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七章 호굴(虎窟) (3)
덜컹!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열리지 않을 대문인데, 주인에게 통보도 없이 열렸다.
‘누가?’
주치균은 미간을 찡그렸다.
검벽 무인은 검주 허락 없이는 움막에 들어서지 않는다.
무엇인가 보고를 할 때도 항상 움막 너머에서 말하는 편이다. 아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면 사전에 들어간다는 통보를 한 후, 안으로 들어선다.
작은 움막은 주치균의 성채다.
그런데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
사박! 사박!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난다.
들어선 사람은 소리를 죽일 생각이 없다. 기척이 드러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나야. 들어가.”
침입자는 문밖에 다가와서야 입을 열었다.
주치균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음성을 듣고서야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덜컹!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천원주 유리검 주당염이 찾아왔다.
“연금 중이라서 안부도 여쭙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안하셨습니까?”
“편안하지 못해. 편안했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지. 오는 길이 험하잖아?”
천원주가 고혹적인 웃음을 흘렸다.
천원주는 살짝만 웃어도 보조개가 깊게 팬다. 두 눈은 항상 밝게 빛난다.
쉰 중반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손님 대접이 원래 이래? 차라도 한 잔 내와야 하는 거 아냐?”
천원주가 말을 돌렸다.
“연금 중이라서 사치스러운 것은 모두 물리고 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차도 사치야?”
“제겐 그렇습니다.”
“고지식하기는. 하기는 이러니까 단주가 예뻐하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실인데 뭐.”
천원주가 말을 하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같이 지낸 지도 오 년이 넘었지? 그런데도 여기는 처음 와보네? 그동안 너무 소원했나 봐. 좀 더 친하게 지냈어야 하는데. 그렇지?”
“바쁘시니까요.”
“내가 바쁜가? 검벽주가 바쁘지.”
주치균은 천원주의 얼굴에서 깊은 그늘을 보았다. 천원주가 하는 말속에서 허전함, 쓸쓸함이 가득 베여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요.”
주치균이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해?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한가 봐?”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호호호! 알았어. 용건만 말하고 빨리 갈게. 그럼 됐지?”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두 가지를 말할 거야. 하나는 단주님 명령. 오늘부로 연금 해제. 지금 시간부터 검벽 검주로 복귀해.”
“알겠습니다.”
주치균은 연금이 풀렸는데도 반색하지 않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말을 들은 듯 담담하게 받았다.
“살단 총주가 죽었어.”
천원주가 불쑥 말했다.
“네?”
주치균은 혹여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서 되물었다.
살단 총주! 천살단주를 제외하고는 제일 강한 무인!
정녕 총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총주의 반야호신공은 단주도 부수지 못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판국이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총주의 몸을 격타했지만, 총주는 쓰러지지 않았다. 특히 반야호신공이 구성을 넘어선 후에는 절대 쓰러지는 일이 없었다. 호발귀와 싸우기 전까지는.
“누가 총주님을?”
“귀무살 영주 귀무령. 귀검.”
“아!”
주치균은 비로소 총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귀검이라면 가능성 있다. 귀검을 만난 적은 없지만, 혈천방 제일검이라는 소문이 있다.
그 정도 검이라면 가능성 있다.
‘이거였어.’
주치균은 천원주가 쓸쓸한 이유를 알았다.
천원주와 살단 총주는 무려 삼십 년 넘게 한솥밥을 먹었다. 젊은 시절부터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희로애락을 같이 해왔다.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이해하는 폭도 컸다.
천원주에게 살단 총주는 벗이다.
“총주님이 당하셨다면 반격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자넨 지금부터 검벽을 추슬러. 당장 검주로 복귀해서 경비를 탄탄히 해. 살단 총주도 없으니 경계를 더 강화해야 해.”
“알겠습니다.”
주치균이 답했다.
설단 충주가 죽었다. 그토록 강했던 사람이 죽었다.
‘총주도 죽을 수 있는 거구나.’
총주의 죽음은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살단 충주가 천살단의 모든 것은 아니다. 사실, 살단보다는 천원에서 하는 일이 더 많다. 살단은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혈천방 무리를 토벌할 뿐이다.
하지만 총주가 바깥일 중 절반 이상을 도맡아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중원은 살단을 매우 두려워한다. 특히 충주를 두려워한다.
누구에게든 악행이 드러나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는 무모함, 난폭함을 무서워한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
무림은 총주의 죽음을 애도하겠지만, 한편으로는 폭군이 죽었다고 안심도 할 것이다.
천살단에서 총주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이제 무림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큰일이 벌어졌어.’
주치균은 천원주가 돌아간 다음에도 방안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당장 충주를 대신할 칼이 필요하다. 그만한 무공이 필요하다. 잔인함, 난폭함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무림에 진정 효과를 주기도 한다.
살단은 누가 이끌까? 총주가 워낙 강한 영향력을 떨쳤기 때문에 누가 후임이 되건 쉽지 않을 텐데.
‘천원주님 말이 맞아. 당장 천살단 경비부터 강화해야 해.’
주치균은 일어서서 검가(劍架)로 갔다.
검들이 꽂혀있다. 어떤 검을 지니고 나갈까?
주치균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은 검, 묵사검을 집어 들었다.
검가에는 명검이 일곱 자루나 꽂혀있지만, 등여산이 준 검은 하나뿐이다.
“검벽을 모두 소집해.”
주치균은 검을 차면서 명령했다.
* * *
삐이걱!
나무 대문이 요란한 소리를 흘리며 열렸다.
정자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던 등여산은 무심히 문을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천원주가 들어서고 있다.
등여산은 급히 천원주에게 다가가서 깊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신다는 기별을 받지 못해서 마중 나가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얼굴이 해쓱해졌네?”
“안에만 있으니까요. 햇볕을 쬐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
“후후! 책사가 언제는 햇볕을 쬔 적이 있어? 항상 방안에만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등여산은 천원주 말에 방긋 웃었다.
“오는 길에 검벽주 거처에도 들렸어. 두 사람, 이게 뭐야? 서로 잘 안 되는 거야?”
등여산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주치균과 어떤 관계로 남아야 할까? 그는 호발귀를 죽였다고 했지만, 호발귀는 살아 있다. 그는 자신이 겁탈당한 것으로 알지만, 겁탈당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원점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벌써 큰 벽이 세워졌다.
등여산은 주치균의 옛날 모습 그대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주치균 역시 등여산이 옛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
사로 변한 것이 없는데, 옛날 모습을 찾는다.
“휴우!”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원주가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단주님께 사직서를 제출했다면서?”
“거절당했어요.”
“그럼 그게 통할 것 같아? 누가 책사 같은 인재를 그냥 놔줘. 나라도 안 놔주겠다. 혹시, 호발귀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안 좋은 소문이 돌던데.”
“호발귀는 혈마가 될 거예요.”
“확실해?”
“네. 확실해요. 하지만 혈마가 되기 전에 막을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네요.”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저는 연금 중이라서 대화도 금지되어 있는데요.”
“그거 풀어주려고 왔지.”
천원주가 피식 웃었다.
“두 가지를 전해. 하나는 연금 해제.”
“네.”
등여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말 두 사람 다 왜 이래? 연금을 해제시켜준다고 해도 모두 시큰둥해? 연금 해제되는 게 싫어?”
“아뇨. 싫을 리가요.”
“휴우! 다른 하나. 살단 총주가 죽었어.”
순간 등여산은 미간을 상큼 추켜 떴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천원주만 쳐다봤다.
등여산은 벌써 생각 중이다. 살단 총주의 사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있다.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인데, 말해도 될까?”
“그럼요. 말하세요. 뭔데요?”
“뭘 것 같아?”
“귀검을 죽여달라는 거죠?”
“총주를 죽인 게 귀검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난 말 안 했는데?”
“총주님을 죽일 사람은 귀검밖에 없어요. 무공으로 치면 몇 사람 더 있지만, 실제로 살수를 쓸 사람은 귀검뿐이에요. 귀검이 곧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왔네요.”
“그렇구나. 거기까지 읽고 있었네? 맞아. 귀검을 죽여줘.”
“그건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예요.”
등여산이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단주님께서 부르셔. 가봐. 아마 총주가 죽은 일 때문에 부르시는 것 같아.”
천원주가 쓸쓸하게 말했다.
등여산은 단주와 마주 앉았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저번처럼 등여산과 단주, 두 사람만 독대했다.
단주는 여전히 말이 없다.
말을 하기 전에 반드시 몇 번쯤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늘은 생각하는 시간이 짧았다.
“귀검이 총주를 죽였어.”
단주가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천원주님께 들었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피에는 피. 총주가 당했으니 귀검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되겠죠.”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검은 이대로 보내는 것은 천살단 위신 문제야. 도대체 체면이 안 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총주가 죽었으니, 복수는 즉각 해줘야겠지. 이건 빠를수록 좋겠는데.”
“네.”
“계획을 세워. 그리고 전격적으로 시행해. 전권을 주지.”
“네.”
등여산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천살단 모든 것을 다 이용해도 좋아. 귀검을 잡아. 그자를 혈천방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돼.”
“네.”
등여산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후후! 그러고 보니 옛날 모습 그대로군. 책사다운 모습이야. 냉정하고, 침착하고. 옛날의 너였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계획을 세우곤 했는데.”
“생각한 것은 있어요.”
“그런데?”
“생각과 계획은 달라요. 생각을 마쳤으니까 이제 수치를 따져봐야죠. 정확하게 셈했는지.”
“후후후!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귀검 제삿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부탁이 있어요.”
“뭐든지.”
“귀검을 죽이면 제 사직서 받아주세요.”
“후후! 네 고집도 어지간하구나. 생각해보자.”
“미리 감사드립니다.”
등여산이 일어나서 읍했다.
단주는 항상 그랬듯이 무표정하다.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지만, 그 모습도 항상 같다.
화가 날 때도 항상 웃는다.
단주가 뒤돌아서 나가는 등여산에게 물었다.
“귀검의 죽음,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보름 정도면 될 거예요.”
등여산이 자신있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