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六章 촉발(觸發) (3)
홀리가 눈을 떴다.
“치잇! 내가 당한 거야?”
홀리는 붕대로 칭칭 감긴 배를 보면서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호발귀에게 참패당했다는 사실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역시 혈마야.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이 다짜고짜 그냥 푹 찔러버리네?”
홀리가 호발귀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방금 검 맞은 사람답지 않은 행동이다. 당홍이 상처를 치료했지만, 지혈을 막 마친 후라서 상당히 아플 텐데 눈썹 한 올 찌푸리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아이고 아가씨.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니깐요. 그러니까 사람 봐가면서 칼을 뽑아야지,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니까. 올해 단단히 액땜한 줄 아슈!”
홀리가 깨어나자 해자수가 호들갑을 떨면서 반색했다.
“방금 나 죽을 뻔한 것, 맞지?”
“그걸 말이라고요! 여기 계신 이 선녀분께서 구해주지 않았으면 벌써 염라대왕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그러게 왜 혈마에게 덤비고 그래요!”
“나 찌른 검초, 뭐였어?”
홀리가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거참 혈마 무리는 죄다 예의는 꿩 구워 먹었나? 어떻게 윗사람, 아랫사람 가리지 않고 반말지거리야. 반쯤 죽은 것 살려줬으면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옆에서 듣고 있던 도천패가 툭 쏘아붙였다.
해자수가 당홍을 가리키면서 상처를 치료해준 분이라고 설명까지 했는데도 홀리는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호발귀에게 반말을 툭툭 던진다.
모든 게 언짢았다.
더욱이 홀리가 음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쪼끔 남았던 호의조차 싹 가신 후다.
“호호호!”
홀리가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우리 음문에 대해서 말했구나?”
홀리가 해자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말 안 해도 어차피 알게 될 거 툭 까놓고 말하지 뭐. 죽인다고 말하고 죽이면 미리 대비도 할 수 있고,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네.”
“아저씨는 바보야. 대비도 할 수 있지만, 적의를 품게 되잖아.”
“아! 그렇구나.”
해자수가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음문과 혈마의 관계를 뭐라고 말했어?”
“뭐라고 말하긴요. 사실 그대로 말했지. 음문은 혈마의 수족, 아니 심복이었다. 제일로 충성스럽던 심복 중의 심복이어서 혈마 사후에 참 고단했다. 이렇게요.”
“심복?”
“그것도 뭐 사실이라서.”
해자수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저 남자는 ‘무슨 심복이 이따위야?’하고 생각하겠네?”
홀리가 도천패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것도 있고, 기껏 상처를 보살펴줬는데 모른 척하니까 화도 나는 것 같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럴 때는 빈말이라도 고맙다고 한마디 해주는 거예요.”
“호호호!”
홀리가 다시 웃었다. 그리고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혈마 전인. 아직 대답 안 했어. 내 배 쑤신 검초, 뭐냐고 물었잖아?”
“그게 중요한가?”
호발귀가 말했다.
“중요하지. 검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 귀화미요공은 피했는데, 검을 보지 못했어. 뭐였어?”
“그럼, 사람부터 돼야지. 고맙다는 말부터 해.”
“호호호!”
홀리가 또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깔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 웃기지 마. 그런 말은 같은 사람일 때 하는 말이고, 난 지금 네 주인으로서 노비에게 묻는 거야. 그러니 착한 노예라면 순순히 대답해야지?”
순간, 모두 홀리를 쳐다봤다.
홀리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주인? 노예?
헛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홀리가 천방지축인 것은 틀림없지만, 허투루 말하지는 않는다.
“무슨 소리지? 주인?”
“이봐, 호발귀. 당신이 혈마가 되면 음문이 주인이 되는 거야. 내가 당신 주인이라는 거지. 당신은 내 도구라고. 지금부터 주인한테 잘 보일 생각 없어?”
“아! 그건 말하면 안 되는데.”
해자수가 옆에서 탄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홀리는 호발귀를 쳐다보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도천패가 참다 참다 못해서 화를 벌컥 냈다.
당홍이 도천패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조용히 하라고 살그머니 손목까지 쥐었다.
호발귀가 인상을 찡그린다.
홀리의 말이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 이런 행동은 도천패나 당홍이 전혀 모르는 중차대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홀리의 말에서 진심이 읽혔다.
이런 말을 허투루 할 사람은 세상천지에 없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홀리가 말했다.
“당신, 혈마 무공에 허점이 있다는 거 알지? 어쩌면 이미 경험했을 거야. 아냐, 틀림없이 경험했어. 지금 이 정도 무공이라면 정신을 까딱 놓을 뻔한 경험을 숱하게 했을걸? 솔직히 혈마가 되는 과정은 잘 모르지만, 당신은 이미 느끼고 있을 거야.”
“계속 말해봐.”
“호호호! 뭘 더 말할까?”
“혈마 저주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말해봐. 뭘 더 알지?”
“저주? 우리 말은 바로 해. 이건 저주가 아니라 폭주잖아. 내 말이 틀렸어?”
“맞아. 폭주.”
“그래. 이제 말이 통하네. 그렇게 순순히 시인하니 좋잖아. 당신이 혈마가 되면 그때부터 우리 음문 손에 떨어져. 우린 혈마를 조정할 수 있어.”
“아! 아씨, 제발!”
해자수가 옆에서 죽는시늉했다.
홀리는 지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다.
이런 말들은 호발귀가 혈마가 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숨겨야 할 말이다. 설혹 음문에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숨기는 게 낫다.
홀리가 철이 없어서 말하는 건가? 그건 아닌데. 일부러 사람 비위를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런 말을 하나?
홀리가 말했다.
“아까 귀검이 슬그머니 사라졌지? 우리와 절대 충돌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 혈천방이 왜 우릴 건드리지 않는 줄 알아? 우리가 숨어있는 장소를 정말로 혈천방이 몰랐을까? 이제는 믿는 게 좋아. 우리에게는 혈마를 조정할 수 있는 비술? 주문? 그런 게 있어. 혈천방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거지.”
호발귀는 묵묵히 말하는 홀리를 쳐다봤다.
도천패와 당홍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말에 기가 막혀서 말을 잊었고, 해자수는 어쩔 줄 모르고 입맛만 다셨다.
호발귀가 혈마가 되나? 진기 폭주? 그러면 혈마가 되고, 그때부터 음문 조정을 받아?
“혈마가 살아 있을 때, 혈마는 노예였어. 싸움 잘하는 노예. 원래 주인은 우리였고. 혈천방은 눈치만 봤고. 자, 이제 말해. 내 배 쑤신 검초가 뭐야?”
저벅! 저벅!
호발귀가 배에 붕대를 감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홀리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 주문이란 것, 내겐 말해줄 생각 없지?”
“당연하지.”
“그러면 입 다물어.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그렇다고 혈마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순간, 호발귀가 혈마의 목을 콱 움켜잡았다.
“혈마가 되기 전에 네 목에 먼저 꺾여. 경고하지. 앞으로 음문 사람들,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넌 운이 좋아서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살지 못해. 즉사할 거야.”
호발귀는 반드시 그런 칼을 쓴다.
호발귀의 말을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홀리가 진심으로 말한 것처럼, 호발귀도 진심으로 말한다. 누가 되었든 음문 이름을 들먹이면 그 즉시 죽을 것이다.
홀리가 말했다.
“아직도 말 안 하네? 검초?”
“혈수직자(血髓直刺).”
“아! 혈수직자. 그게 혈수직자였구나. 뭐? 혈수직자! 그걸 내게 쓴 거야? 너 정말 날 죽일 생각이었구나?”
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사람은 빠르게 이동했다.
홀리가 선물을 줬다. 천살단 잡랑이 근처에 와있다는 고급 정보를 건네주었다.
잡랑은 두렵지 않다. 귀찮을 뿐이다. 살단 총주도 싸울만하다. 다시 싸우게 되면 기필코 목숨을 빼앗아야겠다. 죽기 전에는 떨어져 나갈 사람이 아니니까.
정작 두려운 것은 진기 폭주다.
독섬칠공이 역천금령공의 폭주를 막아주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러니 불필요한 싸움은 하지 않는 게 낫다.
두렵지 않은 상대이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싸우지 말아야 할 상대가 되어버렸다.
쒜에엑! 쒜엑! 쒜에엑!
세 사람은 산길을 치달렸다.
홀리와 해자수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죽음으로 경고를 했는데도 사뿐히 무시하고 여전히 따라붙었다.
“저 사람들, 계속 끌고 갈 거야? 떨굴 거면 여기서 정리하고.”
당홍이 말했다.
“뒤를 막아주잖아. 일 좀 하라고 하지 뭐.”
호발귀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러네. 난 나라도 나서서 정리할까 생각 중이었지.”
도천패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홀리와 해자수는 뒤쫓아오면서 뒤를 지워주고 있다. 호발귀가 남긴 흔적을 말끔히 지웠다.
두 사람도 잡랑이 따라붙는 건 원하지 않는다.
잡랑은 굶주린 늑대와 같다. 먹이를 놓치지 않는다. 무리가 전멸해도 달려든다.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한칼이라도 먹이려고 한다.
상당히 귀찮은 존재들이다.
“그럼 살단은 저 사람들이 치워주고 있고, 혈천방만 남았네? 귀검이란 사람 또 올까?”
호발귀가 고개를 저었다.
호발귀는 귀검을 딱 한 번 만나봤다. 그것도 싸우기 전에 몇 마디 나눈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 정도 대화만으로도 귀검이라는 사람을 알 것 같다.
귀검은 ‘혈마를 조정하는 비술’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혈마록도 귀찮아서 호발귀를 죽이려는 사람이었다.
귀검은 무인이다. 검사다.
잔악한 면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술수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계책 같은 것은 무시하고 무조건 정면으로 부딪치는 고지식한 무인이다.
그런 사람이 음문 사람을 피했다면, 그도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음문 비술을 알아내는 것이 혈천방 제일 목표라는 말, 거짓이 아닌 것 같다. 혈천방이 원하는 것은 해독하기 어려운 혈마록이 아니다. 혈마록을 수련한 혈마 전인이다.
혈천방의 목적은 혈마 전인을 얻고, 조정 비술을 얻어서 혈마를 움직인다. 세상을 벌집 쑤시듯 쑤셔놓는다. 온 세상을 아비규환으로 만든다.
귀검은 모든 행동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지만, 혈천방 제일 목표만은 건드리지 못한다.
홀리가 따라붙는 한, 귀검은 나타나지 않는다.
홀리가 대단한 역할을 해준다. 살단도 떨구고, 귀검도 물러서게 만들고.
“귀검이 혈마 무공을 봤다면 널 죽이는 대신에 납치해갈 수도 있잖아. 원래 데려오라고 했다며?”
도천패가 말했다.
순간, 호발귀가 걸음을 뚝 멈췄다.
그는 선 채로 뭔가를 잠시 생각했다.
아주 깊고 고요한 생각을 할 때는 저절로 무심무실공을 일으키는데, 지금이 그렇다.
고요하고 잔잔한 기운이 전신에 퍼진다.
호발귀가 매우 평화로워 보인다. 참선하는 스님의 고요함이 은연중에 풍긴다.
문득, 호발귀가 말했다.
“뒤로 물러서서 따라와 줘. 아니다. 차라리 홀리와 합류해서 같이 움직이는 게 낫겠다.”
“뭐?”
“나와 싸우지 않고 날 납치하려면 그만한 유인물이 있어야 해. 날 끌어낼 수 있는. 그런 게 뭐가 있을까? 귀검이 움직일 수 있는 것 중에.”
“무슨 소리야?”
“귀검은 강하 사건을 알아.”
“너!”
도천패가 미간을 심하게 일그러트렸다.
호발귀가 하려는 행동을 짐작했다. 한 마디로 귀검과 다시 싸우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내 말대로 해줘.”
호발귀가 도천패를 쳐다보며 말했다.
귀검이 호발귀를 유인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 강하 사건을 안다면, 당시 호발귀 뒤를 쫓았던 귀무살 다섯 명 중 한두 명쯤은 미끼로 던져야 한다.
호발귀는 그 미끼를 받을 생각이다.
“홀리가 살단을 떨궈주니까 한결 편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귀검은 상대해봐서 알아. 지지 않아.”
“휴우! 지면 또 어떠냐? 어차피 칼날 위를 걷는 인생들인데. 알았다. 뒤에서 따라갈게.”
호발귀가 죽은 벗들을 위해서 복수를 한다는데 어떻게 말리나. 지금 당홍이 안내하는 곳도 귀무살이 머물던 장소다. 한데 굳이 귀무살 수련장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당연히 기다려야지. 그들이 재발로 온다면 기꺼이 받아야지.
“죽지만 마라. 그러면 돼.”
도천패가 호발귀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즉시 당홍의 손을 잡고 뒤로 쭉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