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진기이상(眞氣異常)(5)
등여산은 정말로 고마운 여자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문득 나타나서 그 누구도 베풀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첫 번째 도움은 촌음명 일격이다.
호발귀는 혈마가 되기 직전에 미친 짓을 멈췄다.
문득! 정신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자진이라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신없이 살기에 휘둘렸을 것이고, 등여산은 살인마의 제물이 되었을 거다
두 번째, 등여산은 촌음명보다 더 큰 도움을 주었다.
전신 경맥 타통!
덕분에 들끓던 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역천금령공이 팔팔 끓어올랐다. 들끓는 용암처럼 터져나갈 곳을 찾아서 전신을 휘돌았다.
터져나갈 곳, 살념이다.
만약 등여산에게 살념을 해소했다면 단순히 살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살념은 부수적인 행동이다.
부수적? 그러면 근본이 따로 있나? 맞다. 들끓는 역천금령공이 본질이다.
역천금령공은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초기 단계에서는 살심이 일어나서 사람을 죽이게 유도한다. 하지만 일단 죽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살념, 살심 같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사람을 죽이는 흉기로 둔갑해 버린다.
앞에 있는 사람이 등여산이라면 그녀를 죽인다. 도천패라면 그를 죽인다. 사부가 앞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살수인들 가릴 수 있겠나.
그만큼 역천금령공은 사납고 흉포했다.
그런데 등여산이 전신 경맥을 뚫어주자, 먼지 한 올만큼 작은 숨통이 트였다.
등여산은 혈을 제압한다고 점혈수를 사용했지만, 그것이 호발귀에게는 혈을 문질러주는 지압 역할을 했다.
덕분에 한숨 돌렸다.
한숨, 아주 작은 틈…… 그만한 여유만 끌어내도 역천금령공을 통제할 수 있다.
이령귀화가 살포시 고개를 쳐들었다.
원래 생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질 수가 없다. 생기가 사라지는 순간은 오직 죽는 순간뿐이다.
죽은 시신만이 생기가 없다.
미약한 숨이라도 남아있다면 생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호발귀는 먼지 한 올만큼 작은 틈 속에서 이령귀화를 찾아냈다.
더욱이 등여산은 효험 좋은 보음탕을 먹여주었다.
사실, 호발귀에게 보음탕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탕약이 영향을 미치기에는 역천금령공이 너무 강하다. 먼지 만큼 쪼그라든 이령귀화를 일으킬 수도 없다.
역천금령공에게 보음탕은 봄바람이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다.
딱 그 정도밖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령귀화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에게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살짝 건드리고만 간다.
하지만 그 정도 역할이면 충분하다.
그만한 틈을 얻었기 때문에 이령귀화를 다시 원정에 붙들어 맸다.
이령귀화가 존재감을 드러내자, 역천금령공도 서서히 열기를 식혀갔다.
이령귀화가 제자리를 잡고, 역천금령공이 화를 풀기까지 딱 칠 주야가 걸렸다.
호발귀는 이레 동안 누워있었다.
‘휴우!’
남몰래 한숨을 쏟아냈다.
비로소 호발귀 자신이 자신에게 믿음을 보낼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다시 눈을 떠도 살심 때문에 쩔쩔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주저되는 문제가 있다.
혈마 무공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까? 혈마 무공을 사용해도 되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렬한 살기는 역천금령공의 폭주에서 시작되었다.
진기 폭주만 막을 수 있다면 혈마가 되는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폭주가 시작되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진기 폭주가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면 혈마 무공을 신뢰할 수 없다.
그의 무공은 혈마 무공이 근본을 이룬다.
원충노인의 팔십일수도 있지만, 팔십일수도 혈마 내공으로 펼쳐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혈마 무공을 배제하고 무심무실공으로 펼쳤을 텐데.
할 수 없다. 혈마 무공에 믿음이 생길 때까지는 무공 없이 무림을 활보해야겠다.
번쩍!
호발귀가 눈을 떴다.
“아!”
등여산이 탕약을 먹여주다 말고 깜짝 놀라서 손을 멈췄다.
호발귀는 차분히 일어나 앉았다.
등여산은 눈만 끔뻑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호발귀가 일어나면 안 된다.
그는 여전히 혼절 상태에 있어야 한다. 태산금나 점혈수가 전신 경맥을 짓누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어나 앉았다.
태산금나 점혈수가 파해 되었다.
다시 말하면, 호발귀가 지금 당장이라도 혈마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괜찮아.”
호발귀는 그녀의 생각을 알기 때문에 씩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 거. 그…… 그거. 그것…… 도 괜찮아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후유! 다행이네요.”
“고마워.”
“뭐가요?”
“이것저것 전부. 아주 큰 은혜를 입었어. 원래는 천살단에도 받을 빚이 있었지. 날 잡아가고, 고문하고, 참회동에 가두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대가를 받을 생각이었는데.”
“저 때문에 받지 않겠다는 말이네요?”
“아니. 그 이상.”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어. 정말 고마워.”
등여산은 진심을 읽었다.
호발귀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맙다’라는 말이 아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진정이 말 몇 마디 속에 녹아 있다.
“그럼 됐어요. 정말 몸이 괜찮은 거죠?”
“정말 괜찮아.”
호발귀는 살기가 일어나는 과정을 파악했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진기를 멈출 것이다.
적의 손에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반드시 지킨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혈마 무공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호발귀는 불안정한 혈마 무공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오직 그만이 감당할 수 있다. 누구도 도움을 줄 수가 없다. 혼자서 해결해야 하며, 성패 역시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점혈은 어떻게 풀었어요?”
“저절로.”
“저절로요? 풋! 이제 태산금나도 문 닫아야겠네요. 그거 절대로 혼자서 풀 수 없는 건데.”
등여산이 피식 웃었다.
“이제 막 깨어났으니 좀 쉬어요. 이것마저 먹고.”
그녀가 입속에 흘려 넣어주던 탕약을 옆에 놓고 일어섰다.
호발귀는 동굴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장삼을 입고 있다.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떤 폭풍이 몰아쳤는지 익히 짐작된다.
‘미안! 미안함과 고마움, 모두 갚아 줄게. 반드시. 정말 미안!’
호발귀는 등여산을 가슴에 새겼다.
그녀가 목숨을 달라고 하면 줄 생각이다.
단지 그녀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혈마로 변신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래서 목숨으로 보답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등여산은 천살단 밀마를 봤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눈에 잘 띄는 나무에 어린아이 낙서가 그려져 있다.
천살단 밀마다.
- 돌아오라!
밀마는 매우 간단했다.
너무 간단해서 못 봤다고 할 수도 있고, 뜻을 잘못 이해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
등여산은 한숨을 토해냈다.
천살단 천살단주의 명령이다.
천살단 밀마가 이곳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자신이 호발귀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총주가 호발귀와 싸웠고, 서로가 치명상을 입었고, 다친 호발귀를 그녀가 안고 도주했다. 그리고 치료까지 했다.
이 모든 사실을 천살단이 알고 있다.
본단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낱낱이, 한 점 의혹 없이 해명해야 한다.
그런데 할 말이 없다.
그녀 자신도 자신이 왜 호발귀를 구했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하나.
천살단 무인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천살단 반역도가 된다.
감언이설로 속일 수는 있다.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서 자신이 한 행동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
그녀는 천살단주를 배신하고 싶지 않다. 아니, 천살단 사람들을 기만하기 싫다.
굉장히 모순된 행동이지만, 자신이 했었던 행동을 고스란히 말하는 수밖에.
천살단주가 돌아오라고 하니 돌아간다.
“내가 한 일, 내가 책임져야지. 그래 이제 책임질 시간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좋아지신 것 같고, 난 이만 가볼게요.”
등여산이 마지막 탕약을 내놨다.
“……”
호발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살단 책사가 천살단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원래 그녀는 강하까지만 동행할 생각이었다.
강하 너머에 있는 독림, 그리고 그곳에 있는 혈천방을 급습하면 더 볼 일이 없었다.
볼일이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호발귀는 혈천방을 찾으려고 하지만 찾을 방도가 없다. 오히려 천살단 추격을 피해서 도피해야 한다.
천살단 책사가 호발귀와 함께 있는 것도 어색하다.
“부탁 하나만 해요.”
“뭐든지.”
호발귀는 등여산을 쳐다봤다.
“물이 흐르는 계곡에 둑을 쌓으면 물이 고여요. 연못이 되죠. 둑을 더 높이 쌓으면 저수지가 되고…… 일단 저수지가 되면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지금 호발귀 상태다.
살기든 혈마 무공이든 이미 지니고 있다.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등여산이 침착하게 말했다.
“저수지가 만들어지면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둑이 무너지면 큰일 나잖아요. 그래서 항시 금이 갔나 살펴봐야 하죠. 그런데 둑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서 보수해도 안 될 때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저수지 물을 말려야 해요.”
호발귀는 묵묵히 등여산을 쳐다봤다.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아시죠? 너무 심한 말이라는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혈마는 되지 말아요.”
“약속하지.”
호발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말했다.
혈마가 진행되면 중간에서 막을 방도는 없다. 저수지 둑이 무너지면 물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절대적으로 둑이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가장 안전한 둑은 무엇인가? 자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둑은 물론이고 저수지까지 모두 없애 버린다. 저수지가 없는데 둑이 무너진들 어떤가.
혈마가 되지 않으려면 자진해야 한다.
등여산은 혈마가 되느니 죽으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헛말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래서 미안해요. 이런 부탁을 해서.”
“아니, 그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서. 미안할 필요 없어.”
호발귀는 활짝 웃었다.
“복건(福建) 무이산(武夷山)으로 가봐요.”
“무이산?”
“무이제일승경(武夷第一勝景)이 어딘지 알죠?”
무이산에서 제일 빼어난 경치라면 천유봉(天游峰)을 말한다.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유봉에 가면 광독풍파(狂毒瘋婆)라는 사람이 있어요. 의원은 당신 내기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독인(毒人)이라면 혹시 모르겠네요. 진맥 한번 받아 봐요.”
“광독풍파?”
“의원이기는 한데,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치료는 하지 않고 독물 실험을 하죠. 그 방면으로는 유명해요. 멀쩡한 사람도 잡아놓고 생체 실험을 해요.”
“그런 사람을 내버려 두나?”
“사파(邪派)이기는 한데, 증거가 없어요. 살인하는 것은 분명한데, 증거가 전혀 없어요. 흔적 없이 녹여버리는 것 같아요. 그 정도 독술이라면 혈마 무공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치료받는 건 수단껏 알아서 하세요.”
호발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일어섰다. 그리고 기다란 장삼을 질질 끌면서 동굴 밖으로 걸어갔다.
호발귀는 떠나가는 그녀를 끝없이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