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七章 호굴(虎窟) (2)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키는 육 척, 몸무게 백칠십 근에 육박하는 거구다. 하지만 도천패에 비하면 조금 작아 보인다.
얼굴이 네모반듯하고, 주름이 깊게 팼으며, 이목구비가 크고 시원하다. 나이는 쉰 중반의 중년인이며, 평소에도 많이 웃는지 웃는 낯이 어색하지 않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래? 싸움이 크게 있었나 보네.”
중년인이 숲을 둘러봤다.
중년인은 무인이다. 걸음걸이, 몸가짐, 눈빛 등등 모든 면에서 일류고수의 면면을 보여준다.
병기는 지니고 있지 않다. 요대 왼쪽에 검집 자국이 있는 것을 보면 검을 쓰는 듯한데, 현재 검은 차고 있지 않다. 일부러 풀어놓고 온 듯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터덕터덕 걸어왔다.
“아! 이 사람 쌍부 아닌가? 쯧! 이 사람이 어쩌다가 여기서 죽었나? 평소 도끼깨나 휘두른다고 사람을 깔보더니만 결국 이렇게 갔네. 으이구!”
중년인이 쌍부를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엇! 이건 누구야? 이 사람이 이거 잔살이잖아? 잔살도 죽었네?”
숲에서 나온 장한은 쓰러진 두 사람을 매우 잘 아는 듯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장한은 혈천방에서 왔다.
귀무살을 아는 사람이라면 혈천방 사람밖에 없다. 천살단도 귀무살의 면면을 알지는 못한다.
장한이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다가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두 명을 죽여보니까 손맛이 어떠셔?”
“재미있는 사람이군.”
호발귀는 무표정하게 장한을 쳐다봤다.
장한이 숲에 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쌍부와 잔살이 나타날 때, 장한도 숲에 있었다. 다만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쌍부는 발로 차 죽이고, 잔살은 관수로 목을 찔러죽이고. 손과 발에 진한 감각을 느꼈을 텐데, 어떻게…… 통쾌했는지?”
“뭘 알고 싶은데?”
“먼저 죽인 사람은 섬전이라고 하는데, 섬전에 이어서 쌍부와 잔살까지. 이렇게 되면 강하에 갔던 귀무살 다섯 명 중에 세 명을 죽인 건데.”
장한이 말을 중단하고 호발귀를 쳐다봤다.
그는 웃는다. 잔심(殘心)을 숨기고 웃는 것이 아니라 옆집 착한 아저씨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보여준다.
“다섯 명 중에 세 명을 죽였으니 이만하면 됐지 않을까 싶소만.”
“두 명은 포기하라는 말이군.”
호발귀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머지 두 명은 절대로 찾지 못할 거라는 거지.”
“찾을 건데?”
“에이! 찾지 못할 거야. 귀검이 이 두 사람을 왜 보내준 줄 아나? 이 정도에서 끝내자고 보내준 거요. 이쯤에서 혈천방과 손 털자고. 이 정도 제물을 받쳤으면 받아들일 만하지 않나?”
장한은 타협하러 온 사람이다.
하지만 호발귀는 타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혈천방은 자신을 원한다. 자신이 미치기만 하면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런 것을 왜 놓치겠나? 분명히 뭔가 다른 게 있다.
“혈천방 사람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그리고 내가 한 살이라도 더 많은 것 같은데, 웬만하면 말 좀 올리고.”
“혈천방 누구?”
“말해도 모를 거야. 광저(狂猪). 미친 돼지. 성질나면 이놈 저놈 가리지 않고 막 들이받거든.”
“광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난 이제부터 혈천방 사람이라면 모조리 죽일 생각이야. 누가 되었든. 혈천방의 ‘혈’ 자만 꺼내도 죽어. 그러니 돌아가든가, 아니면 여기서 죽던가 해.”
“에이! 사람이 왜 이렇게 가시가 돋았어? 강하 귀무살 다섯 명 중 남은 두 명은 월도와 무지라고 해. 한 사람은 월도를 쓰고, 한 명은 권각술이 뛰어나.”
“……”
“우리 혈천방은 그 두 명을 끝까지 숨길 예정이야. 우리 혈천방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고. 어차피 혈천방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니, 더 할 말도 없네. 난 여기서 죽긴 싫으니까 떠나야겠고. 간다!”
광저라고 별호를 밝힌 중년인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호발귀는 광저의 행동도 믿지 않았다.
귀검은 두 명을 제물로 던졌다. 자신을 낚아챌 미끼다. 결코, 이쯤에서 원한을 풀자고 준 것이 아니다. 그러니 광저도 곧 다른 행동을 할 것이다.
무슨 행동을 할까? 공격을 시도할까?
광저가 몇 걸음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살짝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 두 명을 굳이 죽이겠다면 방법을 생각해 줄 수는 있는데. 어때 나랑 같이 본방으로 가는 게.”
호발귀는 피식 웃었다.
이거였나? 납치하는 게 아니라 유인인가? 끌고 가는 것도 귀찮아서 제 발로 걸어오게끔 만들자는 거였나.
“당신들, 참 대단해.”
“뭐가?”
“모르면 말고.”
“그 말 받아들이지. 혈천방 본방으로 따라간다. 내가 본방에 도착하는 즉시 그 두 명 내놔.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사부님도 내놓아야겠어.”
“아아! 그건 아니지. 사부는 이 거래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 미끼는 다른 데 쓸 거거든. 우리 거래는 두 명을 내주는 데까지만. 그 정도로 양해하라고.”
“후후후!”
호발귀는 웃었다.
혈천방에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저들은 자신을 붙잡아둘 자신이 있을 것이다.
호발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다.
어차피 혈천방 본방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대놓고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혈천방 전력과 부딪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지금도 마찬가지 상황이지 않나.
그래도 혈천방이 두 명을 내주기는 할 모양이다.
광저가 호발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럼 우리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 짓고, 오늘은 푹 쉬라고. 난 내일 다시 올게. 나도 가는 길을 좀 정비해야 하거든. 뒤따라오는 족속들이 워낙 많아야지. 혈천방에 꼭꼭 숨어있는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잖아? 후후!”
광저가 웃었다.
중년인은 돌아가지 않았다. 타협이 이루어지자 방향을 틀어서 홀리에게 다가갔다.
“이게 누구셔? 음문 육 소저 홀리 아니신가?”
광저는 홀리도 알아봤다.
“날 알아?”
홀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하하! 그 유명한 홀리를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내가 알기로는 음문에 난리가 난 것 같은데, 바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나?”
“무슨 소리야?”
홀리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소식 못 들었어요? 그러니까 뭐냐…… 저거! 저거! 저거 안 보입니까?”
광저가 살단 총주의 시신을 가리켰다.
“귀검이 총주를 죽였어요. 총주를. 그러니까 지금 그 혈천방이 천살단에 전면전을 걸었다는 건데. 그러면 음문인들 가만히 내버려 둘까 이 말이지.”
“흥! 가만 내버려 두지 않으면? 공격이라도 한다는 거야?”
“소저 같으면 음문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 가만 내버려 두겠어요? 이왕 싸움이 시작됐는데, 선수 칠 수 있으면 쳐야지. 아마 지금 그쪽 난리 났을 겁니다.”
“지금 이 사람이 뭐라는 거야? 어디서 흰소리를 늘어놓고 그래!”
옆에 있던 해자수가 발끈해서 말했다.
“에이, 에이! 찌끄러기는 가만히 앉아있어야지? 내가 아씨에게 순한 양처럼 말하니까, 너도 내가 만만해 보여?”
“그게 아니라…… 말이……”
해자수가 몸을 움찔거렸다.
“이 사람들, 그 무엇이냐. 다 죽이지는 않을 것 같고. 그래도 많은 사람이 죽겠죠? 아무래도 공격이란 걸 했는데. 그래도 몇몇 사람은 살려서 끌고 갈 것 같은데.”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그 사람들 살리고 싶으면, 그 뭐야.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거. 그거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뭐야!”
“아! 지금 당장 대답을 들으려는 건 아니고, 내일까지 생각 좀 해보고 답 주쇼.”
광저가 히죽 웃었다.
호발귀가 홀리 앞에 앉았다.
그가 홀리를 쳐다본다. 묵묵히 쳐다본다.
“왔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
홀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평생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몸은 좀 어때?”
기껏 한다는 말이 안부다.
“자기가 찔러놓고 몸 상태를 묻는 거야? 어떨 것 같아?”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산 것만 해도 감사해라?”
“……”
“괜찮아. 며칠 쉬면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아예 죽이려고 작심하고 찔렀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지.”
홀리가 붕대 감긴 배를 만졌다.
“음문으로 갈 건가?”
“그건 왜?”
“이건 순전히 내 욕심인데, 가지 않았으면 해서.”
“무슨 소리야? 갑자기 구애라도 하는 거야? 지금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하는 거지?”
“음문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를 판에 이런 말을 하는 건 미친놈이겠지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내 욕심만 말하는 거니까…… 내 옆에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왜?”
“내가 미치면 날 조종할 생각이잖아?”
“그래.”
“그러니 날 따라다녀야지. 하지만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기면 날 혈마로 남겨두지 말고 당장 죽여달라고. 이건 부탁. 조정할 수 있으면 죽일 수도 있을 테니까.”
홀리가 호발귀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만약을 위해서, 만약 혈마가 되면 죽여달라는 거지? 옆에서 지켜보다가.”
“또 하나, 혈마를 조정하는 주문인가 뭔가 하는 것,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는 기미가 보이면 손을 써야 하니까.”
“무슨 손을 써?”
“널 죽여야지.”
“뭐!”
홀리를 호발귀를 빤히 쳐다봤다.
혈마 조종술을 타인에게 알려주려는 기미만 보여도 죽이겠단다. 그래서 옆에 있어야 한단다.
한 마디로 옆에 두고 감시하겠다는 뜻이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강압이다. 말로는 옆에 있어 달라고 하지만, 떠날 수 없다는 경고다.
“지금 그 말, 협박이지?”
“말이 어떻게 그렇게 되네. 그러니까 순전히 내 욕심이라고 말했던 건데.”
“간단한 이야기네. 당신이 혈마가 되면 난 혈마를 조정해서 세상을 피로 씻을 거야. 당신 욕심대로는 안 돼. 지금 날 죽이면 혈마를 조종할 사람이 없을까? 천만에. 혈마는 조정이 필요 없어. 통제받지 않는 혈마는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을 죽여. 옆에는 있어 줄게. 잘 감시해. 정 불안하면 죽이고.”
“혈천방 본방으로 갈 거야.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아픈 것보다도 멀쩡한 것이 낫겠지.”
“그래서?”
“빨리 회복해라.”
“그러려고.”
호발귀가 일어서서 걸어갔다.
“내 인생, 왜 이러냐?”
홀리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아씨 인생, 처음부터 비비 꼬이는 것 같은데요. 한참 청춘이신데.”
“그렇지? 비비 꼬이는 거 맞지?”
“하아!”
해자수가 한숨을 토해냈다.
남녀가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운명이다. 우선권은 남자에게 있다. 남자는 지금도 여인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 오면 그때는 우선권이 여자에게 넘어간다. 여자가 남자를 죽이든 개똥밭에 굴리던 여자 마음이다.
결코, 아름다운 관계는 아니다.
“아씨, 어차피 서로 칼을 꽂아야 할 것 같으면, 지금부터라도 뭐 호기심이라든가 끌린다든가 그런 말씀 마시고 앞으로는 냉정하게! 냉정하게! 아셨죠?”
“그래야겠어. 호법 좀 서줘. 운공하게.”
“운공요? 이 몸으로요?”
“빨리 나아야지. 멀쩡해야 싸울 거 아냐.”
홀리가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저러나 음문은 괜찮겠죠?”
“몰라. 알아서 하겠지.”
“허 참…… 아무리 그래도 같은 핏줄인데.”
홀리가 좌정한 채 운공을 시작했다.
음문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약육강식(弱肉强食)을 배운다. 약한 자는 먹힌다. 강자만 생존한다. 사슴처럼 어미가 약하면 새끼가 잡아먹혀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음문 사람들은 그런 세계에 익숙하다.
자기 생명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누구에게 의존하면 안 된다. 설혹 부모·형제가 타인에게 맞아 죽었다고 해도 그가 약해서 죽은 것일 뿐, 상대방은 죄가 없다.
그런 식의 사고를 배웠다.
음문이 공격당한다?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겠지만, 음문 사람에게는 ‘그래서?’ 하는 물음을 들을 것이다.
광저의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
츠으읏!
홀리는 진기를 일으켰다.
운공을 시작했다.
내상은 시간이 지나가면 나을 수도 있지만 꾸준한 운공만이 해답이다. 운공으로 내상을 다독여야 한다. 끊어진 곳을 잇고, 꾸준히 활로를 열어줘야 한다.
홀리는 그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단 호발귀 옆에 있어야 하니 아픔을 참았던 것이다
이제 운기를 한다. 호발귀가 옆에 있으라고 했으니 거리낄 이유가 없다.
홀리는 두 손을 단전에 모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