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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89화 (89/500)

第十八章 재회(再會) (4)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해자수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잘못된 건데?”

도천패가 급히 물었다.

호발귀는 의식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외부와 소통하는 문을 모두 닫아걸었다.

눈이 있으니 보이지 않는 듯하다. 손을 휘저어 바람을 일으켜도 눈썹을 깜빡거리지 않는다.

귀도 닫았다. 무슨 말을 해도 대꾸가 없다. 말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듣지 못하는 것 같다. 입을 귀에 대고 소리를 빽 질러도 꿈쩍하지 않는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니 말할 것도 없다.

호발귀는 자폐아처럼 자신만의 정신세계에 갇혀 버렸다.

그는 아침에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이런 상태인지 몰랐다.

잘 다녀왔냐, 어땠냐는 물음에 대꾸가 없을 때도 말하기 싫구나 하고 지나쳤다. 온종일 움막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을 때는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무도 호발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호발귀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죽이면 안 돼.

- 파란색? 아냐. 노란색이야.

- 꽤 잘하네? 크크큭! 속임수잖아.

누가 들어도 이해하지 못 할 말들이다. 연이어 내뱉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 저러지? 미친놈처럼 혼자 중얼거리네?”

해자수가 농담처럼 말을 꺼낸 후에야 비로소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당홍이 즉각 완맥을 움켜잡았다.

호발귀는 손목을 순순히 내줬다.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듯했다.

호발귀는 외딴 섬에 갇혔다.

뭔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아무 이상도 없어요. 이럴 리가 없는데…… 이봐, 이런 일도 혈마가 되는 과정에 있어?”

당홍이 홀리를 보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좀 움직여도 돼? 꼼짝하지 말고 앉아있으랬잖아. 괜찮다면 움직이고.”

당홍이 자리를 비켜줬다.

홀리가 다가와 호발귀의 완맥을 잡았다.

그녀가 눈을 지그시 감고 상세를 살폈다.

사실 진맥은 당홍이 단연 최고다. 홀리가 하는 일은 진맥이 아니라 진기를 밀어 넣어서 내부 상황을 살피는 일이다. 혈마 무공을 알기 때문에 진기 노선을 추격하기가 쉽다.

‘응?’

홀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발귀 상태는 매우 평온하다. 역동적으로 들끓지 않는다. 최소한 역천금령공이 움직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진기가 폭포수처럼 급하게, 활화산처럼 들끓어야 하는데 잔잔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면 호발귀가 내면세계에 갇히는 일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가?

어느 한순간, 경맥을 따라가던 홀리의 진기가 딱 막혔다.

독맥(督脈)을 따라서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목 밑 도도혈(陶道穴)에서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막다른 골목을 만난 것처럼 기운이 정체된다.

홀리는 진기를 몸 앞쪽 임맥(任脈)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유유히 흐를까? 아니다. 이번에도 목 밑 화개혈(華蓋穴)에서 막혔다.

몸통은 진기로 살필 수 있는데 머리로 올라가지 않는다.

억지로 뚫을 수도 없다. 담장 같은 것으로 막아놓은 것이라면 부수고 들어가 볼 수가 있는데, 이건 벼랑을 만난 것처럼 완전히 길이 끊겼다.

‘단전을 봐야겠어.’

홀리는 진기의 방향을 틀어서 단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막혔다. 배꼽 밑 음교혈(陰交穴)에 이르자, 진기가 더 내려가지 않는다.

독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곧바로, 직접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홀리는 완맥을 놓고 일어섰다.

장심을 호발귀 머리 위에 얹었다. 백회혈(百會穴)에 손바닥을 붙이고 진기를 일으켰다.

츠읏!

백회혈을 통해서 곧장 머리로 들어간다. 머리에 있는 혈들을 살펴본다. 그런데,

터엉!

그녀는 진기를 불어넣자마자 강한 반탄력을 받고 쭉 밀려났다. 손바닥이 용수철에 퉁겨진 것처럼 붕 떠올렀다.

“음!”

홀리는 침음했다.

진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한번!’

그녀는 호발귀 등 뒤로 앉았다. 이번에는 명문혈(命門穴)에 양쪽 장심을 붙이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백회혈에서 반탄력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해서 전력을 다해 진기를 쏟아부었다.

츄아악!

거센 진기가 밀려갔다. 한데,

타앙! 퍼어엉!

홀리의 진기는 명문혈을 뚫지 못했다. 물 스며들 듯이 부드럽게 스며들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퉁겨냈다. 아주 단단한 장벽이 그녀를 힘껏 쳐냈다.

“크윽!”

그녀는 주먹으로 가격당한 사람처럼 비칠거리며 물러섰다.

호발귀는 외기(外氣)를 완전히 차단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모르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기운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홀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혈마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는 이런 증상이 없다.

‘뭔가가 잘못되었어. 어젯밤에 따라 나갔어야 해.’

무슨 일이 단단히 생겼는데,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녀는 손을 떼고 물러섰다.

“뭐가 잘못된 거야?”

도천패가 물었다.

“몰라. 이럴 리가 없는데.”

“주문인가 뭔가 하는 것으로도 안 되나? 혈마 무공에 대해서 잘 안다며?”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안 돼.”

홀리를 고개를 저었다.

* * *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순백의 화선지를 놓아야 한다.

순백은 깨끗하다.

완전한 순백은 매우 강렬한 색깔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이 순백에서부터 피어난다. 빛과 조화를 이뤄서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낸다.

무지개는 원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물방울과 햇볕이 어울리자 일곱 가지 색이 만들어졌다.

모든 색이 이렇게 창조된다.

혈마 무공에서 순백은 이화귀령이다. 이화귀령 위에 역천금령공이 탄생한다.

정말 그런가?

‘이런 제길! 이게 아니잖아!’

호발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검에 맞아 죽는 자가 생기를 피워냈다.

당연하다. 죽지 않았는데 생기가 일어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뭐가 이상한가? 죽은 후에도 생기가 존재한다면 이상하겠지만, 살아 있으니 당연하다.

생기로 생기를 쳤다.

순백으로 순백을 쳤다. 그러면 한쪽은 여전히 살아 있으니 순백이어야 하고, 한쪽은 죽었으니 생기가 사라져야 한다. 순백이 사라지고 어둠에 덮여야 한다.

호발귀가 본 것은 양쪽 모두 어둡다는 것이다.

순백은 없었다. 양쪽 모두 새카맸다.

내가 일으킨 생기도, 상대방이 일으킨 생기도 새카맸다.

처음에는 초록색과 흡사한 푸른 빛으로 봤는데, 잘못 본 것이다. 완전히 까맣다.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순백이 모든 색깔의 기본이다? 순백에서 모든 색깔이 일어난다?

아니다. 완전한 오판이다. 절대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순백이 기본이라고 생각했으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만물의 근원은 순백이 아니다. 어둠, 흙빛이다.

빛이 없으면 세상은 새카매진다.

거기에 빛이 스며든다. 비로소 흑색이 회색으로 변한다. 조금 더 밝은 빛이 스며든다. 색깔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씩, 하나씩 세상이 색깔을 드러낸다.

색깔은 빛이 없으면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빛이라는 도구가 없으면 세상은 어둠에 휩싸인다. 모든 색이 어둠에 묻힌다.

어둠이 근원이다.

역천금령공이 근원이다. 이령귀화가 원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역천금령공이 보호해야 한다.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이령귀화가 근본이 아니다. 역천금령공이 근본이다.

생기는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어둠이라는 본질을 가진 놈이 밝은 세상에서 돌아다니니까 역천이라고 부른 것이다. 어둠 속에서 금령, 금빛 영혼을 간직한 채 존재해야 한다.

역천금령공은 원정 자리에 몰아넣고, 순백의 이령귀화를 띄운다. 역천금령공으로 생기를 지키게 하고, 이령귀화로 전신 경맥을 유통한다.

역천금령공과 이령귀화의 위치를 바꾼다.

진기가 잔잔하게 흐른다.

이령귀화의 진기는 조용하다, 점잖다는 특성이 있다. 역천금령공은 활기참, 난폭함, 성급합이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난폭함으로 원정을 지킨다는 말이 상상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 정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했다. 차분한 것으로 안을 지키게 하고, 활기찬 것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자 강한 기운이 폭출되었다.

정반대로 운용하면 생기는 활기차지만, 밖으로 격출 되는 진기는 면면해진다.

조용하지만 강력한 진기가 형성된다.

문득, 참회동에서 혈마 무공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혈마 무공은 모두 여덟 개다. 다른 여섯 개는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에 붙어 있다.

쌍두사.

꼬리가 없고 머리만 둘인 쌍두사다. 몸통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해서 양쪽 끝에 머리가 달렸다. 몸통 중심을 단전에 붙이고, 양 머리가 움직인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이화귀령이 단전에 붙었다.

머리 하나가 원정을 지키고, 다른 하나가 밖으로 휘젓고 다녔다.

그 생각은 맞았는데, 양쪽 머리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역천금령공이 원정을 입에 문다. 용이 여의주를 물 듯이 원정을 입속에 꽉 문다.

그렇게만 하면 된다. 반대쪽 머리 이령귀화는 자연스럽게 전신 경맥을 휘돈다.

이령귀화가 사라졌거나, 힘이 약해졌던 게 아니다. 역천금령공에 휘둘린 것도 아니다. 둘의 힘은 똑같다. 하나를 느끼고, 다른 하나를 느끼지 못한 것뿐이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칼날을 거꾸로 잡고 휘둘렀으니 칼에 베일 수밖에 없었다. 미치거나, 음욕에 휘둘리거나, 살인 충동에 넋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진다.

칼자루를 정확하게 잡고 휘두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뭇 기대된다.

독섬칠공은 덤이다. 완전한 덤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따라붙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장진 스님이 불호를 외웠다.

스님의 불호는 사악하지 않다. 편안하다.

스님의 얼굴에 떠오른 기색도 맑고 고요하다. 언제나 그렇듯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장진 스님은 혈불, 악불이 아니다. 온전히 부처님을 모시는 평범한 스님일 뿐이다.

장진 스님이 말했다.

“세상을 얻은 기분이지?”

“이상해. 혈마는 대단한 사람 같은데, 왜 이걸 몰랐지? 계속 칼자루를 잡고 산 거잖아?”

“흑과 백은 자웅동체(雌雄同體)라고 할까? 흑이 백이 될 수 있고, 백은 흑이 될 수 있다는 걸 잊은 거지. 이 무공은 흑백 전환이 매우 빨라. 다른 무공보다 훨씬 빠르지. 그래서 요체를 쉽게 찾아내지 못해. 일단 마성에 휘감기면 그 후는 생각할 것도 없고.”

“후후!”

호발귀는 웃었다.

뜨거운 용암이 콸콸 쏟아지는 곳에 투명한 다리를 놓았다고 하자.

저기 다리가 있어. 걸어가. 안전할 거야. 이런 말을 아무리 간절하게 말해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용암 위로 발을 내딛나.

그래서 이번에는 직접 시연해 본다. 다리 위로 걸어가 본다.

봐! 여기 다리가 있잖아!

그래도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허공에 붕 떠 있는 사람이 특별한 능력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초능력? 실제로는 다리가 없는데 걷는 것이다.

그러니 팔팔 끓는 용암 위로 발을 내딛지 못한다.

그러려면 전폭적인 믿음, 완전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투명한 다리를 믿어야 한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칼자루를 올바르게 잡을 수 있다.

장진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혈마가 따로 있어? 사람 많이 죽이면 혈마지.”

“맞는 말.”

호발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는 따로 없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혈마다.

살단 총주는 혈마다. 귀검도 혈마다. 누가 되었던 사람을 죽이면 혈마다.

하룻밤 사이에 백여 명을 죽인 자신도 혈마다. 그 많은 사람을 죽여놓고 혈마가 아니라고 하면 되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이 혈마 무공이다.

과거, 혈마는 제정신으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그는 진기 폭주로 혈마가 되었다. 쌍두사의 머리를 잘못 잡았다. 잘못 이용했다. 그러니 차라리 그가 오늘 밤 호발귀보다 낫다. 그는 모르고 살인을 했고, 호발귀는 알고 했다.

“아미타불!”

장진 스님이 불호를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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