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八章 재회(再會) (2)
‘좋다!’
호발귀는 애써서 얼음장 같은 빙심(氷心)을 유지했다.
인정을 버린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밤, 이곳은 지옥 사자만 존재한다.
한 명을 죽였다. 시작이다.
백발연시포는 네 명이 움직인다.
한 명이 조준하고, 다른 한 명이 화통에 불을 붙이고, 다른 두 명은 즉시 재발사 준비를 한다. 두 명이 대포 옆에서 화살 백 대가 꽂힌 시판(矢版)을 들고 대기한다.
백발연시포는 일반 활처럼 화살을 재우지 않는다.
공격 속도를 빠르게 전환하기 위해서 판갈이라는 용법을 이용했다. 화살을 쏘아내면 텅 빈 시판을 뽑아내고, 화살이 꽂힌 시판을 꽂는다.
화살 한두 대를 재울 시간이면 시판을 갈 수 있다.
화살 백 대가 다시 날아갈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러니 시포와 마주치려면 화살 백 대가 아니라 이백 대, 삼백 대가 순간적으로 날아오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
한 명 곁에는 다른 세 명이 있다.
스읏!
호발귀는 손을 들어서 무인의 입을 막았다.
“으…… 으……”
무인이 겁에 질려서 바들바들 떨었다.
호발귀는 무인의 심장에 단검을 박았다.
무인이 단검이 꽂히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어떻게 피하나.
그 옆에 있는 두 명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옆에서 동료 무인이 죽는데, 움직이기는커녕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그저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열둘!’
시포 열두 개를 정리했다.
오십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스르륵 무너졌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고스란히 호발귀의 몸에 새겨졌다.
단검을 들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무심무실공을 운용하고 있지만, 사람을 죽일 때의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좀처럼 평정심을 찾을 수 없었다.
‘후우!’
호발귀는 잠시 앉아서 숨을 골랐다.
그가 가까이 다가서면 상대는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섬독에 신경이 마비되어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그래도 감각은 살아 있다.
눈으로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죽음을 느낀다.
‘이런 방법, 좋지 않아.’
호발귀는 저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줄 생각이 없었다. 단지 소리 없는 죽음을 원할 뿐이다. 날이 밝기 전까지 역천금령공을 사용하지 않고 싸움이 끝났으면 좋겠다.
‘하자!’
그는 다시 일어섰다.
상대방을 느끼고 섬독을 뿌린다. 등 뒤로 다가가서 손으로 입을 막는다. 단검으로 심장을 쑤신다.
죽이는 방법은 같다. 오직 소요귀명만이 역천금령공을 쓰지 않는 길이다.
“불안하게 조용하지?”
당홍이 중얼거렸다.
세상은 고요하다. 바람 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움막에 있는 사람들은 이 시간, 많은 사람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호발귀가 움막을 나섰다.
그 순간부터 사람이 죽기 시작했다.
세상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호발귀가 성공적으로 암살하고 있다는 의미다.
비명이 터지고, 사방이 시끌벅적해지면 암살이 끝난다.
그때는 움막 안에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뛰쳐나갈 생각이다. 어차피 움직이지 않아도 백발연시포에서 날린 화살이 움막을 벌집으로 만들 것이다.
호발귀가 산을 돌아다니면서 한 명, 한 명 죽인다.
솔직히 이토록 완벽한 정적은 기대하지 않았다. 저들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대략 십여 명쯤 죽인 후에는 사방에서 횃불이 켜질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조용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대략 두 시진.”
도천패도 어둠 속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의 생각도 당홍과 다르지 않았다.
“해 뜨려면 두 시진 남았네?”
“산속이니까 두 시진 반쯤 남았을 거야.”
“너무 조용하니까 불안해.”
당홍이 추운지 두 팔로 어깨를 감쌌다.
“이건!”
호발귀는 눈을 부릅떴다.
섬독을 뿌렸다. 당장 혈천방 무인은 신경이 마비되었다. 움직이지 못한다. 손을 들어서 입을 틀어막았다. 전신이 마비되어서 굳이 입을 막을 필요가 없는데, 습관이 입을 막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 단검을 찔러 넣으려고 했다
그때, 호발귀는 놀라운 모습을 봤다.
혈천방 무인의 몸에서 생기가 피어난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뻗쳐 나온다.
호발귀는 깜짝 놀라서 옆에 있는 자를 봤다.
마찬가지다. 옆에 있는 자도 생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다.
당연하다. 살아 있는 사람이니 생기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생기를 보지 못하지만, 혈마 무공을 배운 사람은 당연하게 볼 수 있다.
‘이거 이령귀화다!’
혈천방 무인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운은 이령귀화, 혈마 무공의 근본이다.
역천금령공과 함께 두 축을 이루는 이령귀화가 혈천방 무인의 몸에서 어른거린다.
인간은 모두 이령귀화를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을 생기라고, 혹은 이령귀화라고 부를 뿐이다.
살아 있을 때, 인간은 생기를 외부로부터 흡수한다. 천지자연으로부터 흡수한다.
음식을 먹으면서, 물을 마시면서 흡수한다. 만물의 기운이 내 몸속에서 응축된다. 숨을 쉬면서도 흡취한다. 공기 속에 활기찬 생령이 담겨 있다.
생기라고 하면 특정한 기운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먹고 마시고 숨을 쉬는 모든 행동 속에 담겨 있다.
생기를 얻고, 사기로 변한 기운을 뿜어낸다.
자신은 지금 생기를 찌르고 있다. 이령귀화를 파괴하고 있다.
“아!”
호발귀는 탄식했다.
순간, 역천금령공이 꿈틀거렸다. 호발귀가 갈등을 느낄 때,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당장 들고 일어났다. 진기가 휘돈다. 심마가 일어나면서 역천금령공을 끌어냈다.
‘주화입마!’
역천금령공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이거였나!’
호발귀는 주화입마의 원인을 확실히 알았다.
역천! 말 그대로 역천이다.
역천금령공은 생기를 이용해서 타인의 생기를 소멸시키는 행동을 주도한다.
사람을 죽인다.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기를 소멸시키는 행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보지 않는다. 생기가 소멸하는 것만 본다.
생기를 이용해서 타인의 생기를 소멸하면 혈마가 된다.
누구든 사람을 죽이면 불안감, 죄책감을 느낀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이런 감정이 무뎌진다.
살인마가 되는 것이다.
어떤 무공이든 사람을 오랫동안, 많이 죽이면 혈마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혈마 무공은 이런 과정을 급속하게 단축시킨다.
매우 빨리 죄책감을 죽인다.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든다.
호발귀는 이런 사실을 백여 명쯤 연속으로 죽인 끝에 알았다.
처음에는 사람을 죽인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생기를 소멸시킨다는 느낌만 있다. 그러니 죄책감인들 들어설 틈이 있나.
역천금령공을 쓰고, 폭주를 일으켜야만 혈마가 되는 게 아니다. 호발귀는 지금도 혈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혈마가 된다.
홀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자신을 보냈다. 자신이 진정으로 혈마가 되는 것을 원한다.
“이익!”
단검이 혈천방 무인의 심장에 꽂혔다.
호발귀는 단검을 꽂자마자 뽑아냈다. 심장에서 피가 솟구쳤다.
단검은 피를 뽑아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자의 목을 홱 긋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자는 머리를 찍었다. 또 한 명, 마지막 남은 자에게는 난검(亂劍)을 선물했다. 복부에 단검을 꽂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속해서 찔렀다.
피가 뿜어진다.
무인 네 명은 신음을 흘리지 못했다. 섬독에 마비되어 있어서 검에 찔리자마자 소리 없이 절명했다.
이것은 역천금련공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역천금령공은 피를 원한다. 비명을 원한다. 처절하게 죽는 것을 원한다.
호발귀는 혈천방 무인을 죽이지 않았다. 이번에 단검을 쓴 사람은 장진 스님이다.
“이봐. 이제 시작이야. 빨리 가자고.”
장진 스님이 말했다.
“나타났군.”
호발귀는 장진 스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장진 스님이 나타난 것을 보면 역천금령공이 단단히 기회를 잡았나 보다.
“아미타불! 오랜만이지? 어서 가자고. 죽일 놈들이 많아.”
“죽이자는 말을 하지 말던가, 불호를 읊지 말던가.”
“이게 뭐 어때서? 아미타불. 그런데 그새 또 새로운 방법을 배웠대? 독으로 마비시킨 후에 죽인다. 이거, 이거 안 좋아. 마뜩잖아. 이건 죽이는 게 아니라 도살이야.”
“지금도 충분히 도살하고 있어.”
“아냐, 아냐.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죽으면 원귀가 돼. 왜 그런지 알아? 죽을 때는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소리까지 막아버렸잖아. 얼마나 답답하겠어.”
장진 스님이 자비롭게 웃었다.
“죽일 때는 처절하게 비명 지르게 하라고. 이게 죽음의 본질이거든. 죽는 놈이 ‘그래! 죽여라! 죽여!’하고 소리 빽빽 지르게 하라고. 이렇게 죽여야 죽이는 사람도 마음이 편해요. 아미타불!”
장진 스님은 혈불이다. 악불이다.
“그만 좀 가줄래?”
“가라고? 그럴 수야 있나. 친구가 괴로워하는데. 아미타불. 난 가만히 있을게 마음대로 해.”
장진 스님이 신나서 말했다.
호발귀는 털썩 주저앉았다.
살인은 끝이다. 여기서 한 명이라도 더 죽이면 자신은 사라지고 장진 스님만 남는다.
호발귀는 두 손으로 양 무릎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무릎 사이로 얼굴을 푹 묻었다.
몸이 덜덜덜 떨린다.
‘이제 곧 날이 밝아.’
홀리는 밖을 쳐다봤다.
어두운 가운데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것 같다.
아직 들뜬 소리도 없이 조용한 것을 보면 암살이 무척 깊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대략 사백여 명. 지금쯤 칠 할은 죽였을 것이고…… 그럼 주화입마가 일어났어.’
지금쯤 호발귀는 굉장히 심한 심마에 시달릴 것이다.
이럴 때 살심이 일어난다. 한참 싸울 때도 일어나지 않던 살심이 느닷없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성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 살심이 전신을 집어삼킨다.
살심이 왜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살심을 해소해주면서 심언(心言)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살심이 해소된 뒤에도 말 잘 듣는 수족이 된다.
단지 심언만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자, 혈마의 짝이 있어야 한다. 옛날 혈마 옆에는 혈마후(血魔后)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음문에서는 혈마환객(血魔串客), 혈마 조종자를 여자로 선정한다. 여자에게만 심언을 전수한다. 여자에게서 여자로 심언 전수가 이루어진다.
음문 사람도 심언을 모른다.
심언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명, 그녀뿐이다.
혈마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자, 촌장이 제일 먼저 홀리를 거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 나가야 해. 살심을 삭혀주지 않으면 미쳐.’
홀리가 말했다.
“안 되겠어. 내가 좀 나갔다 와야겠어. 너무 조용하니까 불안해.”
“어딜!”
당홍이 그녀 앞을 막아섰다.
“왜 이래? 걱정되어서 나가본다는…… 웃!”
흘리는 말을 하다 말고 뒤로 펄쩍 물러섰다.
그녀는 말을 하는 중에 알싸한 냄새를 맡았다. 코를 톡 쏘는 냄새였다.
“독이야? 이 정도로는 나를 어떻게 못 하는데?”
홀리는 즉시 운기했다. 그리고 독기를 손가락 끝에 모았다. 손끝이 새파랗게 변색되었다.
“얌전히 앉아서 해독해. 안 그럼 손가락 잘라내야 해.”
“이 정도로는 안 된다니까.”
스릉!
홀리가 칼을 뽑았다. 그러자,
“그 칼은 내가 받지.”
도천패가 대도를 뽑아 들고 그녀 앞을 막았다.
홀리는 도천패 대신 당홍을 쳐다봤다.
‘치잇!’
홀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홍을 너무 우습게 봤다.
방금 흘린 독은 경고성이다. 다음에 쏟아낼 독은 보나 마나 치명적이다.
도천패에게 일격을 가하는 동안 당홍이 독을 쓸 것인데, 막지 못한다. 그만큼 당홍의 독술이 뛰어나다. 독의에게 독공을 전수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홀리가 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혈마 무공을 아는 사람으로서 충고해. 내가 지금 나가지 않으면 호발귀 죽어. 알아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