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五章 귀검(鬼劍)(1)
‘이게 뭐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가 어디?’
처음 본 장소에 와있다. 아주 위급한 곳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강 한복판이다. 좌측과 우측에서 급류가 쏟아져 내린다. 두 급류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만난다. 거센 충돌을 일으키면서 밀쳐내기도 하고, 밀리기도 한다.
물살은 소름 끼치도록 거세다.
폭우가 쏟아지고 난 다음 누런 황토물이 밀려올 때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한다.
강 한복판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다.
강물들이 몸을 스치며 지나간다. 너무 거세서 대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 주기만 간절히 바랄 뿐이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다.
호발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영공(靈空)이라고 들어봤어?”
장진 스님이 말했다.
“운기가 뭐야? 외부세계와 인연을 끊고 오직 내부 경락만 보는 거 아냐? 그런데 정신을 잃으면 내부 경락도 안 보여. 하지만 무의식은 움직이지. 운기를 하려고 해. 그때 꿈처럼, 환상처럼 보이는 게 있어. 영공이라고 해.”
“그럼 이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가?”
끄덕! 끄덕!
장진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야. 하지만 영공에서는 모든 게 꿈처럼 느껴져. 꿈이라고 생각하고 겪어봐. 잠에서 깨어나면 멀쩡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급류 속에 있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차분히 급류를 쳐다봤다. 꿈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여유롭게 볼 수 있다.
한쪽에서 쏟아지는 급류는 뜨거운 기운을 품었다. 뜨겁다 못해 팔팔 끓는다. 붉은 용암이다.
다른 쪽에서 흘러내린 급류는 시커멓다.
손끝만 살짝 대고 칼에 쓸린 듯 아려온다. 냄새도 지독하다. 까만 아지랑이도 피어난다.
‘독!’
급류 전체가 독수(毒水)다.
그나마 발밑에 작은 바위가 있어서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버텨낸다.
작은 바위가 발목을 잡아주었다.
바위의 힘은 미약하지만 두 급류에게 휩쓸리지 않고 균형을 잡게 해주었다.
호발귀는 급류만 바라볼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손끝만 움직여도 두 급류에 휩쓸릴 것 같았다.
파파파팍! 파파팟!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몰아치더니 급류를 후려쳤다.
검은 물살이 파도처럼 솟구치더니 호발귀를 때려왔다.
호발귀는 눈만 꾹 감았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검은 물살이 잘 지나가기만 바랐다.
꽈직! 파아앗!
검은 물살이 호발귀를 흠뻑 적시고 지나갔다.
파파팟! 파팟!
하늘은 연신 검은 물살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잖아도 급하고 거센 물살을 연신 자극한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라!’
호발귀는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두 발을 잡아주고 있는 작은 바위다. 바위마저 부서지거나 떠밀려 가면 영락없이 물살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너만 믿어!’
하늘의 움직임을 읽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바람이 급류를 자극하는데, 자극하는 방법이 모두 일곱 가지다.
엄밀히 말하면 급류를 이용해서 공격하는 방법이다.
각각의 방법마다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모든 과정이 힘을 모으는 행동이라고 추측된다.
힘을 모으고 모아서 후려친다.
그제야 비로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가 되었다.
붉은 급류는 역천금령공이다. 검은 물줄기는 독의가 쏟아놓은 독기다. 두 발을 잡은 미약한 바위는 이령귀화다. 힘은 약하지만, 여전히 굳건하다.
‘독의가 손을 써 주고 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바람 변화는 독의가 전개하는 독섬칠공이다.
찍어 내리면서 옆으로 돌린다. 후려치는 듯하지만 여전히 진기를 모은다. 돌리는 회전력까지 가미한 후에 모든 힘을 모아야 위로 올려 친다.
호발귀는 독섬칠공 운용법을 하나씩 깨달았다.
바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해보면 같은 힘이 표출된다. 초식 연결이 정확하다.
독섬칠공은 깨닫고 나니 독의의 뜻에 부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신도 운기했다. 하늘에서 바람이 일어나면 몇 번째 초식인지 파악한 후에, 같은 초식을 일으켰다.
독의는 밖에서 독섬칠공을 운용한다. 그런 연유로 힘이 부족한 듯하다. 독수로 역천금령공을 쳐야 하는데, 중간에서 힘이 소진되어 이령귀화를 친다.
꾸르르릉!
꾸르르릉!
하늘에서 독섬칠공이 일어났다. 호발귀도 같은 공부를 일으켰다.
독수가 거세게 일어나더니 곰이 두 손을 활짝 들어 올린 형국을 한다. 그리고 여지없이 호발귀를 격타했다.
호발귀는 그 힘을 받아서 똑같은 방법으로 역천금령공을 쳤다.
독수는 위험한 진기가 아니다. 독의가 밀어 넣어준 기운이니 내 편이나 다름없다. 옆에 든든한 내 편이 있으니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지 않나.
역천금령공에 휘말려서 혈마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지웠다.
독의를 믿고 과감하게 싸운다.
환상 속에서는 독수와 역천금령공이 싸우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역천금령공도 호발귀의 진기다. 싸운다는 의미는 자신 있게 펼친다는 뜻이다.
역천금령공은 호발귀를 집어삼키지 못했다.
어느 순간, 역천금령공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쯤에서 독의가 손을 떼고 물러났다.
막무가내로 몰려들던 진기도 씻은 듯이 가셨다. 하지만 아직도 정리해야 할 진기가 있다.
이것은 호발귀의 진기가 아니다.
완전히 새롭게 형성된 진기이며,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낯선 진기다.
독수! 독기! 독공!
독의가 몸속에 주입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물러날 때 거둬가지 않았다.
이러면 진기 손실에 대단히 크다.
자신의 몸속에 남아있는 독수만큼 독의의 몸에서는 진기가 소멸하였을 것이다.
독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싸우자고 할 때는 치료해줄 것 같지 않았는데, 이처럼 큰 은혜를 베풀다니.
츠으으읏!
호발귀는 독수를 갈무리했다.
사실, 그가 갈무리할 필요도 없었다. 독수가 순리에 따라서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단전!
역천금령공이 일어나는 자리에 독수도 함께 자리 잡았다.
호발귀는 새로운 공부를 얻었다.
이제 역천금령공을 일으키면 독공도 함께 운기된다. 독을 쓰고 싶지 않아도 독이 퍼져나간다. 검을 쓰면 독검이 될 것이고, 화살을 날리면 독 묻은 독화살이 날아갈 것이다.
호발귀는 독공만 따로 추려서 사용할 수도 있다.
독의가 무의식 속에 심어놓은 독섬칠공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환상 속에서 독의와 함께 수십, 수백 번 펼쳐봤기 때문에 눈감고도 펼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더불어서 만독불침지신(萬毒不侵之身), 독이 침범하지 않는 몸을 얻었으니 정말 은혜를 한두 개 입은 게 아니다. 큰절해도 모자랄 판이다.
호발귀는 모든 진기가 차분히 가라앉자 눈을 떴다.
독의가 숨을 놓았다.
호발귀는 독의의 시신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독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모든 진기를 넘겨주었다. 그 여파로 목숨까지 잃었다.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진기를 넘겨주었다.
그 덕분에 역천금령공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역천금령공이 독공을 눈 아래로 깔아볼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가졌던 고민을 또다시 해야 할지도 모른다. 혈마에게 잠식당하면 어쩌나 하는.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 몇 년간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게 모두 독의 덕분이다.
독의는 자신을 위해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독의.”
호발귀는 오척단구의 노파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존경스러웠다.
“독의께서 수련한 공부가 무엇입니까?”
호발귀가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독섬칠공.”
“진기는 뭐라고 하죠?”
“멸독망(滅毒網).”
“진기라면 기(氣)를 써야 하는데 망을 쓴 이유가 뭡니까?”
“그물처럼 촘촘하고 서로 이어져 있어서. 멸독망 한 가닥만 남아있으면 숨이 끊어지지 않아.”
당홍은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독의께서 마지막 한 가닥 진기까지 전부 넘겨주셨다는 거군요.”
“……”
“왜 그러셨을까요?”
호발귀가 무심히 물었다.
굳이 대답을 듣고자 물은 것은 아니다. 너무 큰 은혜를 입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헤아려보고자 물었다.
하지만 정작 질문은 받은 당홍은 미간을 찡그렸다.
솔직히 이 부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할머니가 운명하신 후부터 계속 생각해봤는데, 이유가 될만한 것들을 전혀 찾지 못했다.
할머니가 목숨까지 던지면서 호발귀를 구한 이유가 뭘까?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할머니는 독공천하(毒功天下)를 원했지 혈마천하(血魔天下)를 원한 적은 없다. 혈마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들었지만, 적수로 여겼을 뿐이다. 절대 충성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항상 하시던 말이 있다. 혈마는 천하를 피로 물들이는 도구일 뿐이라고.
그런데 왜 모든 진기를 넘겨주고 숨을 거두셨을까?
생각을 거듭해봐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호발귀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일면식도 없던 완전한 타인이다. 혈마 무공을 수련했다고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고? 중독을 풀어주는 것은 일도 아니다. 혈마의 저주를 풀어주느냐 마느냐인데, 풀어주다가 힘에 부치면 그만두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물어볼 사람이 숨을 거두셨으니 어쩌겠나.
호발귀는 대나무로 관을 짰다.
원래 대나무로 관을 짜는 법은 없지만, 사정이 열악하니 어쩔 수 없었다.
대나무 관 속에 독의를 눕혔다.
호발귀는 땅을 팠다.
도천패는 돕지 않았다. 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발귀 몫이다. 타인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당홍은 이 일에 개입할 수 있지만, 한쪽으로 물러나서 처연히 눈물만 흘린다.
땅을 파고, 사방에 횟가루 대신 대나무를 세웠다.
간신히 형식만 갖춘 장례이지만, 그래도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제일 먼저 당홍이 흙 한 줌을 집어서 관에 뿌렸다.
“할머니, 잘 가. 말한 대로 잘 살게. 이 곰 같은 사람, 정말 남편으로 생각하고 살아야겠어.”
당홍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한 말은 속으로 옹알거리는 말이라서 호발귀나 도천패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도천패도 흙 한 줌을 집어서 관에 뿌렸다.
“감사합니다. 따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천패가 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호발귀는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와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묵묵히 흙을 덮었다. 한 줌, 한 줌 정성을 덮었다.
호발귀가 토굴을 나설 때, 당연하다는 듯이 당홍도 따라나섰다.
“같이…… 갈 겁니까?”
“왜? 여기 떼어놓고 가려고 했어?”
당홍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책임지기로 했다.”
호발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도천패가 앞으로 쑥 나서서 말했다.
“이 사람이, 내가 책임져. 그러니 같이 움직여야지. 우리 앞길이 좋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어쭈? 제법 감동인데?”
당홍이 도천패를 보며 생긋 웃었다.
호발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두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토굴에서 혼절해 있는 동안 독의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알지 못하니, 두 사람의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당홍이 호발귀 앞으로 와서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혈천방이 적이지? 귀무살 중에 죽일 사람이 있다며?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어디서 귀무살을 찾아? 찾을 방법이라도 있어? 있으면 말해보고.”
“……”
호발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가 아는 곳이 있어. 한때는 귀무살 수련 장소였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래도 일단 거기로 가면 귀무살에 대한 단서는 잡을 수 있을 거야.”
“아!”
호발귀가 고맙다는 표정으로 반색했다.
“어때? 이 정도면 괜찮은 여자지? 내가 또 내조란 걸 잘해요. 척하면 착이잖아.”
당홍이 도천패를 보면서 눈을 찡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