등여산을 쳐다봤다.
‘잊으라고 했지만 정작 내가 못 잊을 거야. 그런 일을 어떻게 잊어. 평생 기억날 건데. 혈마만 되지 마. 혈마만 되지 않으면 어떻게든 뒤를 막아줄게.’
등여산이 차분한 눈으로 호발귀를 봤다.
“우리는 이만 가죠? 볼 일도 다 끝난 것 같은데.”
해자수가 말했다.
“누가 볼 일이 없대!”
홀리가 해자수를 노려봤다.
“아이고! 무서워라. 왜 또 이렇게 갑자기 표독스러운 살쾡이가 되셨을까. 아! 그 책사라는 그 여자, 등여산 때문에 그렇구나. 이쁘장하게 생겼던데.”
“이쁘게는 뭐가 예뻐!”
홀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입은 찢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솔직히 뭐 이쁘기는 하지. 거기다가 성격도 온순한 것 같고, 머리도 똑똑하고, 얼굴까지 예쁘고, 몸도 날씬하고. 아이고야.”
“뭐야!”
“아씨는 툭 하면 성질이지. 툭하면 칼 뽑지. 아이구야.”
“안 되겠네. 오늘 피 좀 봐야겠네.”
홀리가 칼을 잡아갔다.
“아니 뭐 그렇다는 거지. 그걸 가지고 또 뭐 칼까지 뽑으려고 하시고. 나도 사낸데 말할 건 말하고 살아야지. 솔직히 이런 거는 이해해줘야지 뭐. 같은 밥을 먹는 처지에.”
해자수는 중얼중얼 구시렁거리면서 슬쩍 자리를 피했다.
“나, 한 수만 가르쳐줘.”
스릉!
홀리가 다짜고짜 칼을 뽑았다.
“음문 사람들, 내 앞에서 칼 들면 죽인다고 했는데.”
“죽여도 좋아. 정말이야. 솔직히 우리 음문, 혈마를 조정한다는 희망 하나로 살아왔어. 혈천방 놈들, 우리만 보면 이유 없이 죽여. 천살단도 마찬가지야. 개처럼 이리저리 숨어다니면서 오직 하나 혈마가 나타나기만 기다렸어. 그런데 네가 혈마가 안 된다면 우린 좌절이야. 어때? 죽는 게 낫지?”
츠읏!
호발귀는 홀리의 전신을 훑었다.
홀리가 일으키는 진기를 감지하고, 진기의 흐름만으로 어떤 무공을 펼칠지 예측했다.
며칠 전만 해도 눈에 보이지 않던 흐름이 확연히 보였다.
같은 혈마 무공이기 때문에 보인 것이다. 이령귀화나 역천금령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혈천도법만큼은 거의 비슷한 경맥으로 운용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다르다. 중원 대부분의 무공처럼 음문도 생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단전 진기를 활용하는 데서 그친다. 원정까지 파고들지 않는다.
‘칼날을 잡고 있다.’
호발귀는 옆에 있는 나무에서 가지를 꺾었다.
툭!
나뭇가지가 힘없이 꺾었다.
호발귀는 잔가지를 잘라내서 기다란 몽둥이를 만들었다.
홀리와 싸울 생각은 없다. 하지만 홀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알려주고 싶었다.
역천금령공으로 원정을 잡는다. 어둠을 잡는다. 이령귀화, 불꽃이 밝음 속으로 뛰쳐나간다.
츠으으읏!
몽둥이에 진기가 운집되었다.
이령귀화의 진기가 투입되자, 딱딱한 몽둥이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다른 사람 눈에는 여전히 몽둥이일 뿐이다. 하지만 몽둥이를 대하고 있는 홀리에게는 뱀처럼 보인다. 이령귀화의 생기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반칙이다. 혈마 심공으로 운용되는 혈천도법과 생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혈천도법은 완전히 다르다. 똑같은 초식을 펼쳐도 위력이 천양지차로 갈린다.
“혈신삼분.”
호발귀가 잔잔하게 말했다.
츠으으읏!
몽둥이가 홀리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빠르지도 않고, 변화도 없다. 일직선으로 곧장 쏘아갔다. 그런데,
“아!”
홀리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다. 칼을 든 채 멍하니 몽둥이를 쳐다봤다.
홀리의 눈에는 쌍두사(雙頭蛇)가 보였다.
몽둥이가 위와 아래, 두 개로 갈라졌다. 호발귀는 몽둥이 하나를 들고 있는데, 몽둥이 끝이 두 개로 갈라져서 입을 쩍 벌린다. 그리고 각기 다른 곳을 공격해 온다.
공격점은 목과 허리다.
둘 다 실초다. 실초이기 때문에 변화도 일어난다. 어설프게 막으면 재빠른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고, 몸이 세 조각으로 잘릴 것이다.
슷!
호발귀가 몽둥이를 멈췄다. 그리고 잔잔하게 말했다.
“이것이 진짜 혈천도법이야. 흉내만 내는 혈마 무공으로는 절대도 만들 수 없는.”
“아!”
홀리가 나직이 탄식했다.
“나, 혈마 안 된다. 어떤 식으로 혈마를 조종하는지 몰라도 난 이미 벗어난 것 같아.”
“……”
홀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음문이 해온 일도 안다. 혈마를 기다릴 수 없어서 직접 혈마를 만들 생각이었겠지. 혈천도법을 보니 그런 냄새가 풍겨. 한 가지 단언하자면, 세상 무공으로는 이백 년 전 혈마를 만들지 못해.”
호발귀는 생기에 관한 부분은 말하지 않았다.
음문이라면 혈마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짓도 할 것이다. 생기를 알게 되면 당연히 그쪽 부분을 연구할 것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호발귀가 말했다.
“악심 품은 사람이 옆에 있는 것처럼 불편한 건 없지. 혈마가 되기를 고대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좋지 않고. 예전에 했던 말, 여전히 유효야. 음문 사람들, 내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
호발귀가 몽둥이를 버리고 돌아섰다.
‘정말로…… 혈마에서 벗어났어.’
이건 직감이다. 오랫동안 혈마를 고대해 온 사람만 알 수 있는 느낌이다.
호발귀는 떠나라고 했지만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점점 마음에 들어. 혈마로 조정할 수 없다면 내 남자로 조정하면 되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남자를 만났네. 좋아, 내 인생 이 남자에게 건다!’
홀리는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호발귀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