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七章 호굴(虎窟) (5)
탁!
검은 무복을 입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두른 무인이 탁자에 검을 올려놨다.
“뭘 드릴깝쇼?”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엽차를 따르며 물었다.
“화주 한 병.”
“안주는?”
“뭐가 좋을까?”
“우리 집은 돼지 염통구이가 맛있습죠.”
“그걸로 하지.”
“주무시고 가실 건가요? 주무실 거면 위층에 방을 비워놓고요. 아니면 다른 손님에게 드려야 해서.”
“자고 가도록 하지.”
“넵!”
점소이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귀검은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동네 주민으로 보이고, 봇짐을 맨 여행객이 두 명 있고, 의원인 듯한 사람은 급히 소면을 먹고 있다.
이상한 점은 없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무엇인가 놓친 부분이 있다.
귀검은 주점 겸 객잔을 다시 한번 쓸어봤다.
이 층에 있는 객잔을 먼저 살피고, 일 층을 나중에 봤다. 천천히 부분으로 나눠서 살폈다.
‘훗!’
귀검은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뭔가 놓친 부분이 있다 싶었는데, 정말 크게 놓친 곳이 있다.
회계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주점 주인을 놓쳤다. 그의 주먹에 단단히 박혀 있는 굳은살을 놓쳤다. 조는 듯 감긴 눈 사이로 실낱같이 흘러나오는 안광도 놓쳤다.
“후후!”
귀검은 만족한 듯 옅은 웃음을 흘렸다.
천살단 십육비자가 뛰어나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실제로 부딪쳐보니 허언이 아니다. 자신이 미행을 놓칠 정도로 뛰어나다. 적이지만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다.
“좋군. 추적만 놓고 보면 귀무살보다 한 수 위야. 후후”
귀검은 팔짱을 꼈다.
* * *
“방금 귀검이 천문(天門)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네.”
비보전주(秘報殿主)가 말했다.
‘호북성(湖北省) 천문(天門).’
등여산은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귀검은 무한(武漢)을 거쳐서 천문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들린 데도 없었다.
“식사했겠네요?”
“저녁을 따로 먹지는 않고 화주 한 병에 안주로 염통구이를 시켰다는군. 지금은 객잔에서 쉬는 중이고.”
“내일은 비자를 바꿔주세요.”
“……”
비보전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십육비자는 비보전에서 관리한다. 관리라는 말속에는 그들의 행동방침까지 포함된다.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식으로 따라붙고, 후퇴하는 것까지 일일이 지시한다.
물론 비보전의 지시가 현장 상황보다 앞서지는 못한다.
뒤따르라는 지시를 내렸어도 현장 상황이 불가피하면 후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십육비자의 독자적인 판단에 맡긴다.
등여산은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현장 상황은 알지도 못한 채 지시를 내리고 있다.
“교대해야 해요. 안 그럼 비자가 죽어요.”
등여산이 비보전주의 속마음을 읽은 듯 재차 말했다.
“알았네. 새로운 얼굴로 바꾸지.”
십육비자는 목숨을 빼앗지 않는 한 떨쳐내기 힘들다.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추적만 하는 것이니 한두 명만 붙여도 충분하다. 그런데 등여산은 무려 네 명이나 교대를 시키고 있다. 그것도 내일은 새로운 얼굴로 바꾸란다.
아무리 귀검이 살단 총주를 죽였다지만 너무 겁내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등여산이 지도를 보면서 말했다.
“전도전주(全圖殿主)님, 이 지도 정확하죠?”
“허허! 그 말은 우리 전도전을 모욕하는 말이네. 작년에 실사해서 작성한 지도니, 정확하네.”
“네.”
등여산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전도전주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직 ‘정확하다’라는 말만 들었다. 다른 이야기는 듣지 않고 모든 생각을 지도에 집중시켰다.
전주들은 등여산의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섭섭해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
무엇에 집중할 때는 항상 이랬으니까.
등여산은 단주를 찾았다.
어두침침한 방에 네 사람이 앉았다.
천살단주가 책상 앞에 앉아있고, 천원주와 재각주(財閣主)가 자리를 함께했다.
등여산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음자(陰子)를 써야겠어요.”
순간, 재각주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천원주도 놀란 듯 등여산을 쳐다봤다.
“음자를 알고 있었어?”
천원주가 물었다.
“재각주님,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음자가 몇 명이나 되죠?”
“음!”
재각주는 즉답하지 않고 단주를 쳐다봤다.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재각주가 입을 열었다.
“자세한 것은 재각으로 돌아가서 살펴봐야 알겠지만 대략 칠십여 명 정도는 동원할 수 있을 거네. 그런데…… 음자가 있다는 사실은 언제 알았나?”
“오래전에요.”
등여산이 별것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천살단에서도 음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딱 네 명뿐이다. 천살단주와 천원주, 죽은 살단 총주, 그리고 음자를 관리하는 재각주, 이렇게 네 명만 안다.
음자는 조상의 공덕으로 벼슬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과 남모르게 숨겨 둔 자식이라는 뜻이 있다.
천살단 음자는 후자다.
비밀 임무 수행을 위해서 무림에 숨겨준 천살단 일검지임(一劍之任) 무인들을 음자라고 한다. 일검지임, 검 한 번 휘두르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 곧 살수다.
음자는 그들의 임무와 전혀 상관이 없을 법한 재각주가 관리한다.
누구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재각주가 음자를 관리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등여산이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무림 정세를 분석하다가 이상한 꼬투리를 잡았을 것이다. 계속 파고들다 보니 재각이 나왔고, 음자를 알게 되었다.
등여산은 늘 그런 식으로 비밀을 알아냈다.
등여산이 말했다.
“칠십 명, 전부 써야겠어요.”
“그들에게 귀검을 공격시킬 생각인가? 그 생각은 나도 해봤는데, 살수라면 귀검 쪽이 훨씬 능해서.”
재각주가 말끝을 흐렸다.
“아뇨. 귀검은 제가 직접 잡아요. 재각주님, 음자를 데리고 여길 공격해 주세요.”
등여산이 지도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환산만(環山灣)이다. 강이 휘도는 곳에 있어서 만(灣) 자를 쓰지만, 환산만 주변은 상당히 깊은 산이 연이어 펼쳐져 있다.
“지도를 봐주세요. 일단 여기 언만(堰灣)으로 가주세요. 여기서부터 이 길을 타고 올라가야 해요. 다른 길은 절대 안 돼요. 꼭 이 길로 가야 해요.”
등여산이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절벽이 나와요. 굉장히 가파른 절벽이니 밧줄을 넉넉히 준비하시고. 이른 저녁을 먹고 초저녁에 오르기 시작하면, 자정 무렵에는 절벽에 오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환산만을 굽어보게 되는데. 아시죠?”
위에서 밑으로 내리꽂히며 공격하라는 뜻이다.
“여기 뭐가 있는데?”
천원주가 물었다.
“제 짐작이 틀림없다면 여기가 혈천방 귀문(鬼門)이에요.”
“귀문!”
“귀문?”
천원주와 재각주가 동시에 말했다.
귀문은 귀신이 나오는 문이다. 귀무살이 탄생하는 문이다. 귀무살을 수련시키는 비밀 장소 중 하나다.
귀문은 만들어졌다가 사라진다. 임시로 활용하고는 흔적을 모두 지우고 사라진다. 몇 명이 어떻게 수련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지운다.
혈천방의 귀문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여기가 귀문이라고 확신해?”
“호발귀가 여기 있어요.”
“뭣?”
천원주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등여산은 비보전주를 통해서 강호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외에 등여산이 따로 운영하는 정보망은 없다. 그리고 비보전주가 전한 소식들은 천원주도 함께 들었다.
호발귀가 누군가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는 보고가 끝이었다.
비보전은 마차의 종적을 놓쳤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추격을 방해했다.
호발귀 뒤는 비자가 쫓지 않았다. 비보전 무인이 쫓았다. 그게 실수였나? 비자가 쫓았다면 지금도 따라붙고 있을 텐데, 너무 손쉽게 종적을 잃었다.
그런데 호발귀가 환산만에 있단다.
그렇다면 환산만이 귀문일 가능성, 매우 높다.
“음! 귀문을 쳐서 귀무살의 뿌리를 끊어놓는다. 귀검이 바싹 약 오르겠는데?”
등여산이 말했다.
“여기에 잠복해 있는 무인이 대략 사백 명 정도 돼요. 기습을 아주 잘해야 해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재각주가 자신 있게 말했다.
“네. 여기까지는 각주님이 책임지고 해주세요.”
“알았네.”
“저는 상황 봐서 하루나 이틀 늦게 갈게요. 제가 가면 각주님 전권을 제게 주세요. 제가 음자를 움직일 거예요. 음자에게 절대복종하라고 일러두세요.”
등여산이 일사천리로 말했다.
‘귀검이 온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등여산은 음자를 직접 움직이겠다는 것은 곧 귀검을 상대하겠다는 뜻이다.
음자는 귀검을 상대하지 못한다.
음자의 살법이 아무리 뛰어나고 은밀해도, 지옥유부검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등여산은 음자를 움직여서 조직적으로 귀검을 잡을 생각이다.
“처음부터 다시 말할게요.”
등여산은 방금 말한 것보다 더 깊은 내용, 세부적인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상이에요. 이 모든 것, 다 용인해 주세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단주를 보며 말했다.
“그러지. 용인할 테니, 마음껏 해봐.”
천살단 단주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등여산은 단주의 집무실을 나와서 몇 걸음 걸었다. 그러다가 우뚝 멈춰 섰다.
“있어?”
허공에 던진 말이다.
대답은 없다. 하지만 등여산은 주치균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 뭔가 말할 게 있지 않을까? 정리할 게 있으면 지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작한 게 있어야 정리할 것도 있는 거지. 우린 시작한 것도 없으니 정리할 것도 없어.”
저벅! 저벅!
주치균이 걸어왔다.
그는 단주에게서 십 장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항상 집무실 앞에서 단주를 지킨다.
“그런가? 아무것도 정리할 게 없나?”
“그래.”
“내가 왜 나가는지는 알지? 그럼 역으로 귀검에게 죽을 수도 있지.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 이게 마지막이잖아. 마지막 만남. 내게 해줄 말 없어?”
“쓸데없는 말, 하지 말자.”
“만약 내가 못 돌아온다면 정말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서. 그 말을 듣고 싶은데.”
“그런 말 없어.”
“그렇구나. 그런데 어쩌지? 난 있어.”
“……”
“넌 내 친구야. 오빠고, 동생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꼽으라면 언제나 너였는데.”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너의 분신이 되고 싶었다.’
주치균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됐어. 괜히 말 꺼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가 서먹해진 것 같아서 해본 말이야. 다녀올게.”
“그래. 다녀와라.”
“참! 부탁이 있는데,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말해.”
“내 생각인데, 단주님이 살단 총주를 네게 맡길 것 같아.”
“훗! 장난 그만해.”
“받지 마, 그거. 받으면 죽어.”
“걱정하지 마라. 내 무공으로 어림도 없어.”
“물론 지금 네 무공으로는 안 돼. 하지만 단주님은 널 단시간에 육성시킬 수 있어. 지금보다 두 배, 세 배 강하게. 특별 연공. 그거 안 받았으면 해.”
“내가 알아서 한다.”
등여산이 뒤돌아서 주치균을 봤다.
주치균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길을 피해서 멀리 있는 산을 봤다.
“알았어. 잘 알아서 해. 다녀올게. 내가 다녀와서도 이 모습 그대로의 너를 봤으면 좋겠어.”
사박! 사박!
등여산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