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52화 (52/500)

第十一章 진기이상(眞氣異常)(2)

동굴 입구가 보인다.

도천패가 동굴 입구 주변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천살단 살단을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살단 총주는 쓰러졌지만, 잡랑은 여전히 살기를 번뜩인다.

순간, 등여산은 우뚝 멈춰 섰다.

“아!”

부지불식간 탄식도 쏟아졌다.

밝은 빛을 대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혈마지란(血魔之亂)!

무림은 혈마가 일으킨 대참극을 혈마지란으로 기록했다.

이백 년 전에 벌어졌던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중원 무인 중 절반 이상이 죽고, 무림이 재기불능 상태로 추락했던 대사건 아니던가.

호발귀가 미쳐간다.

살기는 혈마 무공 때문에 일어났다. 눈은 귀신처럼 충혈되었고, 몸에서 뿜어나온 열기가 멀리서도 느껴진다.

저 상태로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까?

이성을 잃은 마인이 된다.

과거, 세상 사람들을 눈에 띄는 대로 죽였던 혈마가 다시 나타난다.

“호오!”

등여산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호발귀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죽여야 해.’

등여산은 동굴 차디찬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생각을 추슬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무공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않나.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혈마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호발귀를 제압하는 방법 중 가장 실효성이 높은 게 뭐가 있을까?

일단 원거리 공격이 생각난다. 활, 노궁, 암기 등등을 사용하면 되지만, 지금은 그런 병기가 없다.

두 번째는 동굴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물론 화약 같은 것도 없다. 그러니 동굴을 무너트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도천패가 이해해 준다면 동굴 입구를 틀어막을 수는 있다.

‘불가능해.’

먼저, 도천패는 동조하지 않는다.

도천패는 이미 호발귀에게 인생을 걸었다. 그런 점이 뚜렷하게 보인다.

도천패는 호발귀 무공이 무엇인지도 안다.

자칫하면 혈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생을 걸고 쫓아다닌다.

그를 움직인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서 뜻을 굽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둘째, 도천패가 동조해 준다고 해도 기껏해야 동굴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는 것이 고작이다.

호발귀는 곧 통제 풀린 망아지가 된다. 혈마가 된다.

그때가 되면 혈마 무공이 극성으로 풀려나올 텐데, 바위 따위로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도 안 돼.’

등여산은 살해당할 뻔한 여인에서 천살단 책사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이지는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아주 차고 냉철하게 생각을 이어갔다.

‘그럼 방법은……’

호발귀를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혈마로 변신하는 꼴도 못 보겠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딱 하나, 죽이는 것뿐이다.

호발귀는 등여산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이지만,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

촌음명(寸陰冥)!

태산파 최후 절초가 남아있다.

아주 위험하지만 가장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은 잊혔지만, 옛날에는 아주 유명했던 말이 있다.

- 참재사태인방변회조뢰벽(站在死太人旁邊會遭雷劈).

죽어가는 태산 문도 옆에 있으면 함께 벼락 맞는다.

태산파에는 죽음 직전에 펼칠 수 있는 최후 절초가 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도 살만 붙어 있으면 절초를 펼칠 수 있다. 그리고 상대를 죽인다.

촌음명이라는 수법이다.

살이 붙어 있는 상태라면 미미한 진기를 흘려보낼 수 있다.

너무 미약한 진기라서 상대방은 알아채지도 못한다. 하지만 몸 안으로 들어간 진기는 바늘로 변해서 뇌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뇌 신경을 끊어놓는다.

죽음은 촌각 만에 일어난다.

촌각 만에 죽는다고 해서 시간을 뜻하는 촌음, 살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만 펼칠 수 있다고 해서 간격을 뜻하는 촌음, 마지막 남은 진기를 흘려보낸다고 해서 사력을 뜻하는 촌음…… 촌음명은 죽음의 절초다.

“그래. 그래. 됐어. 촌음명이면 된 거야.”

등여산은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촌음명을 펼치려면 호발귀 앞에 서야 한다. 혈마에게 살해당할 생각을 해야 한다. 죽기 전에 펼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촌음명을 펼칠 기회는 생긴다.

촌음명이 통한다면 살해당하기 전에 죽일 수 있다.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제 발로 걸어서 죽으러 가는 꼴이 된다. 그리고 끝내는 죽겠지.

‘그래, 잘못되면 죽는 거야. 하자!’

등여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아미타불! 아미타불!”

장진 스님이 동굴 한구석에 앉아서 지극히 잔잔한 음성으로 불호를 읊었다.

“끄으윽! 끄윽!”

호발귀는 짐승처럼 몸을 비틀었다.

살기를 해소하지 못할 때, 새빨갛게 달군 인두로 살을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살기는 항시 의지로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술이나 약물에 취하지만 않는다면 살기에 휘둘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해왔다.

그런데 미치겠다.

흔히 살심이라고 하면 그저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 정도로만 생각하는게 아주 큰 오산이다.

이건 마약 중독 환자가 마약을 찾는 것과 같다.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 손발이 덜덜 떨린다. 숨이 턱턱 막히고 답답해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진기고 혈마 무공이고 일절 생각나지 않는다.

역천금령공이 어떻고, 이령귀화가 어떻고 하는 말들은 개나 처먹으라고 해라.

“도와……도와줘.”

호발귀는 장신스님에게 말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장진 스님은 호발귀가 애원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호발귀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살기가 치솟아서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다. 피가 두 배, 세 배 빨리 돈다.

살기가 진기를 움직이는 것인지, 진기에 이상이 생겨서 살기가 일어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둘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상황……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도와줘.”

호발귀는 다시 애원했다.

그때, 장신스님이 염송을 그치고 눈을 떴다.

파앗!

장진 스님의 눈가에서 파란 인광(燐光)이 번뜩였다.

스님은 친근하지 않다. 편하지 않다. 다정하지 않다. 정반대로 악하다. 싸늘하다. 무섭다. 눈빛이 너무 차서 스님이 아니라 악불(惡佛)처럼 보인다.

아! 맞다! 악불이다!

장진 스님은 호발귀의 고통을 즐기고 있다.

“도와……”

호발귀는 도와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멈춰버렸다.

장진 스님은 도와주지 않는다. 사정이 나빠질수록 더욱 도와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괴로움에 빠져서 허덕이는 모습을 보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장진 스님은 수평적인 관계에서만 우호적이다.

관계가 혈마 쪽으로 조금이라도 기울어지면 그때부터는 절대로 손을 내밀지 않는다.

장진 스님은 혈마 무공의 정령(精靈)이다.

이미 호발귀가 혈마 무공에 잠식당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도와주지 않는다. 혈마 무공에 더욱 깊이 함몰되어서 이성을 잃고 날뛰라고 주문한다.

악불이 정체를 드러냈다.

지금이라도 사림을 이겨내고 다시 수평적인 관계로 돌아선다면 어떨까? 말할 것도 없다. 장진 스님은 언제 냉담했냐는 듯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장진 스님이 악불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사태가 완벽하게 기울어졌다는 뜻이다. 호발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혈마 무공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다.

‘틀렸나?’

호발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사박! 사박! 사박!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그 전에 사람 냄새를 맡았다.

배고픈 늑대가 새끼 양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눈길이 자연스럽게 먹잇감을 향한다.

사람, 먹이가 보인다.

“잠깐만!”

등여산이 다정하게 말했다.

“날 죽이고 싶다는 것 알아. 죽을게. 그 전에, 한 번만 안아보자. 그럼 죽여도 괜찮아.”

호발귀가 멈칫 거렸다.

등여산은 호발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걸었다. 목숨은 내놓은 사람처럼 진기도 일절 일으키지 않았다.

사박! 사박!

그녀가 호발귀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호발귀를 안았다. 순간,

츠읏! 피윳!

두 손에 운집해 있던 진기가 등 뒤 영대혈(靈臺穴)로 쑥 들어갔다.

아니다! 촌음명이 터졌다 싶었는데, 어느새 일어난 거센 반탄력에 되 튕겨 나왔다.

터엉!

등여산은 튕겨 나온 자신의 진기에 오히려 두 손이 떠밀려버렸다.

“헉!”

등여산은 경악성을 흘렸다.

촌음명이 통하지 않는다.

호발귀는 미친 와중에도 호신공(護身功)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강벽이 너무 단단해서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유일하게 믿었던 창이 부러졌다.

“아!”

등여산은 탄식했다.

오직 촌음명 하나 믿었다. 하지만 절기가 통하지 않는다. 끝난 것이다.

등여산은 두 손을 축 늘어트렸다.

마음대로 해.

이제 혈마에게 죽는 일만 남았다. 정신 잃은 광마가 살수를 펼칠 것이다.

등여산의 머릿속은 하얗게 텅 비었다.

머릿속에 만권의 책을 담고 있으면 뭐하나. 모두가 찬탄하는 병략, 치밀한 계산도 이 순간에는 동굴 바닥에 나뒹구는 옷 한 조각만 못 하지 않나.

그때, 호발귀가 움직임을 멈췄다.

“왜…… 왔어.”

인간 음성이다. 광마, 혈마의 음성이 아니라 호발귀의 음성이다.

“죽이려고.”

등여산이 차분히 말했다.

“죽여.”

호발귀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죽이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우욱!”

호발귀가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에게서 떨어져 두 팔로 땅을 짚는데, 몹시 힘들어 보인다.

몸이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은 쉽게 떨어졌는데, 가슴에 얹힌 손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덜덜 떨기만 한다.

호발귀는 여전히 살심에 휘둘리고 있다. 그런 상태로 그가 말했다.

“이런 꼴 겪게 해서 미안.”

등여산의 눈빛에 기광이 번뜩였다.

호발귀가 한 말은 진심이다. 마공에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한사코 살수를 피하려고 한다.

그녀는 많은 책을 읽었다.

내기(內氣)가 헝클어지면서 살인마가 되는 마공에 대해서도 안다. 천살단 마공관에는 많은 마공이 있고, 그녀는 거의 모든 비급을 열람할 권한이 있다.

당연히 지금 호발귀가 겪는 상태도 충분히 짐작한다.

호발귀는 매우 처절하다. 살심에 꺾이면 오히려 모든 게 편해진다. 또 꺽이고 싶다. 살인마에게는 살심을 풀면서 희열을 느낀다. 그 한순간을 버티고 있다. 십 년 면벽한 고승도 넘기 힘든 것이 살심인데, 지독하게 참는다.

“크아아아악!”

호발귀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게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이다. 검에 찔리는 것보다도 생명체를 놓아주는 것이 더 힘들다. 백일 동안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보고도 물러서는 것과 같다.

“크윽!”

퍽! 퍽! 퍽! 퍽!

호발귀는 동굴 바닥에서 날카로운 돌을 집어서 두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허벅지가 짓이겨졌다.

살점이 떨어지고 핏물이 뭉클뭉클 흘러내렸다.

툭!

호발귀가 피 묻은 돌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등여산을 쳐다봤다.

“고맙다. 영대혈을 가격한 것, 그게 없었으면 난 짐승이 되었을 거야. 짐승으로 사는 것보다 인간으로 죽는 게 낫겠지.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 잊고 살았으면 좋겠다.”

호발귀가 씩 웃었다.

등여산은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다. 호발귀의 말이 꼭 유언처럼 들렸다. 그때,

슛! 퍽!

호발귀는 그녀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손을 썼다. 손을 들어 올려서 양쪽 관자놀이를 힘껏 찔렀다. 태양혈(太陽穴)이 꿰뚫리면서 피가 펑 터져 나왔다.

“안 돼!”

등여산은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고함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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