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八章 재회(再會) (5)
“이런! 빌어먹을!”
광저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다. 평생 이토록 재수가 없는 날도 찾기 힘들다.
간밤에는 수하 백여 명이 도륙당하더니, 아침에는 한 명 남김없이 모두 죽었다. 더 재수가 없는 것은 수하들이 죽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거다.
“허!”
나오느니 탄식뿐이다.
밑에서 치고 올라왔다면 모를 수 없다. 첫 살인이 일어난 직후, 바로 알았을 것이다.
이놈들은 뒤통수를 치면서 내려왔다.
“기가 막히네. 그 절벽을 기어 올라왔다는 거야?”
광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끔뻑거렸다.
혈천방은 언제나 매우 험난한 곳에 둥지를 튼다.
환산만도 난공불락의 요새다. 사면 중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벽호공에 능한 자들 스무 명에게 탐사를 시켰는데, 모두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환산만은 절벽 자체를 기어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경계병을 세울 필요도 없다.
그래도 경계서는 자를 세워두기는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부터 치고 내려왔다.
살수 솜씨도 대단히 좋다.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는데, 매우 은밀하고 빠르다. 소리 없이 사람을 죽이는 솜씨가 거의 달인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다.
광저가 수하들의 죽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그는 다가오는 중년인을 노려봤다.
“누구냐? 어차피 나도 죽일 모양인데, 어떤 놈에게 죽는지 알고서 죽자.”
“살천단 재각주.”
“재각주? 재각? 돈 관리하는 재각? 하!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네. 재각주라면 문사(文士)로 생각했는데, 살수 두목 노릇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광저가 툴툴거렸다.
광저뿐만이 아니라 무림 전체가 속고 있다. 살천단 재각주에게 음자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살천단은 지독히 특출한 비밀 병기를 가지고 있다.
스릉!
광저는 칼을 뽑았다.
수하들을 모두 죽인 놈들이니, 자신도 죽일 것이다. 하지만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와! 와서 내 목 따가!”
광저가 칼을 들어 올렸다.
한데, 재각주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네가 귀무령 칠두(七頭)라는 건 알아. 칼을 아주 잘 쓴다지? 좋아. 내가 졌어. 하지만 널 살려 보낼 수는 없으니까, 이 싸움은 이 사람들에게 맡기려고.”
재각주의 말이 끝나자, 음자 여섯 명이 일제히 앞으로 나왔다.
재각주는 귀무령 칠두, 귀무령의 사부조차 상대하지 않는다. 칠두의 죽음을 수하에게 맡긴다.
무인답게 죽이지 않는다. 이리저리 물어뜯겨서 죽는 들개로 만들려고 만다.
모욕적인 죽음이다.
살천단과 혈천방은 항시 처절하게 싸워왔다. 서로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다. 더욱이 지금은 살단 총주가 당했다. 감정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다.
상대방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할 만큼 마음이 넉넉하지 않다.
“후후후! 후후!”
광저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등여산은 움막으로 걸어갔다.
호발귀는 움막에 있다. 그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혈천방 무리하고 뭘 하는 것인가? 설마 살단 총주가 죽는 일에 개입한 것은 아니겠지? 아냐. 그럴 리 없어.
만약 그랬다면 그녀라도 끼어들지 못한다.
정말 그랬다면, 최악이다. 호발귀는 영원히 천살단 적이 된다. 천살단이 멸문하지 않는 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호발귀와 혈천방은 앙숙이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는 관계다.
그렇게 놓고 보면 같이 붙어 있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더욱이 같이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밥을 먹는다.
무슨 일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박! 사박!
그녀는 천천히 산길을 내려갔다.
음자들이 조용히 길을 비켜주었다.
음자는 천살단 책사를 처음 본다. 음자는 중원에 퍼져있기 때문에 천살단 사람을 만날 일이 없다.
그래도 그들은 등여산을 알아봤다.
환산만 절벽에서 골짜기를 향해 걸어 내려올 사람이라면 천살단 사람밖에 없다. 다른 때는 혈천방 무인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오직 천살단 무인만이 그럴 수 있다.
더욱이 여자이면서, 고수다. 행동이 단아하고, 피부가 유리처럼 깨끗하며 아름답다.
당장 등여산이 떠오른다.
음자는 발길에 차이지 않도록 돌멩이까지 치웠다.
그녀는 음자들에게 묵례를 보내며 걸었다.
수고했어요.
고맙다는 말이 언어 대신 행동으로 전해졌다.
“저……”
음자 한 명이 길을 막았다.
“혈천방 무인들을 정리하면서 이상한 주검을 찾았습니다.”
“이상한 주검요? 재각주님께 보고하시죠.”
“재각주님께는 말씀드렸습니다. 재각주님께 말씀 들으시겠지만, 그래도 빨리 듣고 싶으실 것 같아서……”
음자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등여산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아무 건더기나 붙잡고 말을 걸어왔다.
천살단에 있다 보면 이런 경우가 왕왕 있다.
등여산은 흔쾌히 말을 받아주었다.
“이상한 주검이라니, 뭐죠?”
“네! 그게 내려오다가 시신을 발견했는데, 모두 백여 구쯤 됩니다. 사인은 한결같이 심장에 검을 찔렸고요. 단 일격에 즉사했습니다. 상당한 솜씨던데요?”
“그래요?”
등여산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한 사람 솜씨던가요?”
“저희는 그렇게 봤습니다.”
“네에……”
등여산은 말끝을 흐렸다.
혈천방 무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혈천방 무인을 죽였다. 백여 명이나 죽였다.
이 주검은 어제오늘 사이에 만들어졌다.
누군가가 음자가 습격하기 전에 혈천방 무인들을 죽였다. 아주 고절한 솜씨로.
‘그 여자!’
등여산은 호발귀와 함께 움직인다는 홀리라는 여자를 떠올렸다.
단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수법은 전형적인 음자 술법이다. 호발귀는 아니다. 도천패도 아니다. 당홍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그 여자밖에 없다.
‘그 여자가 왜?’
“알았어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등여산은 무인에게 묵례를 보낸 후, 움막을 향해 걸었다.
“저 여자는!”
도천패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누구? 저 여자 알아?”
당홍이 눈꼬리를 상큼 추켜 뜨며 말했다.
“알지. 천살단 책사야. 이름은 등여산. 역시 천살단이었네.”
도천패가 피식 웃었다.
방금, 움막 앞에서 살인이 벌어졌다.
움막을 지키던 혈천방 무인 십여 명이 은밀히 다가온 음자에게 살해당했다.
혈천방 무인들은 맥을 쓰지 못하고 피식피식 쓰러졌다.
음자의 살인 수법은 대단히 정교했다. 뱀처럼 소리 없이 기어 와서 단번에 확 물어뜯었다.
혈천방 무인들은 몸에 칼이 꽂힐 때까지, 누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칼이 몸을 쑤신 다음에야 고개를 돌려서 상대방을 봤다.
움막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기척을 감지했다.
도천패가 알아챘고, 당홍도 눈치챘다. 홀리도 알았다.
그들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곳에서 혈천방을 암습하는 무리라면 딱 한 곳, 천살단밖에 생각나는 곳이 없다.
천살단이다.
그런데 천살단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혈천방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데…… 모두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깥 동정을 살피는 중이었다.
“저 여자를 어떻게 알아?”
“나와 엮인 것은 아니고 호발귀와. 말하자면 사연이 길어. 나중에 말해줄게.”
도천패가 당홍을 다독였다.
“호발귀와? 그럼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너만 엮이지 않으면 아무래도 괜찮아.”
“하! 책사하고 나하고 나이 차이가…… 이거 아무래도 병인데. 의부증 초기 증상이야.”
“뭐!”
“그러나저러나 천살단이 단단히 독기를 품었나 보네. 여기를 몰살시킨 걸 보면.”
도천패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때. 등여산이 문을 밀치며 들어섰다.
그녀가 들어서자 도천패가 활짝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저, 처음 뵙겠습니다. 도천패라고 합니다.”
“처음이라뇨. 전에 봤잖아요. 아! 우리, 정식으로는 처음인가요? 제가 호발귀와 있을 때는 동굴만 지켜주셨으니까.”
“알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아!”
등여산은 움막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움막을 쫙 훑었다. 호발귀를 찾는 것이다. 그러다가 말을 하는 중,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호발귀를 찾아냈다.
“저 사람, 왜 저래요?”
“글쎄, 저희도 이유를 몰라서…… 어젯밤에 밖에 나갔다 온 후로는 계속 저러고 있으니.”
도천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젯밤요?”
“네.”
‘이 사람이야!’
등여산은 혈천방 무인들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홀리라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호발귀였다. 호발귀가 무인 백여 명을 죽였다. 그답지 않게 거친 칼을 쓰지 않았다. 지극히 은밀한 살수 검을 썼다.
사박! 사박!
그녀는 호발귀에게 걸어갔다.
“맥이 막혔어.”
홀리가 말했다.
등여산이 홀리를 쳐다봤다. 홀리도 등여산을 쳐다봤다. 두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음문이 공격당한 거 알아요?”
등여산이 말했다.
“알아. 그래도 살 사람은 다 살아. 죽은 사람은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고.”
“음문이 공격당한 일보다 혈마가 중요한가 봐요?”
파팟!
홀리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쏘아졌다.
“호호호! 천살단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단박에 날 알아보지를 않나, 내가 혈마를 잡으러 온 것도 알아내고. 그러면 혈마가 내 수중에 떨어지는 것도 막지 못한다는 거, 알겠네?”
등여산은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그녀가 음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움막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 이름이 홀리라는 것만 알았지, 어디 사람인 줄은 몰랐다.
그녀의 칼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녀의 칼에는 무수한 도흔이 새겨져 있다. 일부러 칼로 칼집에 손상을 낸 자국인데, 쓰러트린 적의 숫자를 새겨놓았다. 도흔만 헤아려보면 그녀가 몇 명을 죽였는지 알 수 있다.
그녀만 그런 흔적이 있다면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해자수도 그런 칼을 차고 있다. 칼의 종류는 달라도 손잡이에 칼자국을 새겨놓은 것은 같다.
음문의 버릇이다.
등여산은 그제야 이들이 누군지 알았다. 왜 호발귀 곁을 쫓아다니는지도 알았다.
음문이 중원 무림에 나온 것은 당연하다. 혈마 무공이 돌아다닌다는 소문만 들려도 당장 쫓아 나오는 사람들이다. 하물며 혈마 전인이 돌아다니니 나오지 않을 리 없다.
등여산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무엇을 긴장했나? 왜 긴장감이 풀리나? 왜 기분이 이유 없이 상쾌해지나.
사박! 사박!
그녀는 호발귀에게 걸어갔다.
“내가 살펴봤어. 맥이 막혔다고. 함부로 진기를 불어넣으면 곤란해. 겉에서만 살펴.”
홀리가 경고했다.
등여산은 살짝 손을 내밀어 맥문을 짚었다.
그때, 호발귀가 눈을 떴다. 그리고 태연히 말했다.
“오랜만이야.”
“앗! 깜짝이야.”
등여산이 놀란 눈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엇! 깨어났네?”
“아!”
여기저기서 경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괜찮고. 아직 혈마가 안 됐고. 기혈은 정상적이고. 여기는 강하 귀무살 두 명을 죽이러 왔고.”
호발귀가 등여산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얼굴 보니까 좋네.”
“깜짝이야. 오늘 여러 번 놀래키네?”
등여산이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