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三章 무이산으로(5)
도천패는 몸이 산처럼 크다. 어떤 움직임을 보여도 당장 드러난다. 길게 기지개만 켜도 알 수 있다. 일어서고, 앉고, 눕는 게 모두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함정이다.
모두 도천패가 은밀히 이동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천패는 투심문 절기를 이어받았다. 은밀히 이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아주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다.
도천패는 무회음리(無迴音移)의 달인이다.
무회음리는 원충노인 팔십일수 중 하나다. 소리를 일절 흘리지 않고 이동하는 술법이다.
숨을 죽이고, 기척을 죽이고, 나라는 존재까지 죽이고 움직인다.
도천패는 어둠과 동화되어서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다.
그를 지켜보는 눈들은 커다란 산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 생각대로 아주 큰 그림자가 일어나서 움직이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도천패는 땅에 바짝 엎드려서 움직였다.
아니, 그들은 호발귀와 도천패가 야반도주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무공은 추격자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도주하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오히려 감시자들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도 가능하다.
두 사람이 뭐하러 힘들게 움직이겠나.
그들은 편안하게 폐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도 무회음리를 안다. 배를 땅에 납작 엎드리고 돌 부스러기 하나까지 신경을 쓰면서 이동한다.
무회음리를 펼칠 때는 시간 구애를 받으면 안 된다.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린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워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달빛조차 없어야 한다. 구름이 가득 걸려있다면 무척 좋다.
그는 뒤에 남아서 도천패가 펼치는 무회음리를 봤다.
도천패는 매우 능숙하게 펼친다. 무회음리 하나만 놓고 보면 자신보다 뛰어나다.
자신은 사달이 벌어진 후에야 팔십일수를 알았지만, 도천패는 훨씬 전에 수련했다.
수련 기간이 긴 만큼 무공 깊이도 상당하다.
호발귀는 무회음리를 펼칠까 하다가, 전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기로 작정했다.
소요귀명검법을 펼친다.
감시자들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소요귀명검법의 새로운 부분을 찾아냈다.
이번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생각이다.
무심무실공을 일으켰다.
무심무실공은 무회음리가 통한다. 원충노인의 팔십일수가 모두 무심무실공을 바탕으로 하므로, 무회음리를 펼치기에 가장 적합하다.
호발귀는 적정 상태에서 곧바로 귀명을 일으켰다.
나를 어둠에 놓고 상대방을 밝은 쪽에 놓는다.
이것은 매우 간단하다. 소요귀명만 일으키면 곧바로 적막으로 들어가게 된다. 동시에 주위에 사람들이 나타난다. 일부러 찾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난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본다. 듣고 싶지 않아 듣는다.
어둠에 들어가면 밝은 데 있는 자들은 저절로 보인다.
자! 이제 움직인다!
나는 어둠을 밟고 섰다. 저들은 밝음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저들을 보지만, 저들은 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저들을 주시하면서 어둠을 밟는다.
호발귀는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지 못했다.
어둠을 밟고 움직인다는 것은 알았지만, 엎드리는지 걷는지 기어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몸이 어둠을 찾아서 움직인다.
앉을 때도 있고, 일어설 때도 있다. 엎어질 때도 있고, 서서 걷기도 한다.
소요귀명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인다.
어느 순간, 저들이 백 장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제는 은밀히 이동할 필요가 없다. 두 발로 서서 걸어도 발견하지 못한다.
츠으으읏!
호발귀는 소요귀명검법을 풀었다.
“아!”
도천패가 감탄했는지 입을 쩍 벌렸다.
“그거 처음 보는 은신술인데, 뭐야? 움직이는 것을 나도 보지 못했잖아.”
“혈마. 알면서.”
“그런가?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우리 투심문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혈마가 최고군.”
“무심무실공에 혈마 요결을 섞었으니 온전히 혈마 무공이라고 할 수도 없어. 나중에 시간이 나면 차분히 정리해보지. 내 생각에는 팔십일수가 상상 이상으로 강한 것 같아.”
“그래? 그게 말이라도 듣기 좋네.”
도천패가 씩 웃었다.
빈말이 아니다. 결코,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소요귀명검법을 펼치면서 느낀 것인데, 무심무실공이 상상 이상으로 넓게 보완해준다.
혈마 무공 모든 부분에 무심무실공이 통한다.
나중에 정리를 해봐야 할 부분이지만, 팔실일수가 의외로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쉬이이잇!
호발귀가 신형을 펼쳤다.
이제는 숨을 필요가 없다. 모두 폐가만 쳐다보고 있다. 날이 밝기 전까지 적어도 삼십 리 이상 거리를 떼어놓을 수 있다.
두 사람을 빠르게 질주했다.
보름 동안 최대한 사람을 피해서 움직였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람 그림자만 얼씬거려도 모습을 감췄다.
어떤 사람이 두 집단의 간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피하기로 작심했다.
드디어 무이산에 도착했다.
무이산은 넓고 커서 무이산 본맥(本脈)인지 아니면 본맥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많이 관광하는 무이산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러자면 사람을 피해서 움직인다는 거의 불가능하다. 워낙 많은 사람이 무이산을 찾는다.
두 사람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길을 더듬어서 무이산으로 들어서야 한다.
맞게 왔나, 잘못 왔나?
야트막한 산들이 쭉 펼쳐져 있다.
이곳이 본맥인지 알아보려면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다.
길가에서 노는 어린애도 천살단 간자일 수 있다. 금방 숨이 넘어가는 노인네가 혈천방에 인편을 보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한다.
“맞게 왔겠지? 어떻게 여긴 길 안내판도 없어. 마을 이름이라도 새겨놨어야지.”
“워낙 촌구석이라서 그렇지. 누가 이런 마을에 안내판을 세워놔?”
“하긴.”
도천패가 머리를 끄덕였다.
“참 지독하네. 어떡할 거야?”
문득 도천패가 물어왔다.
그토록 조심해서 움직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간자가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따라왔나?
도대체 이들 눈을 피하려면 어떻게 이동해야 하나? 세상에 피할 곳이 있기는 하나?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뒤를 끊어야지.”
“내가 해?”
“그럼 내가 해? 이런 건 당연히 보위가 해야지. 당연한 걸 묻고 있어. 입 아프게.”
“하! 야, 문주! 넌 내가 만만해 보이지?”
“보위! 보위가 문주에게 대드는 문파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이러니 투심문이 멸시나 당하지. 도대체가 문주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도 못 모시나?”
“모…… 셔?”
“그럼! 보위가 문주를 모셔야지, 문주가 보위를 모셔?”
“쩝! 문주 너 나중에 좀 보자.”
쉬이잇!
도천패가 사라졌다.
호발귀는 피식 웃었다.
다소 심한 농을 했다. 도천패가 받아주기 때문에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농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굉장히 낯설다.
같은 투심문이라고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터다. 인제 와서 갑자기 문주니, 보위니 하면서 붙어 다니는 것도 어색하다.
그래서 호발귀는 인간적으로 친해질 방도를 강구했다.
그것이 진한 농담이다. 짧은 시일에 허물없이 지내는 방법으로 딱 좋을 것 같았다.
쉬잇! 쒜에에엑! 퍽! 퍽!
바람 휘날리는 소리가 울렸다. 칼이 살을 썰면서 들어가는 소리도 울렸다.
도천패가 그림자 두 명을 척살했다.
도천패는 칼을 쓸 때는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후려친다. 치명적인 요혈을 단번에 내리긋는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숨을 끊는다.
가장 빠른 죽음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다. 원치 않는 죽음, 타살일수록 숨 떨어지는 시간이 짧은 게 좋다. 그래서 가능하면 빨리 끝내려고 한다.
아마도 죽은 자들은 자신들이 죽는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호발귀와 도천패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도천패가 사라졌다. 그리고 끝이다.
죽은 자들은 이것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휘익!
도천패가 칼에 묻은 피를 허공에 흩뿌렸다.
“빨리 움직이자. 죽이는 놈들이 점점 많아지잖아.”
“이제 시작해 놓고 뭐가 점점이야?”
“점점 더 많아진다는 거지. 시간을 끌면.”
도천패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 그가 한 말은 진심이다. 도천패는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천유봉을 찾아야지?”
쉬잇!
호발귀가 신법을 펼쳤다.
그 역시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 두 사람을 죽였다. 저들을 내버려 두면 곧 천살단이나 혈천방 무인들이 몰려올 테니까.
독의가 천유봉 같은 명승지에 살 리 없다.
등여산이 잘못된 정보를 준 것도 아니다. 독의는 틀림없이 천유봉에 산다.
독의는 독의라는 이름으로 살지 않는다.
찾아오는 환자에게 독술을 시험하는 악의(惡醫)는 없다. 아예 의원 노릇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위장해서 살 것이라는 거다.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음지에서 독을 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독의를 찾지 못한다. 천유봉을 이 잡듯이 뒤져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는 이 문주께서 직접 움직일 테니까, 보위는 잠이나 자고 있으셔.”
호발귀가 도천패의 가슴을 툭툭 쳤다.
“어떻게 하려고?”
“본문 절기를 살려야지.”
“배수?”
“독의라면 독이 있겠지. 주머니를 뒤지다 보면 독이 나올 것 아냐. 그럼 쫓아가면 되고.”
“나도 할까?”
“그 덩치로?”
“거참 하는 말하고는! 이 덩치가 어때서!”
도천패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하지만 겨울을 맞은 곰처럼 동굴을 찾아 들어갔다. 그도 자신이 움직이면 사람들 눈에 확 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무이산은 중원 십대 명산이자, 동남부 최고 절경이다.
산이 높지는 않지만 봉우리가 서른여섯 개나 된다. 또 줄기를 휘감아 도는 구곡계(九曲溪)는 자연이 만든 최고의 걸작으로 무이산 유람의 백미로 꼽힌다.
천유봉은 구곡계와 함께 유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승지다.
깎아 지른 절벽이 일품이다.
‘이곳에 산다고?’
호발귀는 미간을 찌푸렸다.
천유봉은 암봉(巖峰)이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천유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팔백사십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모두 바위를 깎아서 만든 계단이다.
당연히 천유봉 부근에는 사람 살 곳이 없다.
움막 같은 것은 보일 리 없고,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다.
여기 어디에 사람이 산다는 것인가?
툭!
호발귀는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쳤다.
“아, 미안합니다.”
“조심 좀 하쇼.”
몸을 부딪친 사람이 인상을 찡그렸다.
일반 유람객이다. 전낭을 꺼냈는데, 은자 몇 푼만 들어있다. 물론 열어보지는 않았다. 전낭을 만지는 느낌만으로도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핟다.
그래서 전낭도 빼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손만 찔러넣었다가 다시 뺐다.
슷!
다음 사람은 몸도 부딪치지 않았다. 그저 옆을 슬쩍 지나쳐갔다.
피부가 구릿빛으로 그을린 소녀인데, 팔팔하기가 젊은 청년 못지않다.
소녀도 독의와는 상관없다.
소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땀만 뻘뻘 흘린다. 유람객들 짐을 날라주는 짐꾼이다.
이런 식으로 일일이 사람들을 뒤져나가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어쩌면 독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다. 이 방법이 아니면 독의를 찾지 못한다.
슷!
호발귀는 중년 부부의 전낭을 만졌다가 놓았다.
‘이 사람도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