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五章 귀검(鬼劍)(5)
저벅! 저벅! 저벅!
귀검이 거침없이 걸어왔다.
귀검은 호발귀가 들고 있는 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한달음에 쭉 걸어왔다.
쎄에엑!
그가 검을 쳐냈다.
‘빠르다!’
호발귀도 검을 쳐냈다.
슛! 슛! 슈웃! 슈웃!
두 사람은 서로를 노리면서 검광을 쏟아냈다.
검의 길이는 삼 척, 두 사람의 거리도 삼 척이다. 딱 검의 길이만큼 남겨놓고 검을 휘두른다.
검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 지나간다 싶으면 어느새 다시 달려든다. 간신히 피하면 또 덮친다.
덮치고, 피하고, 쓸어오고, 피하고, 찔러오고 피한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건 아니다. 양쪽이 서로 공격을 한다. 방어 초식은 없다. 무조건 신법으로 피한다. 검은 오직 공격에만 쓰인다.
호발귀는 무정삼절을 펼치려고 했다.
귀검의 검에 가장 적합한 검이 무정삼절이 아닐까 싶었다.
한데 막상 싸움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싸움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건 개싸움이다.
물고 물어뜯는 싸움이다. 강함은 필요 없다. 오직 빠름만으로 대결한다. 강함을 쏟아내기 위해서는 힘의 집중이 필요한데, 그만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숨 쉴 틈도 없다.
상대가 어떤 초식을 펼치는지 살펴볼 필요도 없다. 초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무조건 검을 쓴다. 가장 빠르게, 가진 신랄하게, 가장 쾌속한 변화를 추구한다.
빠름을 따라잡지 못하면 당한다.
쒜에엑! 쒜엑! 쒜엑!
검이 머리, 어깨,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호발귀도 머리, 가슴, 허벅지를 베었다. 물론 맞추지는 못했다. 피하면서 다시 반격해 왔고, 호발귀도 피했다.
슈웃! 슛! 슛! 슛!
귀검이 갑자기 찌르는 검을 사용했다.
연속해서 찔러온다. 머리를 찌르고, 피했다 싶으니 다시 눈을 찌른다. 가슴, 배, 허벅지, 다시 머리 정신없이 찌른다. 마치 창수(槍手) 십여 명이 합공으로 창을 찔러대는 것 같다.
팟!
호발귀는 땅을 박차고 뒤로 빠졌다.
귀검은 바짝 따라왔다. 호발귀가 두 걸음 물러서는 동안 십여 차례나 검을 찔러왔다.
찌이익! 찌익! 찌이이익!
옷이 사정없이 찢겨나갔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모르겠다. 맞은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지금은 찔러오는 검에만 신경 쓰기에도 부족하다. 또 머리를 찔러온다.
“훅!”
호발귀는 숨을 잇지 못하고 격하게 토해냈다.
퍼억! 퍽!
그 한 모금의 숨!
호발귀는 숨을 토해내는 대가로 검을 두 번이나 맞았다.
가슴을 찔리고, 옆머리를 찔렸다.
반응이 빨라서 깊게 찔리지는 않았다. 칼 장난하다가 약간 깊게 찔린 정도다.
주루륵!
가슴과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귀검의 검은 빠르면서도 정확했다. 살짝 찔렸다고 생각했는데, 핏물이 그치지 않고 떨어진다.
“지혈하지.”
귀검이 뒤로 물러섰다.
순간, 호발귀는 기가 질렸다.
상대가 여유를 부린 것인가? 조롱인가? 아니면 강자의 방심인가? 너 같은 것은 언제든 벨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귀검은 여전히 차분하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하다.
그는 상대가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핏물을 뚝뚝 흘리면서 정신없이 떠밀리는 것보다는 지혈한 후, 다시 싸우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응급조처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할 것도 없다. 그때는 귀검도 흥미를 잃는다. 깨끗이 죽일 것이다.
어떻게 이런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꾸욱! 꾹!
호발귀는 머리와 가슴을 지압했다.
등여산에게 태산금나를 배웠다.
그녀가 누른 압점을 기억한다.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세기로 눌렀는지 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배운 것이 아니라 시술받은 것이다.
하지만 호발귀는 그 한 번의 시술로 태산금나의 요체를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몸으로 하는 일은 쉽게 기억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귀검이 뻗어내는 검초를 이해한다. 어떤 방식으로 검을 쓰는지 봤다.
슷!
호발귀가 검을 들었다.
그러자 귀검이 사정없이 쏘아왔다. 공격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즉시 공격했다.
쓔우웃! 쒝! 쉐에에엑!
검이 연달아서 쳐온다.
이번에는 찌르는 검이 아니다. 후려치는 검인데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회전!’
이번에 귀검이 구사하는 검초에는 회전력이 가미되어 있다.
구심력과 원심력이 들어있다. 몸의 움직임은 미미한데, 검은 무척 빠르게 움직인다.
변화는 손가락 관절을 이용한다.
손끝으로 살짝 툭 치는 것만으로도 검의 방향이 완전히 틀어진다. 머리를 노리는 것 같다가도 허벅지로 쓸어온다. 머리부터 다리까지 모든 범위를 손끝 하나로 노릴 수 있다.
‘뭐 이런!’
호발귀는 싸울수록 진흙 구렁텅이로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귀검은 초식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초식을 구사한다. 무림이 알고 있는 초식이 아니라 몸이 만들어내는 초식, 동작의 조화를 추구한다.
전형적인 싸움꾼이다.
까앙! 깡깡깡! 까아앙!
호발귀는 본격적으로 검을 부딪쳤다.
지금까지는 검을 부딪칠 필요가 없었다. 귀검이 빠르면 자신도 빨랐다. 같은 빠름으로 상대했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해냈다.
그런데 점점 늪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싸움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검을 부딪쳐서 속도를 늦춰야 한다. 혈마 무공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다못해 귀화미요공이라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쒯! 쎄에엑! 쒜엑!
귀검이 다시 검을 변화시켰다.
그러자 호발귀의 검은 허공을 후려쳤다. 검과 검을 맞대려고 친 검이 헛손질했다.
‘위험!’
본능적으로 위험을 자각했다. 으레 헛손질 다음에는 치명적인 반격을 당하게 된다.
위기는 기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싸움판을 바꾸지 못한다. 귀검이 원하는 싸움을 하다가 끝내는 절명하게 되어 있다. 싸움의 끝이 예견되지 않는가.
‘제길!’
호발귀는 툴툴거리면서 배를 내줬다.
쓰걱!
귀검이 그어낸 검은 뱃살을 가르며 지나갔다.
호발귀는 배가 갈리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일부러 방비하지 않았다. 살을 내주면서 반격한다. 이번 기회에 판을 뒤집는다.
팟!
호발귀의 왼손에서 귀화미요공이 터졌다.
귀검이 움찔거렸다.
지극히 미미한 행동이었지만, 호발귀는 분명히 느꼈다. 귀검이 휘청거렸다.
무정삼절 제일식 멸천겁!
파라라라락!
호발귀의 검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흐물거렸다. 낭창거리면서 춤을 추었다.
검초가 열여덟 개, 검초마다 십팔 변!
모두 삼백이십사 개의 검이 터진다. 일시에 귀검 전신을 모조리 격타한다.
멸천, 하늘이 무너진다.
겁(劫), 하늘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났다가 무너질 때까지의 시간이다. 무척 길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길다.
멸천겁을 당하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오직 죽음만 기다린다. 검이 다가오는 시간은 지극히 짧은데, 당하는 사람은 억겁처럼 느껴진다.
멸천겁은 역천금령공이 주도한다. 화독강도 담겼다.
검이 공기를 찢을 때마다 뜨거운 기운과 비릿한 독기가 함께 흘러나간다.
막을 수 없다!
호발귀는 자신했다. 남은 것은 귀검이 죽는 것이다. 검에 사지가 꿰뚫린 채 죽는다. 그런데,
쫘아아아악!
귀검이 호발귀의 검초 한가운데를 쭉 찢었다.
위에서 떨어진 검이 멸천겁을 찢으면서 내려온다. 역천금령공이 무너진다. 화독강이 아무런 독효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떨어지는 검만 보인다.
귀검은 그 짧은 시간에 귀화미요공에서 벗어났다.
멸천겁이 정확하게 갈라지고 있다.
순간, 호발귀는 퍼뜩 구결 한 구절을 떠올렸다.
- 이동적정점시저일점(移動的頂點是這一點). 점이동(點移動), 동이점(動移點). 동정부동(動靜不動), 부동정동(不動靜動). 일이화백(一而化百), 백이귀일(百而歸一). 하이동지(何以動之)!
움직임의 정점은 점이다.
점이 움직임이고, 움직임이 점이다.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나 움직인다.
하나가 백으로 변하고, 백이 하나로 귀일한다.
왜 움직이려고 하는가!
‘천변마라수(千變摩羅手)!’
원충노인의 팔십일수 중 마지막에 수록된 수공(手功)이다. 배수의 정점이며, 손놀림의 극치다.
호발귀는 천변마라수는 상징적인 의미로만 해석했다.
원충노인의 수공을 모두 배우면 천변마라수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이 아니다. 천변마라수 역시 하나의 수공이다. 팔십일수 중에서 가장 강력한 최후절공이다.
슷!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점으로 고착되었다. 하지만 이 순간, 검이 움직이고 있다. 열 개, 백 개로 흔들린다. 수십 개든 수천 개든 상관없다. 검이 움직이는데 몇 개가 움직인들 무슨 상관인가. 모든 변화가 하나로 운집한다.
팟! 까아앙!
호발귀의 검과 귀검의 검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두 검은 거센 충돌의 여파로 두 동강이 났다.
호발귀 검도, 귀검의 검도 중간 부분에서 뚝 부러졌다.
“놀랍군. 방금 그 수는 혈마 무공이 아닌 것 같은데?”
“더 싸울 건가? 그것부터 정하고.”
“싸워야지. 아직 반검(半劍)이 남았으니까.”
“그럼 군말은 필요 없잖아.”
스읏!
호발귀가 반 토막 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귀검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호발귀도 마찬가지다. 싸움에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벅! 저벅! 저벅!
누군가 걸어온다. 도천패나 당홍의 발걸음 소리는 아니다. 깃털처럼 가볍고 날렵하다.
최소한 귀검과 필적할 만한 무인이다.
“오늘 고수가 꽤 많이 나타나네?”
호발귀가 말했다.
“우리 싸움은 나중에 해야겠군. 살아남아라. 그래야 결판을 보지. 좋은 싸움이었다.”
귀검이 돌아섰다.
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미련 없이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다고 급하게 서둘지도 않았다.
여전히 부동심, 흔들리지 않는다.
귀검은 떠났지만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호발귀는 새로 나타난 자가 적이라고 확신했다. 발걸음 속에 뜨거운 투지가 담겨있다. 금방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발걸음이다.
호발귀는 발걸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고! 좀 천천히 가자니까요. 사람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뭐가 급하다고.”
“조용히 해!”
“네네. 그러죠. 필요할 땐 요리조리 써먹고, 이제는 필요 없다 이겁니까?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날카로운 여인 음성과 능글맞은 사내 음성이 들려왔다.
숲에서 일남일녀가 나타났다.
사내는 중원인인데, 여인은 이국적인 모습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어느 민족인지 모르겠지만 소수민족의 복색이다.
“이 사람이야?”
여인이 호발귀를 보면서 말했다.
“아, 싸우는 것 봤으면서 그럽니까. 분명히 혈마 무공을 사용했잖아요. 맞아요, 맞아. 이 사람 맞아요.”
“그래?”
스릉!
여인이 다짜고짜 칼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