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五章 귀검(鬼劍)(4)
당홍은 성격이 무척 밝았다.
할머니 죽음을 잊으려고 애써서 밝은 표정을 짓는지는 몰라도 활기찬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봐라! 봐라! 내 십 리 길을 걸어오면서 말 한마디 못 들었다. 아무리 사내 입이 무겁다지만, 이건 입에 자물통을 채웠나 왜 이래? 누가 말하면 죽인대?”
당홍이 두 사람 앞에 서서 양손을 허리에 얹고 말했다.
“이 사내는 곰 같아서 그렇다고 치고, 이 봐라.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당홍이 호발귀에게 대뜸 ‘너’라고 말했다.
호발귀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왜? 너라고 하니 듣기 싫어? 내가 이 사람 안사람이야. 알지? 이 사람이 형. 내가 안 사람. 그러니 난 너의 형수. 우리 호칭 정리 다 끝났지?”
“저기, 저기, 저기. 내가 형이 아닌데.”
옆에 있던 도천패가 난감한 듯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야? 형이 아냐?”
“이 사람이 문주, 난 문주를 호위하는 보위.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 사람이 내 윗…… 사람.”
“뭐? 몰라, 몰라. 몰라! 난 그런 것 모른다. 나이순으로 하자! 여기가 형, 넌 동생. 난 네 형수. 얘기 끝났다. 더 할 말 있으면 몇 대 맞고 시작하자.” 호발귀와 도천패는 서로를 쳐다봤다.
당홍은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 상식도 무시한다. 당장 이번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이다. 그러니 당홍과 함께 사는 사람은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풋!”
호발귀가 실소를 터트렸다.
도천패가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팍 터져 나왔다.
“히유!”
도천패는 웃지도 못했다.
인생을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나 때문에 책임진다고 했다던데? 그럴 필요 없잖아. 언제 짬을 내서 말해볼까?”
“빌미는 그렇지.”
“빌미가 그렇다고? 그럼?”
“마음에 드니까 책임진다고 했지. 마음에 안 들면 그런 말이 나오나.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큰 실수 했다는 생각이 들긴 한데…… 어쩌겠어. 이미 말을 끝낸 건데.”
“아! 특이한 성격을 좋아하네?”
“그렇지? 그것참…… 다짜고짜 비표를 날릴 때부터 좋더라고.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도천패가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물었다.
“독섬칠공은 전물기(傳物氣), 전인기(傳人氣), 전연기(傳然氣), 삼기(三氣). 이독법(理毒法), 차독법(借毒法), 관독법(貫毒法), 삼법(三法).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독강(化毒剛). 이렇게 일곱 개를 말해. 삼기와 삼법은 동시에 진행하고, 이것들에 능통해지면 화독강을 얻게 되는 거야.”
당홍이 독섬칠공 구결을 중얼중얼 읊었다.
그런데, 암송하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호발귀와 도천패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단단히 틀어박혔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린다.
일부러 신경을 다른 데 돌려도 똑똑히 들린다.
“화독강은 멸독망이라고도 해. 원래 비급에는 화독강이라고 적혀 있는데, 할머니가 멸독망으로 바꿨어.”
“험!”
도천패가 큰기침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독문 비결이다. 외인이 들으면 안 되는 독문 비학이다.
조심해서 암송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당홍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독섬칠공은 독두꺼비를 보고 창안한 공부야. 독두꺼비를 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같이 죽어. 이놈의 독두꺼비가 먹힌 후에도 독을 뿜어내거든. 죽더라도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거지.”
이번 말은 두 사람에게 들으라고 한 말 같다.
“그러니까 독섬칠공은 최악이라 봤자 양패구상(兩敗俱傷)이야. 이기거나 같이 당하는 거야. 독섬칠공을 수련한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이걸 왜 말하는 건데?”
도천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홍이 도천패를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당신은 내 남자이니까 알아야 하고, 동생은 할머니 진공을 이어받았으니까 알아야 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아야 해서 말하는 거야.”
도천패와 호발귀는 할 말을 잃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든 본문 무학을 말하기를 껄끄러워한다. 가능하면 혼자만 알고 싶어 한다. 당홍처럼 서슴없이 말해주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나 이제 밑천 다 내왔어. 이제 남은 거 없어. 너 나 버리면 죽는다.”
당홍이 도천패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누가 버린다고……”
도천패가 말끝을 흐렸다.
호발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한마디라도 하면 불똥이 떨어질 테니.
독섬칠공은 대단한 무공이다.
독섬칠공은 원충노인의 팔십일수와 잘 어울린다.
두 무공 모두 음의 무공이다.
조용함을 추구하는 것, 음지에서 최고의 살수를 전개하는 것, 타인을 공격하기에 앞서서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것 등등 지향하는 요소가 같다.
성질은 다르지만 같은 종류의 무공이다.
역천금령공은 대단히 빠르고 동적인 양강 무공으로 한 축을 이루고, 팔십일수, 독섬칠공, 이령귀화가 음유 무공으로 또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참회동에 있을 때는 역천금령공과 이령귀화가 대등했다. 사실, 이령귀화는 대등하지 못했다. 무심무실공이 이령귀화 대신에 역천금령공을 이끌었다.
그러던 것이 무공을 사용하면서 역천금령공의 강도가 훨씬 강해졌다.
무심무실공과 이령귀화로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 차이를 독섬칠공이 막아주고 있다.
독섬칠공이 아니었다면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뻔했다.
독의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고 쩔쩔맸을 것이다.
독의를 말해준 사람은 등여산이다. 그냐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무림에 독의가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문득 등여산이 생각난다.
그녀는 잘 있을까?
‘잔정이 있는 성격은 아냐.’
호발귀는 등여산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잔정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깊은 정이 있다.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쪽이라고 할까? 그러니 자신에게도 독의를 말해준 것이겠지.
그녀가 종종 생각나는 것은 아무래도 동굴에서 실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호발귀 인생에 그만한 실수는 없었다.
배수들은 인생을 흥청망청 낭비하는 편이다. 남의 품에 있는 돈이 내 돈이나 마찬가지이고, 땀 흘려서 번 돈이 아니기 때문에 몇 푼이라도 쥐어지면 헤프게 쓴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여자가 많이 꼬인다.
배수에게 여자가 꼬이는 것인지, 배수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많은 건 사실이다.
호발귀는 강하에서 배수 생활을 하면서도 여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가 좋다고 쫓아오는 여인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게 뿌리쳤다.
배수를 배우는 게 너무 힘들었다.
지금은 간단하게 펼치는 것 같지만, 한 동작 한 동작을 배우면서 피땀을 쏟았다.
그러니 사실 등여산은 호발귀에게 첫 여자다.
인생에서 처음 만난 여자이고, 정말 예쁘다고 찬탄한 여자이고, 처음으로 실수한 여자이고, 마음에 상처를 안긴 여자다.
절대 잊을 수 없다.
‘잘 있을 거야.’
호발귀는 그녀의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자.”
당홍이 산속에서 아늑하고 평평한 자리를 골랐다.
“뭐해? 어서 가서 멧돼지라도 잡아 와. 저녁은 먹어야지.”
“끄응!”
도천패가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 일어섰다.
“왜? 혼자 가기 싫어? 내가 같이 가?”
“됐어. 여기 있어. 나 혼자 갔다 와도 충분해.”
“호호호! 같이 가달라는 소리구나? 그래. 같이 가. 멧돼지 잡을 때 발목이라도 잡아줄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일어서기나 해. 넌 잠자리 골라 놔. 불 피우게 나뭇가지도 주워오고.”
당홍은 도대체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다. 여왕벌처럼 일벌들을 부렸다.
호발귀는 잠자리를 만들었다.
땅에 박힌 돌부리를 캐내고, 땅을 평평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위에 풀잎을 깔았다.
그때, 산길을 걸어 올라오는 한 사람을 봤다.
검은 두건을 머리에 둘렀다. 머리 긴 여자가 머리를 묶었을 때처럼 긴 머리가 등 뒤에서 치렁치렁 흔들린다.
허리에는 장검 두 자루를 꽂혀있다.
그가 산길을 천천히 걸어온다.
앞에 호발귀가 있지만 보지 못한 것 같다. 눈길도 주지 않는다. 아니, 보기는 봤다.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완벽하게 무시한다.
호발귀는 잠자리 만드는 것을 중단했다.
그도 조용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에 들만한 나뭇가지를 찾아냈다.
무이산을 내려가면 검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한데,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는 게 좋다는 판단에서 산길을 더듬다 보니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나뭇가지를 다듬어서 몽둥이로 만들 생각이다.
툭! 툭!
잔가지를 꺾었다.
산길을 올라온 검객이 오장 앞에 섰다.
두 사람은 묵묵히 서로를 쳐다봤다.
말은 필요 없다. 검객이 호발귀를 목표로 산에 올라왔다는 것은 묻지 않아도 짐작된다.
사내는 잘 다듬어진 칼이다.
호발귀가 중원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강자다.
예전에 살단 총주와 싸운 적이 있다. 무척 강한 강자여서 호발귀가 당할 뻔했다.
살단 총주는 멧돼지처럼 사납다. 거칠고 흉포하다.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만든다. 무공도 거칠다. 세기(細技)보다는 힘으로 때려죽이는 편이다.
눈앞에 선 검객은 독사다.
침착하고 차분하다.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이제 곧 싸울 사람이 투기조차도 드러내지 않는다.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죽음이 느껴진다.
이 자는 뱀처럼 사악하다. 차분한 눈길 속에서 뭐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는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온다.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눈길이다.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사내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 점이 매우 무섭다.
마음이 이미 부동(不動) 상태다. 부동지심(不動之心)이라고 해야 하나?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사내는 자신의 심장에 검이 틀어박혀도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상대를 죽이는 것이나 자신이 죽는 것이나 똑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스읏!
그가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 끄집어냈다. 그리고 호발귀를 향해 던졌다.
“무인이…… 검은 가지고 다녀야지.”
호발귀는 날아오는 검을 받았다.
철컥!
검자루를 쳐서 검날을 조정했다.
검자루에 꽂힌 검신이 맑은소리를 울리면서 맞춰졌다.
좋은 검이다. 검음(劍音)이 맑다. 검신도 면도날처럼 절삭력이 강할 것이다.
“누구냐?”
호발귀가 차분하게 물었다.
“귀무살 총수.”
“아!”
“살천단에서는 귀검이라고 부르지. 혈천방에서는 영주(靈主).”
“영주? 영주(領主)가 아니고?”
“본방에서는 귀무살을 족령(族靈)으로 여겨. 종족을 보호해주는 영혼들. 그들의 총수이니 영혼 영(靈)을 쓰는 게 맞겠지. 뭐라고 불러도 좋아. 호칭에 무슨 의미가 있어?”
“혈천방이 날 죽이려는 이유는 역시 혈마록 때문이야?”
“귀찮아서.”
“……?”
“방주는 네놈을 사로잡아오라고 시켰다만, 귀찮아. 혈마록이라는 것도 귀찮고. 그래서 깨끗이 묻어버릴 심산이다.”
스릉!
귀검이 검을 뽑았다.
이 순간, 호발귀는 여러 무공을 떠올렸다.
소요귀명검은 너무 적막하다. 사내의 음침한 검을 상대하기에는 느리다. 혈천도법은 너무 산만하다. 정교한 면에서 사내 검이 한 수 앞선다.
‘무정삼절!’
호발귀는 무정삼절을 펼치기로 했다.
혈마 무공이 귀검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숙련도 차이다.
스릉!
호발귀도 검을 뽑았다.
오른손으로 검을 들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귀검의 미간을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