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59화 (59/500)

第十二章 오해중첩(誤解重疊)(4)

원충노인의 팔십일수 중 오간각(晤看覺)이라는 사법(邪法)이 있다.

오간각은 정신을 극도로 맑게 깨워서 일 장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깨닫는 상태를 말한다.

사법이 아니라 정법(正法)이다.

그런데도 원충노인은 사법이라고 기술했다.

사실, 오간각은 인간이 깨우칠 수 없는 경지다.

감각이 완전히 죽은 후라야 가능하다. 죽은 시신에 영혼만 살아있다면, 그리고 영혼이 주위 일 장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챈다면 오간각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사법을 써서 흉내만 내자는 거다. 환술(幻術)을 끌어와서 오간각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자.

검에 맞지 않았지만 맞은 것처럼 보인다. 검에 맞았지만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오간각을 깨우치면 두 가지 다 할 수 있다.

오간각의 요체는 상대방에게 사실과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원충노인은 연무(煙霧)를 사용해서 상대방의 눈을 가렸다. 완전히 보지 못할 정도로 짙은 연무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시야만 살짝 가리는 옅은 연무를 이용한다.

호발귀는 귀화미요공으로 연무를 대신했다.

혈마 진기를 쓰지 않은 귀화미요공은 상대방의 눈을 멀게 하지 못한다.

그 정도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주치균의 눈을 속일 정도는 된다.

무심무실공으로 귀화미요공을 펼치자 운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안개가 피어나 앞을 가렸다.

그거면 충분한 줄 알았다.

일단 주치균의 검을 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일격, 이격, 삼격은 제대로 맞았다. 사격부터는 맞지 않았다. 주치균은 검이 몸을 그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격타당하지 않고 흘려보냈다.

오간각이 몸을 가려주었다. 환상을 그려냈다.

더불어서 신법이 살아났다.

은허신법에는 굉장히 빠른 동법(動法)이 있다. 정법(靜法)으로 전개하면 고요하고 느리며, 편안하지만 동법으로 들어서면 질주하는 천리마가 된다.

매우 격렬하고 활동적이며 강하다.

신법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묘미까지 발견하자 자신이 생겼다.

혈마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주치균을 상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났다.

그때, 그 일이 벌어졌다.

검이 다섯 조각으로 쪼개지더니 몸을 포위했다.

검이 쪼개질 때, 호발귀는 이미 위기를 느꼈다.

‘이건 피하지 못해!’

어떤 검초가 전개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막연히 절망감이 치밀었다.

검편 네 개가 사방을 포위했다. 머리 위 정중앙에 검편 한 개가 얹혔다.

‘피할 수 없다!’

또 한 번 절망감이 치솟았다.

그는 검편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몰랐다. 그런데도 피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이 쪼개질 때, 머리 위로 날아왔을 때…… 두 번이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 위에서 검편 다섯 개가 뚝 떨어졌다.

주치균은 비침을 날렸다. 그리고 검편을 터트렸다.

어떤 무공, 어떤 신법도 폭발을 피하지 못한다. 막지 못한다. 방법은 오직 하나, 역천금령공!

호발귀는 자신도 모르게 역천금령공을 일으켰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혈마 무공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자신도 모르게 불쑥 쓰고 말았다.

혈천도법이 쏟아져 내리는 검편들을 튕겨냈다.

동시에 폭류처럼 일어난 은허신법이 그를 동굴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역천금령공, 혈천도법, 은허신법이 모이자 몸뚱이가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변했다.

혈천도법은 방어막을 형성했다.

검이 밀밀하게 펼쳐져서 쏟아지는 검편들을 모조리 퉁겨냈다. 동시에 신형은 동굴 깊은 곳으로 빨려들 듯 쏘아져 갔다. 점점 검편의 영향력에서 멀어졌다.

주치균이 펼쳐낸 오분폭사는 굉장히 놀라운 검공이다. 하지만, 호발귀가 펼친 수도 대단한 것이다. 만약 혈마가 봤다면 손뼉 치며 좋아했을 것이다.

한데 상황은 좋게 끝나지 않았다.

호발귀는 혈마 무공을 펼친 즉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해냈다.

역천금령공이 휘도는데 이령귀화가 보이지 않는다.

생기를 감싸주어야 할 이령귀화가 무서운 천적을 만난 듯 숨어버렸다.

혈마! 혈마가 되어 가고 있다!

호발귀는 탄식했다.

혈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등여산을 떠나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죽이는 대신, 정반대로 극한의 상태까지 끌어냈다.

검을 들어서 혈천도법을 전개했다.

혈천도법 중 만근 바위도 단숨에 갈라버린다는 혈겁도(血劫道)를 펼쳤다.

손에 들린 검이 동굴을 향해 쏘아갔다.

꽝!

검이 동굴 천정을 쳤다.

혈겁도는 장난처럼 끝났다. 젖먹던 힘까지 모두 쥐어짜 내서 온 힘을 검에 실었는데, 동굴 천정에 흠집도 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물러섰다. 그런데……

우직! 꾸르르르릉!

동굴 안쪽에서 기이한 울림이 들려왔다.

‘무너진다!’

호발귀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역천금령공이 들끓기 시작했다.

곧 살심이 치솟지 않을까 싶다.

그럴 바에는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동굴을 무너트리고 안에 남는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혈마가 되든 무엇이 되든 상관없지 않나.

하지만 무너지는 암석 더미에 깔려서 죽을 생각은 없다.

슈우우웃!

그는 가장 안쪽까지 물러섰다.

꾸르르릉! 우수수수! 꾸르릉!

땅이 울리며, 돌무더기가 들썩거렸다. 아니, 금방 흙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굴이 무너진다.

쿠르릉! 꽈앙! 쾅!

동굴이 무너진다.

호발귀를 찾아서 동굴로 들어섰던 검벽 무인들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왔다.

우르릉! 쾅쾅!

동굴 무너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뿌연 흙먼지가 확 피어 나왔다.

동굴이 무너졌다. 동굴 천정이 완벽하게 주저앉았다.

‘이게 오분폭사!’

주치균은 눈을 부릅떴다.

동굴은 어떤 영향을 받아서 무너졌다.

동굴이 무너질 만큼 크나큰 영향을 준 것은 오분폭사밖에 없다. 동굴에서 싸운 사람 중 오분폭사보다 더 강력한 힘을 토해낸 사람은 없다.

오분폭사에 동굴이 무너졌다.

주치균은 그렇게 믿었다.

“호발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음!”

주치균은 신음했다.

등여산이 호발귀에게 겁탈당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호발귀는 죽여야 한다. 등여산이 사는 세상에서 호발귀 같은 놈이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꼴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지만 동굴이 무너졌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다.

“무너진 바위를 치워보겠습니다.”

검벽 무인이 말했다.

“그만둬.”

주치균은 고개를 저었다.

오분폭사가 벌어진 장소는 동굴 중간이다. 그런데 동굴 입구까지 무너졌다.

동굴 전체가 무너졌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땅 파는데 전문인 광부들이 달려들어서 길을 뚫어도 시신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됐다. 가자.”

주치균은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돌아섰다.

“헉!”

호발귀는 비명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동굴이 무너질 때, 거센 충격을 받고 깜빡 정신을 잃었나 보다.

깨어나 보니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콧속으로는 매캐한 흙먼지 냄새가 풍겼다. 입에서는 돌 모래가 우두둑 씹힌다. 얼굴이며 몸이며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다행히 동굴 안쪽은 무너지지 않았다.

혈천도법으로 동굴 입구를 가격했는데, 그 여파로 중간 부분까지 무너졌다.

안쪽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살았잖아? 억세게 운 좋은 목숨이야.”

호발귀는 툴툴거렸다.

혈마가 되느니 죽는다, 살더라도 동굴에 갇히자는 심정으로 혈겁도를 펼쳤는데 용케 살았다.

호발귀는 화섭자를 꺼내서 불을 밝혔다.

화악!

불길이 일어나면서 무너진 동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굴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방이 꽉 막혔다.

‘아냐, 막히지 않았어.’

호발귀는 흔들리는 불꽃을 봤다.

화섭자로 켠 불을 거름종이에 붙였는데, 불꽃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바람이 불고 있다.

밖으로 나가는 틈이 있다는 뜻이다.

‘나가는 건 급하지 않아.’

호발귀는 돌바닥에 앉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운기를 한다.

무심무실공을 끌어올린다.

따뜻한 진기가 역천금령공이 만들어 놓은 잔재를 말끔히 치우면서 경맥을 지나간다.

차분하게 경맥을 살폈다.

역천금령공은 사라졌다. 경맥이 상당히 부풀어 있어서 역천금령공이 지나갔다는 사실만 확인된다. 그 외에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사라졌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진기를 운기했다.

소주천에서 대주천으로, 그리고 다시 소주천으로 변화시키면서 전신 경략을 모두 살폈다.

뜻밖에도 매우 온전하다.

염려했던 혈마로 유도하는 현상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음!”

호발귀는 침음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혼절? 아무래도 혼절한 사이에 역천금령공이 가라앉은 것 같다.

동굴이 무너질 때 잠깐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감각도 죽었다. 몸을 지킬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이 되자 역천금령공도 가라앉았다.

운기를 죽을 만큼 깊게 해도 의식은 존재한다. 그러면 역천금령공도 존재한다.

역천금령공을 죽이려면 완벽한 혼절이 필요하다. 느닷없이 독사가 달려들어서 깨물거나, 산에 불이 나서 불길이 육신을 집어삼켜도 피한다는 의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이용할 수가 있다.

운기로 역천금령공을 가라앉힐 수 있다. 혼절이라고 생각될 만큼 완벽한 감각 마비 상태에 이르면 용암처럼 들끓던 진기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다.

‘아냐.’

호발귀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처음 이상을 느꼈을 때 지금보다 더 깊이 혼절했다. 자진하려고 태양혈을 두들겼지 않나. 분명히 그때도 혼절했었다. 그리고 깨어난 후에도 역천금령공은 존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천금령공은 똑같이 들끓었다.

그때 느낀 폭주와 지금 느낀 폭주가 다르지 않다. 이제 곧 혈마가 된다고 생각할 만큼 똑같았다.

하지만 실체가 전혀 다른 것 같다.

그때는 살심이 일어났는데, 지금은 전혀 이상이 없다. 아무런 느낌도 일어나지 않는다.

‘광독풍파.’

호발귀는 등여산이 말해준 독의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독의를 만나야겠다.

등여산은 지나가는 말로 말했을 것이다.

호발귀가 정말로 독의를 찾아갈 것으로 생각했을까? 독의를 찾을 바에는 혈천방 귀무살을 찾아가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복수할 힘이 있으니까.

그녀가 광독풍파를 말해준 것은 호발귀 상태를 염려해서다.

또 광독풍파를 만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천하의 신의, 독의라고 해도 내기(內氣)로 인해서 발생한 일종의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치료할 방도는 없다.

이 문제는 오직 호발귀 자신만이 풀어낼 수 있다.

광독풍파를 만나느니 동굴 속에서 면벽하며 내기를 관찰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호발귀는 일어섰다.

역천금령공이 사라졌으니 마음 놓고 나갈 구멍을 찾는다.

‘복건 무이산이라고 했지? 천유봉? 천유봉이라면 하루에도 몇백 명씩 유람할 텐데, 독의가 그런 곳에서 편히 살 수 있나? 어쨌든 찾아가 봐야겠어.’

호발귀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거름종이에 댕겨진 불길을 주시했다. 그리고 불길이 휘날리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