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六章 촉발(觸發) (2)
“이게 무슨 일이래?”
당홍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잠자리를 깔아놓으라고 말한 장소에는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잘려서 어수선하고, 돌가루도 튀었다.
누가 봐도 싸움 흔적이 역력했다. 더욱이 부러진 검도 두 자루나 떨어져 있지 않은가.
“웬 놈들이 난장을 피운 거야! 뭐 하는 놈들이야! 이것들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도천패가 짊어지고 온 멧돼지를 내팽개치고 스릉! 칼을 뽑았다.
중년인 해자수는 귀화미요공 인광에 잠시 잃었던 시력을 회복했다.
해자수가 눈을 끔뻑거리면서 말했다.
“아! 이거 참…… 말하긴 해야겠는데, 난감하네. 뭐 난 힘이 없으니 백 마디를 해도 들어줄 사람도 없고. 힘없는 사람이 하는 말은 다 그렇지 뭐. 다른 건 나중에 말하고, 우선 아씨부터 살립시다. 그래도 음문에서는 제일 사람다운 사람인데.”
“아씨? 음문?”
당홍이 도천패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아느냐는 표정인데, 도천패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문’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어허, 참. 사람 인심 한 번 야박하네.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니까.”
해자수가 배에 검을 틀어박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손대지 마! 손대면 죽어!”
당홍이 소리쳤다.
해자수는 여인을 안아 일으키려다가 움찔 놀라서 손을 멈췄다.
“그거 검에 검기가 담겨 있어. 검을 움직이면 검기가 터져서 오장육부가 갈기갈기 찢어져. 무슨 사람이 여자한테 이렇게 검을 써? 아예 죽이려고 작심했구나?”
당홍이 호발귀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호발귀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당홍이 여인에게 다가가서 완맥을 살며시 움켜잡았다.
“아직 심맥은 붙어 있고, 회복하려면 시간깨나 걸리겠는데? 검을 너무 심하게 썼어.”
“그렇게 위험해?”
도천패가 물었다.
“살릴 거지?”
당홍이 호발귀에게 물었다.
호발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 생각으로 검을 쓰기는 했지만, 혈마 무공이 아니라고 하니 일단을 살릴 생각이다. 또 음문이 혈마 심복이라고 하니, 어떻게 된 사연인지도 알아볼 생각이다.
호발귀는 뒤늦게서야 여인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살릴 거면 뭐 이렇게까지 손을 써? 말을 말아야지. 저놈의 인정머리하고는. 아직 죽지 않은 게 다행인 줄 알아! 따뜻한 물 좀 끓여오고. 팔팔 끓는 물로. 이구!”
당홍이 고개를 내두르며 여인의 겉옷을 찢었다.
부욱!
순간, 여인의 속살이 환히 드러났다.
“뭘 봐! 고개 안 돌려!”
당홍이 빽 소리쳤다.
“난 해자수라고 하는데, 그냥 노이(櫓二)라고 불러. 이름 부르기도 귀찮으면 그냥 노형이라고 불러도 되고. 뭐 난 아무렇게나 불려도 상관없으니까. 아! 음문. 음문에 대해서 말해야지? 그러니까 음문이…… 음문이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고생했다고 해야 하나? 미친놈? 미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중년인, 해자수가 말했다.
* * *
혈마에게는 심복이 많았다.
혈마 심복은 악귀, 살인귀, 사마외도라고 불린다.
하루라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살인귀들이며, 살인 쾌감에 중독되어서 사람을 죽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 이상자들이다.
혈마 심복 중에서도 특히 살인을 즐기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음문이다.
음문은 약탈, 방화, 살인, 강간 등등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즐겼다.
혈마가 한 명을 죽이면, 음문은 열 명 스무 명을 죽였다.
그 모든 악행이 ‘혈마’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혈마의 명령, 혈마의 지시, 혈마의 심중을 헤아려서……
혈마 이름을 앞세우는 한, 음문의 살인을 막고자 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아니, 없었다.
혈마는 음문도에게 자신의 절기를 전수했다.
신공은 ‘자질 부족’을 이유로 전수하지 않았고, 초식만 몇 수 정도 전수했다.
혈마 입장에서는 지나가는 길에 물 한 모금 먹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심복들이니 조금 더 강해져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혈마는 초식만 전수했다는 데도, 음문의 무공은 가히 무적에 가까웠다.
어떤 고수도 음문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소림사(少林寺), 무당파(巫堂派), 화산파(華山派) 등등 많은 문파에서 고수를 보냈지만 돌아간 사람은 없다.
검을 들고, 죽기를 반복했다.
혈마 수족 중에는 ‘혈세천하(血洗天下) 후 천하경영(天下經營)’을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음문 살겁을 걱정했다.
지나친 살겁은 천하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혈마에게 직언했다.
이들은 혈세천하에서 이름을 따와 혈천이라고 불렀다.
자연히 음문과 혈천은 서로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적대관계가 되어 버린다.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은 음문이 쥐었다.
혈마는 매일 핏물 위를 걸었다. 시신을 깔고 앉아서 식사했고, 잠을 잤다. 혀를 자르거나 손발을 떼어내는 것은 잔인한 일에 속하지도 않았다.
세상이 그럴 때였으니 혈마의 뜻에 부합하는 음문이 득세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다가 혈마가 느닷없이 죽어버린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불쑥 일어난다.
이때, 혈천 마인 들은 무척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혈마 없는 혈세천하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정도 문파와 목숨을 건 사투인데, 이쪽 역시 승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천년 무림이다.
정도인 몇 명이 아니다. 혈마라는 절대 강자가 사라지면, 천 년 동안 이어온 무림 저력이 일시에 일어날 것이다. 들불처럼 일어나 혈마 수족을 단번에 태워버릴 것이다.
승산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치(政治)!
혈천은 비밀리에 정도 무림과 회합을 했다.
그 자리에서 혈천은 음문을 내주기로 약조한다. 음문 무인들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정도 무인이 일거에 들이닥쳐서 척살한다는 내용이다.
약조는 정확하게 이행된다.
이때, 음문 무인들을 척살하는데 앞장섰던 무림 집단이 천살단이다.
천살단은 음문 살인귀들을 죽이기 위해 철저하게 양성된 특수 살수 조직이다.
음문 살인귀는 지리멸렬했다.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손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용케 목숨을 부지한 자들은 어느 구석엔가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혈천은 더는 음문 혈귀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혈마가 일으킨 대겁이 끝났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제 천살단의 칼은 혈천을 향해야 한다. 아니면 혈천이나 천살단이나 모두 해체하고, 혈마가 탄생하기 이전 상태로 복귀해야 한다.
이때, 혈천 마인들이 혈천방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정식으로 개방(開幫)했다.
웃기는 것은 혈천방이 개방할 때, 천살단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혈천방이 어디 숨었는지 알 수 없어서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천살단이 일부러 혈천방을 봐주고 있다는 냄새를 지우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온 천살단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혈천방은 지금도 피해 다닌다.
천살단은 지금도 혈천방을 찾아서 전국을 뒤진다.
실제로 지금은 혈천방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천살단이 상대하기 힘들다는 평가도 있다.
이것이 두 문파의 숨은 내력이다.
혈천방과 천살단은 암묵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용인한다. 일정한 선에서 준동하는 것을 이해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의 완전한 소멸을 원치 않는다.
두 문파는 서로가 이득을 주면서 서로가 공존하는 체계다. 공존, 공생 관계다.
하지만 음문도는 다르다. 그들은 철저히 척살 대상이다.
혈마가 준동할 때, 그들이 저지른 악행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혈천방과 천살단은 음문도만 보면 즉시 검을 뽑는다.
음문도는 두 세력을 상대할 수 없다. 그래서 지켜보기만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깊은 산속에 숨어서 자신들만의 마을을 형성했다.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음문도는 먼 훗날을 기약했다. 힘이 생길 때까지, 세력이 커질 때까지 울분을 참기로 했다.
그렇게 한 대가 죽고 또 한 대가 죽었다.
혈마를 알던 사람은 모두 죽고, 혈마를 모르는 사람만 남았다. 그리고 그들이 혈마 무공을 사용한다.
그들에겐 혈마는 존재 가치가 없다.
혈마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충성을 바치거나 수족이 될 마음은 없다.
다만,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혈마가 필요하다.
음문은 당연히 무림에 나오고 싶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 불쑥 나오면 여지없이 두 문파를 상대해야 한다. 모르긴 해도 호발귀보다 더 강한 공격을 받을 것이다.
음문도는 지금도 중원에 나올 수 없다.
이백 년 전에 있었던 혈겁이 아직도 사람들 뇌리에 살아남아 전해진다.
음문도가 무림에 나서려면 일거에 무림을 압도할 만한 힘이 있거나, 타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만한 힘은 갖추기 힘들고, 남은 것은 명분뿐이다.
현재, 혈마의 정통성은 혈천방으로 이어졌다. 혈천방이 혈마록을 가고 있으니 혈마의 전인인 셈이다.
그런데 호발귀가 나타났다.
호발귀는 혈마 무공을 수련했으니 혈마록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통성을 갖췄다.
호발귀가 혈마 전인으로 무림에 나서면 혈천방은 호발귀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니면 혈천방의 모든 역사에서 혈마를 제외해야 한다.
호발귀 옆에 음문이 선다면 어떻게 될까? 음문이 혈마의 정통성을 잇는다.
호발귀와 함께 무림을 활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호발귀가 혈마처럼 강해야 한다. 진짜 혈마가 되어야 한다. 그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음문도는 한낱 잡종 취급받으면서 척살 당할 것이다.
그럴 수 있나? 호발귀가 그렇게 강할까? 그렇게 강하기만 하다면 더없이 좋다. 옆에서 살짝 도와주는 척만 해도 옆자리에 앉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호발귀가 혈마처럼 강해진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고, 그러면 옛날 혈천방이 음문도에게 했던 일을 이번에는 역으로 음문이 하면 된다.
음문이 혈마 전인 호발귀를 죽이는 것이다.
과거를 회개하고, 깨끗이 손을 씻은 새로운 무인들이 혈마 전인을 죽인다!
음문도가 사용하는 무공은 혈마 무공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혈마 무공을 버리고 실전적인 무공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혈천방은 마인 집단이니 어떤 행동을 해도 자유다. 하지만 천살단은 정도 집단이다. 이백 년 전 선조가 살인자였다는 이유로 까마득한 후손까지 죽일 수 있는가!
음문이 호발귀를 찾는 것은 생존 전략이다.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필사적인 방책이다. 음문에게 호발귀는 유일하게 중원으로 나올 수 있는 돌파구인 셈이다.
* * *
해자수는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 줌 빠짐없이 했다.
어떤 말도 숨기지 않았다. 현재, 음문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생각을 전부 말했다.
음문은 매우 단순하다. 간악하기는 해도 속임수가 없다. 호발귀를 죽이려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당장 내일이라도 달려들 것이다.
굳이 속일 필요가 없다.
“이런!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어디서 잔머리만 굴리고 있어! 내 이것들을 그냥 콱!”
도천패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혈천방과 천살단이 어떤 관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들과는 좋은 사이가 아니다.
하지만 음문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자기들 살자고 호발귀를 죽이겠다니, 생각만 해도 화가 치솟는다.
“생각해보니 참 이상하네? 음문이 날 죽일 거라면서, 나더러 음문 사람을 구해주라는 건 뭔데?”
호발귀가 해자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면 누구든 음문에 화가 나게 되어 있다. 검에 맞아서 쓰러진 여인이 전혀 불쌍하지 않다. 솔직히 치료해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일어날 것을 빤히 알면서 모든 말을 해준 이유가 뭔가?
“말이 안 되잖아. 이쪽은 그저 간만 보자고 살짝 찔러봤는데, 그런 식으로 죽자 살자 찔러대면 어떡해. 이건 불공평하지. 아씨가 깨어나면 다시 붙어보든가.”
“아까부터 아씨, 아씨 하던데, 어떤 관계야? 시종이야?”
“시종은 무슨. 여기 아씨가 촌장의 여섯 번째 딸이거든. 촌장에게 자식이 여섯 명 있는데, 다 씨가 달라. 어쩜 그렇게 정력이 좋은지, 부럽기도 하고. 음문촌을 들락거리면서 오랫동안 아씨라고 불렀더니, 이제 입에 쫙 붙어버렸네? 킥킥!”
해자수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