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四章 독의(毒醫)(3)
“싸우자!”
독의가 불쑥 말했다.
‘여인?’
호발귀는 독의를 쳐다봤다.
독의는 사내가 아니다. 여인이다. 나이가 많은 노파다.
음성이 갈까마귀 우짖는 듯 걸걸하지만, 분명히 여인 특유의 가녀린 음성이 섞여 있다.
‘독의가 여자라니!’
호발귀는 다소 당황한 눈빛으로 독의를 쳐다봤다.
독의가 들뜬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싸우자!”
“싸우자고요?”
호발귀가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서 되물었다.
“그래. 싸우자,”
“왜 싸웁니까?”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난 네가 천살단 놈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만두라고 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아냐. 네 무공, 혈마 무공이지? 이제야 생각났어. 내 독을 이렇게 간단히 태워버릴 수 있는 무공은 역천금령공밖에 없어.”
“아까 물었는데, 역천금령공을 어떻게 알죠?”
“나, 혈천방 사람.”
“아!”
호발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의가 혈천방 사람이라면 혈마록을 모를 리 없다. 독의 정도 되는 고수라면 당연히 안다.
혈마록을 안다면 역천금령공도 안다.
역천금령공의 실체는 몰라도 어떤 무공인지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이다.
혈천방 사람이 천유봉에 머무르고, 그 사실을 천살단이 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어떤 사연이 들어있을 것 같은데, 호발귀는 관심 없었다.
독의가 다소 흥분한 듯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역천금령공, 천하제일이라면서?”
“배워서는 안 되는 마공입니다.”
“킥킥! 내 말이 맞는다는 거네? 천하제일?”
“……”
“마공인 줄 알았다는 건, 천하제일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거지. 킥킥킥! 혈마 무공이 어떤지 볼 생각을 하니 벌써 흥분되는데? 하지만 나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
독의가 흰 이를 드러냈다.
“혈마 무공은 방금 봤잖습니까?”
“그건 얼핏 본 거고. 난 네가 천살단 놈들인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 관심 있게 봤겠어?”
“혈마 무공은 살인 무공입니다.”
“지랄! 세상 무공치고 살인 무공 아닌 게 뭐가 있어.”
“비무가 없는 실전 무공이라는 말이죠. 보고 싶으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깟 목숨, 걸지 뭐.’
호발귀는 독의가 노파라는 것을 안 이상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싸우자고? 노파라서가 아니라 여자와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독의는 막무가내다.
“내 무공은 독섬칠공(毒蟾七功)이야. 평생 수련했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독공이지. 킥킥!”
노파가 품에서 작은 옥병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 한 방울만 닿아도 살을 태우고 뼈를 녹이는 부골산(腐骨酸)이야. 이 부골산을 독섬칠공으로 퍼트리면 주위 삼십 장은 죽음의 땅이 돼.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해. 적군과 아군 불문하고 모두 죽어. 어때?”
노파는 호발귀를 설득하고 있다. 싸우자고.
“대단하군요.”
호발귀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지금 독의에게서 독공 이야기나 듣자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혈마 무공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왔다. 그러니 다른 이야기는 모두 관심 밖이다.
독의는 호발귀의 생각 따위는 일절 고려하지 않았다.
“혈마 무공을 가졌으니 독섬칠공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지? 하지만 이거 한 방울이면 오장육부까지 다 녹아버려. 난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고.”
“싸움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제가 독의를 찾아온 목적은……”
“부골산을 견뎌내면 이길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누구도 이겨내지 못해. 독섬칠공을 연마하면서 혈마 무공도 생각했는데, 역시 막지 못해.”
“그보다 먼저……”
호발귀가 치료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 독의가 살그머니 옥병 뚜껑을 열었다.
‘훗!’
호발귀는 깜짝 놀랐다.
독의는 지금 당장 싸울 생각이다.
호발귀는 독의의 기세를 읽었다. 벌써 전신에 진기를 휘돌리고 있다. 이제 곧 독공이 쏟아진다. 싸우자는 말, 농담이 아니다. 독의는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다.
“독의!”
“평생 독공을 수련했는데, 혈마 무공이라면 반드시 상대해 봐야지. 내 평생 이런 기회는 또 없잖겠어?”
“잠깐! 내게 문제가 있습니다!”
호발귀가 급히 말했다.
독의가 잠시 독공을 멈추고 호발귀를 쳐다봤다.
“미안하지만 난 혈마 무공을 펼칠 수 없어요. 혈마 무공을 펼치면 혈마가 됩니다.”
“혈마?”
“사실 그 문제 때문에 찾아왔는데, 혈마 무공을 펼치는 중에 이성을 잃게 됩니다.
“그럼 잘 됐잖아?”
“……?”
“원래 살인이란 맨정신으로 못하는 거야. 정신을 잃는다면 더 잘 된 거지.”
“혈마 무공을 펼치면 이성을 잃은 마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악마가 탄생하는 겁니다. 이백 년 전 혈마의 재현이 되는 거죠.”
“큭큭큭! 그럼 더욱 잘 됐고.”
“뭐요!”
“혈마의 본분이 뭔지 알아?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거야. 시신으로 산을 쌓고, 피로 강을 이루게 만들어야지. 혈마가 되었으면 그 정도 일은 해줘야지.”
“다, 당신!”
호발귀는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이런 여자가! 아니, 노파가!
독의가 말했다.
“혈마 무공을 펼치면 혈마가 된다? 킥킥킥! 그걸 안 이상 더욱 싸워야지. 날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날 죽여서 혈마가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
쒜에에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의가 신형을 날려왔다.
호발귀는 급히 무심무실공을 일으켰다.
토굴 밖에서 독기를 밀어내며 돌로 양쪽 허벅지를 짓찧었다. 토굴 안으로 들어와서는 왼팔을 내리찍었다. 움직이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독의! 잠깐! 잠깐!”
호발귀는 급히 물러서면서 독의를 불렀다.
어떻게든 독의를 말려야 한다. 싸움해서는 안 된다. 혈마가 된다는 말,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독의는 작심하고 달려드는 중이다.
옥병에서 부골산이라고 말한 액체가 툭 튀어나왔다.
독의는 서슴없이 부골산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강력한 진기가 부골산을 쳤다.
순간, 부골산이 뿌연 안개로 변하더니 토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위험!’
호발귀는 즉시 은허신법을 펼쳐서 뒤로 물러섰다.
지지직! 지지직!
안개에 닿은 바위가 검은 연기를 피워냈다.
검은 연기에는 살을 태우는 듯한 냄새가 섞여 있다.
누린내 같기도 하고, 음식 썩는 냄새 같기도 하다. 좌우지간 뱃속이 뒤집힐 정도로 역겹다.
독의가 굳이 부골산에 관해서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독기가 지독하다는 것을 알겠다.
“독의!”
호발귀는 급히 독의를 불렀다.
독의는 호발귀 말을 듣지 않는다. 흥분하지도 않는다. 차분하게 옥병 속에 든 독을 퉁겨낸다.
툭! 툭!
액체 두 방울이 또 솟구쳤다.
“이런!”
호발귀는 탄식했다.
한 방울로 만든 운무도 간신히 피했다. 두 방울이면 살상 범위가 배로 넓어진다. 결코, 신법으로 피할 수 없다. 독에 중독되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어쩌면 즉사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속전속결!’
호발귀는 싸우기로 작심했다.
기왕 싸울 바에는 단 일 초에 승부를 갈라야 한다. 독의를 상대로 오래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
원충노인의 팔십일수로는 상대할 수 없다.
싸우는 장소가 넓은 개활지라면 충분히 싸우겠지만, 운신조차 자유롭지 않은 토굴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결국, 혈마 무공을 사용해야 한다.
혈마 무공을 사용하되, 역천금령공의 사용을 최소로 줄인다.
‘이령귀화!’
호발귀는 귀화미요공을 떠올렸다.
귀화미요공은 이령귀화로 펼친다. 역천금령공도 가세하지만, 역할이 미미하다. 귀화미요공, 구뢰마권, 혈천도법은 이령귀화가 주된 공력이다.
퍽! 퍽!
독의가 독섬칠공으로 부골산을 후려쳤다. 그러자 곧 뿌연 운무가 피어나 토굴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순간,
팟!
호발귀 손에서도 번쩍 불꽃이 튀었다.
“웃!”
독의가 재빨리 양손을 휘둘러 전신을 보호했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으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한다. 공격을 하다가도 수비로 전환한다. 전신을 보호하는 행동부터 일으킨다.
호발귀는 즉시 역천금령공을 끌어내서 부골산 연기를 태웠다. 강력한 힘으로 밀어내고, 태우고, 산산이 흩날렸다. 동시에 앞으로 쑥 나갔다.
역천금령공을 일으켰으니 공격까지 한다.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결정짓는다.
퍼억!
구뢰마권이 정확하게 독의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크윽!”
독의는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호발귀는 독의가 뿜어낸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역천금령공을 최대한 억제하느라고 구뢰마권에는 겨우 오 성 진기밖에 싣지 않았다. 그러니 이토록 심한 각혈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훅!”
호발귀는 격한 신음을 쏟아내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온몸이 싸르르르 마비되어 온다. 살이 뜯기는 듯한 통증도 치민다. 피가 끓고, 어지럼증이 치민다.
독에 중독되었다.
부골산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렇다면 독의가 토해낸 피, 혈독(血毒)에 중독되었다.
독의는 일격을 맞으면서 혈독을 쏟아냈다.
“이런 지독한!”
호발귀는 독의를 때려죽이기 위해 손을 쳐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상황이 급해도 독의 같은 사람을 살려두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손을 쳐내지 못했다.
혈독이 스며들자 역천금령공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호발귀가 운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진기가 일어난다. 그리고 경맥을 돌면서 독기를 태워나간다.
‘안 돼!’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독의의 혈독은 매우 지독하다. 보통 해약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이다. 그런 독이기 때문에 역천금령공도 꽤나 고생을 해야 한다.
역천금령공을 최대한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거다.
그러자면 독을 치료하는 중간에 혈마로 넘어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혈마가 된다.
더는 역천금령공을 운기하면 안 된다.
지금도 통제를 벗어나서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는데, 운기까지 더하면 정말 끝이다. 지금, 이 순간 떠올린 생각이 본정신으로 떠올린 마지막 생각일 수도 있다.
스읏!
호발귀는 바위를 녹이고 있는 부골산에 손가락을 댔다.
츠으읏!
독기가 독액으로 변해서 살을 태웠다. 바위에 닿은 손가락이 금방 새까맣게 변했다.
독기는 송곳처럼 살을 찌르고 들어와서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끄으으윽!”
호발귀는 격렬하게 신음을 쏟아냈다. 한 편으로는 무심무실공을 운용했다.
은호! 망흡!
내쉬는 숨을 숨겨라. 들이쉬는 숨을 잊어라.
간단한 주문 속에 무심무실공의 요체가 녹아 있다. 서두에 나온 네 글자가 무심무실공의 정수다.
극심한 통증, 그리고 무심무실공.
역천금령공이 잦아들었다. 그 대가로 몸에 침입한 부골산과 혈독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신을 잠식했다.
“됐어. 이것으로 된 거야.”
호발귀는 만족했다.
역천금령공을 이겨냈다는 뿌듯함이 가슴 깊이 요동쳤다.
무공을 버린 대가는 죽음이다. 목숨을 내놓는다.
호발귀는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토굴 벽에 등을 기댄 체 고개를 축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