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五章 귀검(鬼劍)(3)
등여산은 풀밭에 앉아서 잡초를 뽑았다.
시골 농군처럼 밀짚모자를 쓰고 풀밭에 쭈그리고 앉아서 호미질했다.
잡채를 하나씩 캐냈다.
풀밭은 잡초투성이다. 풀은 보이지 않고 온통 잡초만 보인다. 비가 온 후라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급한 일이 없으니 천천히 작업한다.
잡초가 무척 억세다. 호미로 살살 흙을 판 후, 뿌리째 잡아 뽑는다. 줄기가 중간에 끊기지 않도록 완전히 뽑아낸다.
뽑아낸 잡초를 바구니에 넣는다.
한가로운 일상이다.
“아씨! 그만 하세요!”
시녀가 시원한 물을 가져오며 말했다.
“고마워.”
등여산을 물을 받아서 마신 후, 다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잡초를 뽑다 보면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멍해진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오직 잡초만 뽑게 된다.
잡초 뿌리에 딸려 나오는 흙을 탁탁 털어낸다.
“아씨, 햇볕이 따가워요. 그만 들어가요.”
“괜찮아. 먼저 들어가.”
“어떻게 저희만 들어가요.”
“이거 마저 해야지. 지금 안 뽑으면 정말 큰 일이 돼.”
등여산은 계속 잡초를 뽑았다.
온종일 밖에서 일하고 돌아오니 목욕물이 기다렸다.
촥! 촤르르륵!
등여산은 시원하게 물을 끼얹었다.
아무리 연금 중이라고 하지만 새 한 마리 찾아들지 않는다.
가택 연금을 시키는 이유는 세상으로부터 눈과 귀를 닫고 조용히 지내라는 것이다.
그러니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풀을 뽑을 일꾼들조차 오지 않는다. 밥을 짓기 위해서 시녀들이 직접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고 있다.
이런 일은 이해하기 어렵다. 비정상이다.
누가 주변을 철저하게 차단하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사람 발길이 끓어질 리 없다.
‘바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등여산은 누가 이런 일을 하는지 짐작한다.
주치균, 그밖에 없다. 천살단 내에서 천살단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무인은 검벽밖에 없다. 단주의 호신위들만이 절대 권력으로 이동을 통제한다.
주치균은 악의로 이런 일을 한 게 아니다. 선의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신경을 끊고 쉬라는 뜻이다.
그럴 수 없다.
자신에게는 책사라는 책무도 있다. 중원이 돌아가는 상황을 한눈에 보고 있어야 한다. 중원 일에 개입하지는 못하지만, 언제 어떤 일에 투입되든 즉각적으로 제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촤아아악!
물을 시원하게 끼얹었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쒜에에엑!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파공음이 터졌다.
쉑! 쉑! 쉑!
파공음에 살기는 담겨 있지 않다. 위협만 한다. 하지만 위협은 금방 살기로 변할 수 있다.
순간, 그림자가 우뚝 멈춰 섰다.
파공음에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주하지도 않는다.
스슷! 스스슷!
파공음을 일으킨 사람들이 그림자를 에워쌌다.
“역시 검벽이네?”
“웃! 인사드립니다.”
등여산을 에워싼 검벽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거꾸로 잡고 포권했다.
“내게 오는 사람들, 이렇게 다 쫓은 거야?”
“이해해 주십시오!”
“참 바보 같아. 괜찮아. 돌아가.”
“이해해 주십시오!”
검벽 무인들은 포권을 풀지 않았다.
“하아!”
등여산은 한숨을 토해냈다.
검벽 무인들은 검벽주 말만 듣는다. 검벽주가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돌아가지 않는다.
“알았어. 내가 가서 말해보지. 오늘 밤은 오갈 사람도 없으니까 밤이슬 맞지 말고 푹 쉬어.”
등여산은 전각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등여산은 주치균을 찾아갔다.
밤이 늦었는데도 주치균은 잠들지 않았다. 불을 밝힌 채 책을 읽고 있다.
등여산은 기둥에 등을 기대고 달을 쳐다봤다.
“왜 그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책장 넘어가던 소리도 멈췄다. 주치균이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가 말했다.
“당분간 안에 있어라.”
“이러는 이유가 뭐야?”
“네가 무림에 신경 쓰는 게 싫다.”
“난 책사야.”
“그 책사도 싫다. 아무 신경도 쓰지 말고 있어라.”
“연금은 공적인 징계야. 거기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건 싫어. 내가 통제받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해. 이유가 없다면 검벽 무인들, 치워줘.”
“가택 연금 중인 사람이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
등여산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주치균이 변했다.
지금 방금 한 말도 사적인 감정이 내포된 말이다. 무심히 한 말 같지만, 소심함이라거나 질투 같은 감정이 섞여 있다. 괜히 트집을 잡는다고 할까?
공사 구분이 분명했는데, 혼동하고 있다.
“내가…… 겁탈당해서 그래?”
“그냥 쉬어. 쉬라는 말, 어렵지 않잖아. 그냥 쉬어. 모든 걸 다 잊고 쉬어.”
등여산은 호발귀와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겁탈당했다고 믿는 사람에게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꼭 그런 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치균의 음성에는 숨죽인 분노가 담겨 있다.
단순히 겁탈당한 일 때문에 분노를 삭이고 있나? 주치균답지 않다. 만약 겁탈 때문이라면 오히려 웃는 얼굴로 농을 걸어왔을 것이다. 애써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주치균이 왜 아직도 분노를 풀지 않고 있나? 겁탈한 자는 죽었는데, 죽은 자도 용서가 안 되나? 아니면 겁탈한 자를 죽이지 못해서 분노하나?
‘혹시 호발귀가?’
등여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가. 그런데…… 정작 쉬어야 할 사람은 너인 것 같아. 아무 생각 말고 좀 쉬어.”
등여산은 기둥에서 등을 떼고 사박사박 걸어갔다.
* * *
다음날, 등여산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잡초를 뽑고 있었다.
“앗!”
잡초를 뽑던 등여산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주변에서 같이 잡초를 뽑던 시녀가 급히 돌아봤다.
등여산의 손가락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 뱀 한 마리가 쏜살같이 풀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씨!”
시녀가 급히 달려왔다.
“괜찮아. 다행히 독사는 아닌 것 같아. 가서 약전주 좀 불러줘. 혹시 모르니까 해독약도 가져오시라고 하고.”
“알았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화들짝 놀란 시녀가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약전주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무리 연금 중이라고 해도 뱀에 물렸으니 치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일만은 검벽 무인도 통제하지 못했다.
“다행히 독은 없네. 조심 좀 하지. 아니, 사람들은 다 뭐하고 책사가 직접 잡초를 뽑아!”
약전주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역시!’
등여산은 살짝 웃었다.
천살단 사람들은 검벽 무인이 주변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몇몇 사람들이 다가오려다가 제재를 받았고, 더불어서 입단속도 당한 것 같다.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독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적은 글을 읽었는데, 혹시 아세요?”
등여산이 잡담하듯이 물었다.
“독의? 알지.”
약전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사람은 의원이라고 하면 안 돼. 악의(惡醫)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해.”
“그렇게 나빠요? 전 잘 몰라서.”
“나쁠 뿐이야? 인간도 아냐. 명색이 의원이라는 할망탱이가 살린 자보다 죽인 자가 더 많을걸?”
“그래요.”
“참! 그 할망탱이 얼마 전에 죽은 것 같던데?”
“죽어요?”
등여산은 깜짝 놀랐다.
“확인된 말은 아닌데, 우리 의원들은 의원들끼리 주고받는 게 있거든. 무이산 쪽에선가? 바싹 말라죽은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독의라는 소문이야.”
‘맞다! 독의!’
독의가 무이산에 거주한다는 사실은 몇 명만 아는 비밀이다.
무이산 인근에 사는 의원이 기이한 시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남몰래 독의 시신을 확인했던 것 같다.
‘호발귀! 호발귀가 살아 있어!’
등여산은 호발귀의 생존을 확인했다.
지금 그녀가 호발귀에 관해서 물으면 대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지만 독의에 관해 물으면 사실대로 말해준다. 호발귀가 독의를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독의에 관해 물은 것인데, 멀쩡하던 독의가 죽었다?
호발귀가 살아 있다!
호발귀가 독의를 죽였는지는 의문이다. 아직 정확한 것은 모른다. 하지만 독의는 호발귀가 개입했기 때문에 죽었다. 호발귀가 찾아가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호발귀가 살아 있어.’
등여산은 호발귀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천지신명에게 감사라도 드리고 싶었다.
“수고하셨어요. 정말 고마워요. 솜씨가 얼마나 좋으신지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등여산은 두 손으로 약전주의 손을 잡으며 활짝 웃었다.
호발귀가 살아 있다는 데 왜 기쁜 마음이 일어나나? 그에게 연정이라도 품었나? 아니다. 그런 것은 전혀 없다. 그녀나 호발귀나 공적으로 만났을 뿐, 개인감정은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왜 기쁜가?
호발귀만 생각하면 어떤 일도 손에 안 잡힌다.
그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슬프고, 잘 됐다는 말을 들으면 기쁘다.
호발귀와 어떤 인연이 맺어진 것 같다.
‘동굴에서 그 일 때문이야.’
등여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등여산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누구에게도 못된 짓을 당한 경험이 없다. 어렸을 때조차 놀림이나 장난질을 당한 경험이 없다.
모두 그녀를 보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해서 안달했다.
호발귀가 행한 일, 죽이려는 마음과 참아야 하는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광경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잊지 못하는 것이다.
단순히 죽이려고만 했다면 곧 잊어버렸을 테지만, 살심을 참기 위해 발버둥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만한 의지를 지닌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를 잊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일단 만나봐야겠어. 그 사람, 이대로 놔두면 폭발해. 혈마가 되기 전에 방법을 찾아줘야 해.’
등여산은 강호로 나갈 결심을 굳혔다.
등여산은 천살단주를 찾아갔다.
연금 중이니 먼저 만나겠다는 통보를 해야 한다. 그리고 허락하면 찾아갈 수 있다.
등여산은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갔다.
가택 연금 위반이다.
“급한 일인 게구나.”
천살단주가 느릿느릿 말했다.
“가택 연금 해제시켜주세요.”
“해제? 왜?”
“중원에 나가봐야겠어요.”
“쯧! 더 있거라.”
단주는 가택 연금 해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등여산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단주에게 내밀었다.
사직서(辭職書)다.
“아무래도 책사라는 책무가 너무 무겁네요. 천살단에 해준 일도 없고, 짐만 되고. 부족함을 알았으니 인제 그만 놓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천살단주는 침묵했다.
조용히 사직서만 쳐다본다. 당장 집어넣으라는 말도, 알았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네가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구나.”
한참 만에 한 말이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지금은 정돈이 안 되고 오락가락해요.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요.”
“그런 마음이라면 일심으로 일을 할 수 없지.”
“죄송해요.”
“그런데……”
천살단주가 말을 끊고 등여산을 쳐다봤다.
“책사라는 직책이 아무나 맡는 게 아니지. 그만큼 많은 권한도 주어지고. 마공관 마서는 몇 권이나 봤지?”
“……!”
등여산을 눈을 부릅떴다.
등여산은 아는 것이 너무 많다. 천살단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 마공관에 있는 마서도 많이 읽었다. 혈마록을 해독하면서 수십 권은 참조했을 것이다.
단주는 등여산이 천살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마공관 마서를 몇 권이나 읽었는지 묻는다. 다시 말해서 네 머릿속에 마공이 몇 개나 들어있냐고 묻는 것이다.
책사는 마음대로 사직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는 죽은 후에만 천살단을 벗어날 수 있다고 받아들여도 좋다.
책사가 혈천방으로 돌아서면 천살단은 치명타를 입는다.
소문처럼 책사가 호발귀에게 겁탈당했고, 그래서 함께 움직인다면 천살단은 실질적인 피해는 물론이고 명예에도 회복하지 못할 피해를 입는다.
“그거는 잠시 보류하자.”
단주가 손끝으로 사직서를 가리켰다.
“네가 지금 많이 복잡한 것 같은데, 지금 상태로는 무림에 나가봤자 정리가 안 돼.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연금 유지하자. 더 할 말은 없을 것 같고.”
천살단주가 나가보라고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