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오해중첩(誤解重疊)(5)
검을 미련 없이 분질렀다.
무너진 동굴 속에서 기다란 장검은 사용하기 불편하다. 짧은 단검이 좋다.
분지른 검을 땅 파는 도구로 사용한다.
퍽! 퍽!
땅을 팠다.
탈출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탈출한다.
분명히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다.
땅을 정확하게 파고 있나? 밖으로 나가는 길인가? 오히려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자신은 정확하게 땅을 파고 있다.
투심문은 배수 짓만 배우는 게 아니다. 도굴에 대해서도 도굴꾼 못지않게 깊이 배운다.
사실, 도굴은 정보만 정확하면 일약 거금을 쥘 수 있다.
하지만 투심문은 도굴하지 않는다. 오직 손기술에 의지해서 배수만 한다.
그런데 사부는 도굴을 가르쳤다.
- 그냥 배워 둬. 나중에 써먹을 때가 있겠지.
그냥 배워두는 건 없다.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으니 도굴을 가르치는 것이다.
호발귀도 왜 배워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새로운 것을 접한다는 심정으로 배웠다.
사부 말마따나 언젠가는 써먹겠지 하고 생각했다.
땅에는 결이 있다.
도굴꾼들 용어로는 ‘땅심’이라고 한다.
땅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곳보다 유독 단단하게 뭉쳐진 곳이 있다. 손으로 만져보면 부서지지 않고 단단하다. 하지만 호미로 파보면 찰떡처럼 말랑거린다.
땅심은 땅 중에서 가장 좋은 땅이다.
가장 질이 좋은 땅이 쭉 이어져 있다.
그러니 땅심만 따라가면 손쉽게 땅을 팔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땅심은 지상으로 통한다. 지상에서 공기와 물을 받아들여서 땅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땅심만 찾으면 반드시 지상으로 나갈 수 있다.
호발귀는 땅심을 찾았다. 그리고 부러진 검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뿐이다.
퍽! 퍽! 퍽!
천천히, 서둘지 않고 땅을 팠다.
거름종이에 붙은 작은 불꽃도 여전히 활기 있게 타들어 간다.
공기는 넉넉하다. 어디선가 바람이 계속 들어온다.
퍽! 퍽! 퍽! 퍽!
도굴꾼들이라고 땅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아니, 대부분은 땅심도 모른 체 무작정 땅만 판다. 그러다 보면 물도 만나고 바위도 만난다.
바위는 돌아갈 수라도 있다. 물을 만나면 작업 중지다. 더 파고 들어가지 못한다.
땅심을 따라가면 물도, 바위도 만나지 않는다.
퍽! 슛!
부러진 검이 갑자기 빈 허공을 푹 찔렀다.
손이 흙 밖으로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밝은 빛이 눈 따갑게 쏟아져 들어왔다.
‘나왔다!’
땅을 판 지 하루쯤 걸린 것 같다.
무너진 동굴에 꼼짝없이 갇혔는데, 아주 빠르게 빠져나왔다.
* * *
들개 무리는 늑대를 사냥할 수 있다. 멧돼지도 사냥한다. 노루나 소도 잡아먹는다.
힘이 세고, 발톱이 날카롭고, 이빨이 강철 같아서 감히 찝쩍거려볼 엄두가 나지 않는 동물이라도, 무리만 지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는다.
하지만 들개 무리가 아무리 많아도 사자는 사냥하지 못한다.
암사자한테는 찝쩍거릴 수 있지만, 수사자가 오면 당장 꼬리를 말고 도주한다.
수사자는 워낙 강하다.
“크으으윽!”
잡랑이 비명을 쥐어짰다.
어깨에 틀어박힌 칼이 점점 살을 찢으며 밑으로 그어진다. 점점 더, 점점 더…… 그러다가 마침내 심장을 찢는다.
“끄아아악!”
잡랑은 마지막 비명을 토해냈다.
처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잡랑도 서둘지 않았고, 도천패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양쪽은 긴 싸움을 시작했다.
잡랑이 한 번 움직일 때, 서너 번 움직여야 하는 도천패.
도천패가 달려들면 사력을 다해서 도주해야 하는 잡랑.
누가 더 빨리 지칠까? 싸움이 계속되면 양쪽 모두 지치게 마련인데, 어느 쪽이 먼저 나가떨어질까?
말할 것도 없이 약한 쪽이 빨리 지친다.
잡랑은 개인이 아니라 무리로 생각해야 한다. 도천패 대 잡랑 무리의 싸움이다.
쒜에엑!
벼락같이 솟구친 칼이 파란 불똥을 일으키며 내리꽂혔다.
“끄으윽!”
비명이 또 터졌다.
도천패는 동굴이 무너진 후부터 부쩍 칼이 급해졌다.
도천패가 잡랑을 노리고 달려들면, 다른 곳에서는 일제히 유성추를 쳐냈다.
한데, 도천패가 피하지 않는다.
유성추가 몸을 격타 한다. 돌벽을 부숴버리는 쇳덩어리가 뼈마디를 부러트리려고 한다.
도천패는 그런 공격을 무시한 거다.
그는 유성추를 맞고도 끄덕하지 않았다. 철포삼(鐵布衫) 같은 외문 기공을 겸비한 듯하다.
그리고 가차 없이 칼을 쓴다.
푹! 푸우욱!
몸을 내리친 칼이 힘있게 빠져나갔다.
칼을 맞은 잡랑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칼이 빠져나가자 맥없이 꼬꾸라졌다.
도천패의 대력도강은 잡랑이 받을 수 있는 칼이 아니다.
도천패가 안위를 돌보지 않고 칼을 쓰니, 잡랑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도천패도 타격을 심하게 받은 건 틀림없다.
유성추에 맞을 때마다 비틀거린다. 다리를 심하게 절기도 한다. 하지만 달려드는 속도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와서 칼을 쓴다.
“큭! 지독한…… 놈.”
마지막 잡랑이 고개를 툭 떨궜다.
뚜벅! 뚜벅!
도천패는 무너진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이렇게 쓰러지면 안 되지.”
도천패가 중얼거렸다.
안 되는 건 그의 생각이고, 결국 이렇게 쓰러졌나?
이 정도 암격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무공이라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
천살단, 혈천방이 어떤 것인데 고작 이런 무공으로 그들 사이를 누비려고 했나? 그렇다면 잘못 생각했다. 어린애가 어른을 농락하려 했다면 맞아도 싸다.
호발귀라면 이 정도쯤은 우습게 빠져나왔어야 한다.
“아냐. 이 정도 약골은 아니었어.”
문주를 따르기 전에 무공부터 시험해 봤다.
호발귀는 대력도강을 간단히 막아낸 강자다. 자신이 아는 문주라면 동굴이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했는데, 동굴 안에 갇히고 말았다.
“퉤! 죽었으면 뭐 어쩔 수 없고.”
도천패는 손바닥에 침을 뱉은 후, 묵직한 바위들을 하나씩 들어서 옮겼다.
호발귀를 찾아간다.
굴을 뚫기까지 하루가 걸릴지 열흘이 걸릴지 모른다. 몇 달, 어쩌면 몇 년 동안 굴만 파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그때까지 호발귀가 살아남지도 못할 것이고.
호발귀가 동굴에 갇혀 있다면 사는 길이 없다.
그러니 호발귀가 살리겠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문주이니까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위를 들어낸다.
쿵! 쿵! 쿵쿵!
도천패는 무거운 바위를 들어냈다.
급히 서두르지 않지만 쉬지도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동굴에 쌓인 돌무더기들이 혼자 들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덕분에 수월하게 작업을 하고 있다.
간혹 큰 바위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때는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간다.
힘에 부친 바위를 치우느니 옆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빠르고 수월하다.
호발귀가 바위에 깔려 있으면 어쩌냐고?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면 밑도 끝도 없다.
동굴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고 시신이 없으면 포기한다.
시신을 거두겠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문주의 생사를 확인한다는 의미가 크다.
쿵! 쿵! 쿵! 쿵!
도천패는 계속해서 바위를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스읏!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가 치워 놓은 바위들을 밟으면서 누군가가 다가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을 너무 대책 없이 벌려놨어. 딱 죽기 알맞을 정도로.’
도천패는 칼을 잡았다.
무너진 동굴에 나타난 자는 적밖에 없다.
투심문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있지만, 목숨을 내놓을 정도는 아니다. 그저 살다 보니 웃으면서 농담하는 정도다.
무인? 무인 중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호발귀는 천살단 잡랑을 죽였다. 물론 자신도 죽였다. 혈천방 귀무살도 죽였다.
중원에서 가장 크고 위험하다는 두 집단을 모두 건드렸다.
일을 이렇게까지 벌려놨는데 어떻게 발을 편히 뻗고 자나.
이래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어쨌든 최선을 다한다. 누가 찾아왔다면 기꺼이 맞이한다.
츠으으읏!
칼에 진기를 모았다.
스읏! 스읏! 스으읏!
바위를 밟고 오는 자는 굉장한 고수다. 신법이 매우 유연하다. 기름 위를 미끄러지는 듯 기척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투심문의 밝은 귀가 아니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굉장한 고수!’
도천패는 미간을 찡그렸다.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의 무위를 짐작할 수 있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싸움도 시작하기 전에 어쩌면 질 수 있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와라!’
도천패는 칼을 힘주어 잡았다.
발걸음 소리가 삼 장 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굽이만 돌면 모습을 드러낸다.
저벅!
상대방이 굽이를 돌아서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도천패는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떴다. 그리고 떠듬거리며 말했다.
“문…… 주 놈?”
두 사람은 길을 걸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세세한 것은 서로 묻지 않았다. 어떻게 싸웠는지 일일이 알 필요가 없다. 살아 있으면 다행인 것이다.
“어디로 가는데?”
“복건성 무이산 천유봉.”
“놀러 가?”
“광독풍파를 만나봐야겠어. 최우선으로. 지금 내겐 가장 중요한 일이야.”
“그럼 찾아가야지. 그런데 광독풍파가 누군데?”
“처음 듣지?”
도천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 들어. 하지만 책사가 말해준 사람이니까 실존하는 사람인 건 분명해.”
“책사 말이 나와서 말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가?”
“대충 짐작은 하는데. 나도 옷 묻는 거 봤거든. 여자가 알몸이 드러날 정도로 옷이 찢어지고, 찢어진 옷을 땅에 묻고, 남자 장삼을 걸치고 다니고. 그러면 말 다 한 거 아냐?”
“훗! 말이 그렇게 되나? 아무 일 없었어.”
“그따위로 말하지 말고.”
“아무 일. 아무 일도 없었어.”
“문주놈,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치사하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 하지만 사내자식이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여자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아무 일 없었다고 발뺌해?”
“뭐? 하!”
호발귀가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옷 찢은 것 보고 내가 사람 잘못 봤다는 생각은 했다만, 생각보다 더 쓰레기네. 문주놈아, 좋게 말할 때 책임져라. 일단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싹싹 빌어. 여자 앞에 무릎 꿇는다고 사내 망신이 아니야. 그런 짓을 하고도 뻔뻔한 게 사내 망신이야.”
“하!”
“두고 본다.”
도천패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호발귀는 피식 웃었다.
도천패가 단단히 오해했다. 하지만 변명은 하지 않았다. 등여산을 죽이려는 과정에서 옷을 찢은 것은 사실이니까.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인데, 운공을 하면 주화입마가 일어날 때까지 치달린다는 사실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알아봤자 고민만 깊어질 테니.
도천패는 호발귀에게 크게 실망한 듯 발을 심하게 굴리면서 쿵쿵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