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七章 호굴(虎窟) (4)
광저는 마차를 두 대 가져왔다.
창문이 완전히 밀폐되었고, 마차 문도 밖에서 잠그도록 특수하게 만들어진 마차다.
밖에서 문만 걸어 잠그면 꼼짝없이 갇힌다.
사실상 움직이는 감옥이다.
“원래는 마차를 하나만 준비했는데, 저 친구 덩치가 너무 커서.”
광저가 도천패를 가리켜다.
“자, 인원을 둘로 나눕시다. 남자 여자로 나누든지, 좋아하는 사람끼리 타던지.”
“문주와 난 앞 마차.”
도천패가 말했다.
“난 싫은데? 어휴! 이 좁은 마차에 그 몸하고 앉아있으면 숨 막혀. 보위는 뒷마차. 난 앞 마차.”
“난 보위니까 문주랑 같이 타야지!”
“무슨 보위가 문주 말도 안 들어? 뒤에 타라니까!”
호발귀가 도천패를 떠밀었다.
도천패와 당홍이 어차피 맺어질 사이라면 이번 기회에 오붓이 대화라도 나눠보라는 배려다.
이런 기회에 둘만의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
다각! 다각! 다각!
마차가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단조롭게 들린다.
“한 가지 물어보자. 왜 나하고 살겠다고 한 거야?”
도천패가 물었다.
“사실대로?”
“……”
“난 강한 무인이 필요했어. 이유는 그것뿐이야.”
당홍이 태연하게 말했다.
“강한 거라면 나보다 문주 놈이 더 강하지 않나? 나이도 너하고 얼추 맞고.”
“난 당신이 훨씬 강해 보였거든. 혈마 무공을 수련한 줄 알 수가 있나. 무공을 쓰지 않으려고 빌빌거리니 약해 보였지. 그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
“잘못 본 거네?”
“단단히 잘못 봤지. 사람 잘못 선택한 거야. 호호호! 농담이야, 농담. 진담으로 알아들은 건 아니지?”
당홍이 웃으면서 말했다.
“음! 그렇군.”
도천패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홍의 말은 사실이다. 한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으로 도천패를 선택한 게 아니다.
도천패는 당홍의 눈에서 진한 분노를 읽었다.
당홍이 떠올리는 살벌한 독기는 가끔 호발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호발귀만 혈천방에 원한이 있는 게 아니다.
당홍도 혈천방에 원한이 있다.
광저가 찾아와서 혈천방 본방으로 간다고 할 때, 당홍의 눈빛이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변했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어도 도천패는 똑똑히 봤다.
당홍은 혈천방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면 독의가 혈천방 사람이다. 하지만 당홍도 혈천방에서 자랐다. 독의가 혈천방에 머무르는 동안, 당홍도 머물렀다.
독의가 소위 세력 다툼 끝에 패배했다는 이유로 쫓겨날 때 당홍에게도 어떤 일이 벌어졌다.
당홍은 혈천방에 받을 빚이 있다.
그 빚을 받기 위해서 도천패를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도대체 어떤 빚일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빚이 아니다.
당홍은 빚을 받기 위해서 몸을 내던졌다. 여인이 정조를 던져버리면서 타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래서 도천패를 보자마자 같이 살자고 한 것이다.
물론 첫눈에 좋아하는 감정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속 원한과 겹친 것도 맞다.
당홍의 원한은 매우 깊다.
이번에 혈천방으로 들어가면, 당홍은 도천패에게 진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목숨을 걸어야 한다.
도천패는 바보가 아니다. 이 정도 사정은 익히 짐작한다.
“한 녀석을 알았는데, 되게 착해. 다른 사람은 사납고 거칠고 무섭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귀엽게만 보여. 나이 들어서 이러면 주책인 줄은 아는데, 난 그 녀석이 좋다.”
도천패가 말했다.
당홍은 도천패에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당홍을 좋아하고 있다. 당홍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당홍이 머리를 기댄 채 말했다.
“눈치가 너무 빨라도 탈이야. 무슨 사내가 생긴 건 곰인데, 눈치는 여우야? 위로될지 모르겠는데 나 당신 정말 좋아하게 됐어. 어쩌면 이런 감정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그냥 접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도천패가 당홍의 손을 잡았다.
“그러지 말고 해. 뭘 할지 모르겠는데, 무조건 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좀 잘래.”
당홍이 머리를 기댄 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마차는 관도를 쭉 가로질러 갔다.
중간에 가로막는 사람은 없다. 어떤 무인도 마차를 가로막지 않는다. 어떤 관원도 검문하지 않는다. 마차 앞에서 얼쩡거리는 사람도 없다.
누군가가 앞길을 틔워주고 있다.
혈천방 무인들이 앞길을 정리하나? 아니다. 이것은 혈천방의 힘이 아니다.
관군이 동원되었다.
혈천방이 관부에 말했고, 관부는 관원을 동원해서 관도를 깨끗이 정리했다.
물론 혈천방이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혈천방의 힘은 세상 곳곳에 스며있다. 여름철 곰팡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넓혀간다.
때에 따라서 이들은 혈천방의 눈과 귀 역할도 한다. 그래서 추격자를 살핀다.
혈천방이 천하 곳곳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저기…… 이건 궁금해서 그런데, 혈마 무공을 사용하면 막 피가 끓고 그러나? 아니면 정신이 훼까닥 뒤집힌다거나. 아! 내가 혈마가 되는구나 하는 게 느껴져?”
해자수가 말했다.
“아씨 있잖아? 그런 건 아씨에게 물어보지?”
“하! 우리 아씨는 보다시피 이런 상태라서.”
해자수가 홀리를 쳐다봤다.
홀리는 마차에 타자마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공에 몰입했다.
마차가 덜컹거려도 운공을 풀지 않았다.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대체로 운공은 편안하고 조용한 곳에서 해야 한다.
마차 안처럼 흔들리는 곳에서 운공하면 자칫 기혈이 진탕되어서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
홀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운공에 몰입했다.
홀리는 움직이면서도 운공한다. 걸으면서도 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운공을 풀지 않는다. 심지어는 말을 하면서도 운공한다. 하루 십이 시진 중 한 시도 그치지 않는다.
매우 특이한 동공(動功)이다.
“당신은 언제부터 음문 사람을 만났는데?”
“나야 인연 맺은 지는 오래됐지. 처음에는…… 백표(白彪)라고 아나? 설원에만 사는 표범인데, 하얀 가죽에 얼룩덜룩한 점이 딱 박혀 있어. 그놈 값이 천정부지, 부르는 게 값이거든. 여기 음문에 가면 고놈이 많았단 말이지. 그래서 발길을 끊지 못했는데, 지금은 정이 들어버려서.”
“촌장한테 자식이 여섯이라며? 씨는 다 다르고.”
“킥킥! 촌장이 말이야. 정력이 끝장이야, 끝장. 하룻밤에도 여자 대여섯 명은 후려친다니까.”
해자수가 음문에 대해서 주절주절 말했다.
호발귀는 음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다.
음문 사람은 중원에 점점이 박혀 있는 소수민족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딱 맞다.
중원과 문화가 다르다. 문화가 다르니 생각도 다르다.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다.
그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워! 워!”
마부가 마차를 멈췄다.
잠시 후, 밖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자! 오늘은 여기서 쉽시다.”
광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마차는 들판 한복판에 세워졌다. 사방이 확 트여서 한 사람만 지켜보고 있어도 접근하기 힘들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들판에 천막 두 채가 세워져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준비해놨는데,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서슴없이 말들 하시고. 여기서는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로 나눠야겠죠? 자, 왼쪽이 남자. 오른쪽이 여자. 두 분, 아쉽더라도 오늘은 그만 헤어지시고. 이런 데서 같이 잘 수는 없으니까.”
광자가 도천패를 쳐다보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마차로 이동한 지 나흘이 지났다.
그동안 습격은 없었다. 만나는 사람도 없었다. 먼 길을 왔지만, 세상이 종말을 고한 것처럼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산길로 들어섭니다. 길이 조금 험할 거예요!”
광자가 소리쳤다.
사실, 소리칠 필요도 없었다. 산길로 들어서자 마차가 매우 거칠게 흔들린다.
“그것참…… 산길로 들어섰다면서 계속 마차를 타고 가네.”
해자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마차는 산길을 타지 못한다. 산길이란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그런데도 마차는 계속 안으로 파고든다.
길이 넓게 다듬어져 있다.
“잠깐!”
“나다.”
“아! 예. 들어가십시오. 열어!”
마차 밖에서 검문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다각! 다각! 다각!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열둘.”
호발귀가 말했다.
해자수가 바깥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 귀를 기울였다. 미간은 잔뜩 좁힌 채 인기척을 탐지한다. 그래서 헛고생하지 말라고 파악한 인원을 말해주었다.
“열둘? 꽤 많네. 그러면 여기가 혈천방인가?”
‘그럴 리 없어.’
호발귀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혈천방 입장에서 호발귀 일행은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는 미지의 약초다.
자신의 안방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불러들이는 사람은 없다.
낯선 곳, 타격받아도 큰 충격이 없는 곳에서 인증 절차를 거칠 것이다. 그래서 약이 된다고 판단한 후에야 혈천방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인증이 된 후에도 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우리 꽤 많이 들어왔지? 거의 십 리 정도는 들어온 것 같아. 산길로만 십 리야. 여기 대단히 큰데?”
해자수가 말했다.
십 리에 이르는 큰 산이 혈천방 땅이다.
이 정도 산이라면 일반 산이 아니라 산맥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상하다. 혈천방이 이토록 큰 땅을 차지하고 앉았는데, 무림은 왜 모르고 있을까? 지금도 혈천방을 찾아서 온 사방을 헤매다니고 있지 않나.
“워! 워!”
마차가 세워졌다.
“자. 여기서부터는 걸어갑시다. 마차가 더 들어갈 수 없어서. 한 이십 리 정도 걸어가야 하니까 고생깨나 할 텐데. 점심 먹은 것 소화한다 생각하고 걷지 뭐.”
광저가 보기만 해도 경사가 급한 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지?”
해자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산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다. 산 전체가 병기, 암기로 쫙 깔렸다.
산길을 걷는 중간에 번뜩번뜩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상당히 많은 무인이 곳곳에 숨어있다. 참호를 파고 들어가서 사방을 경계한다. 그들의 눈이 개미 한 마리 놓치지 않게끔 얼기설기 얽혀 있다.
험산은 역시 혈천방 땅이다.
특수 병기도 슬쩍슬쩍 보인다.
깊이 숨겨놨다면 절대 발각되지 않을 터인데, 일부러 보라고 은폐물을 거둬냈다.
이런 준비가 되어 있으니 도망가지 말라는 소리다.
어설픈 협박이지만 효과가 매우 좋다. 자고로 간단한 게 최고라는 말이 있지 않나. 협박도 간단한 게 최고다. 특별히 제작한 병기만 보여줘도 도망칠 마음이 싹 사라진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백발연시포(百發連矢砲)다.
화약을 터트려서 화살을 날리는 대포인데, 화살이 무려 백 개나 쏘아진다.
대포로 쏘는 화살 무더기!
큰 힘을 들일 필요도 없이 화약통에 불만 붙이면 인간이 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하게 쏠 수 있다. 궁수 백 명이 화살을 쏘는 효과가 일어난다.
백발연시포로 화살을 쏘면 사거리도 길고 타격력도 강해서 웬만한 갑옷은 펑펑 뚫린다. 하물며 칼이나 검으로 쳐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산 전체가 이런 병기로 가득 차 있다.
컹컹! 컹! 컹컹컹!
맹견이 짖어대는 소리도 들린다.
호발귀 같은 무인에게 맹견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지만, 심리적인 압박 작용을 할 수 있다.
천살단이 혈천방을 공격하지 않은 게 이해된다.
이 정도 준비했다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공격하기 힘들다.
‘본방이 아니다.’
호발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산은 매우 험하고, 무인이 많고, 사방에 특수 병기가 깔려있지만, 무엇인가 많이 부족하다.
절대 고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힘을 드러낸다.
험산은 그런 느낌을 풍기지 않는다. 매우 날카롭고 강하다는 느낌만 풍긴다.
이곳에는 절대 강자가 없다.
혹여 절대 강자를 만나더라도 나중에 온 사람이지, 이곳에 상주하는 사람은 아니다.
“자, 조금만 더 갑시다. 다 왔으니까.”
광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부지런히 산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