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혈기(血氣)(5)
혈천방 본단은 매우 크다.
동서 길이만 족히 삼사 리 정도 되는 것 같다. 남북으로도 삼사 리 정도 된다고 추정하면, 능히 강하 열다섯 개 마을을 다 담고도 남을 정도다.
“혈천방이 이렇게 컸어?”
도천패가 놀라서 말했다.
사실, 말은 그가 했지만 놀라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면 혈천방은 왜 이런 땅을 미련 없이 버렸을까? 왜 이십 년마다 한 번씩 본단을 옮기나.
이만한 땅이 독림이라는 숲에 가려져 있다.
모두 망연자실,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이 넓은 데서 어디로 가야 호발귀를 찾나? 각 전각을 모두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빈집. 귀무살이 호발귀를 왜 빈집으로 데려왔지?’
등여산이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 머물려고? 아니야. 즉시 본단으로 호송해야 마땅해, 본단으로 호송하지 않고 여기로 왔다? 일단은 본단 노출을 꺼리는 것일 테고, 그러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일정한 장소에서 기다려야 하는데, 그곳이 여기?’
등여산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독림은 안전하지 않다. 독무를 항상 피워놓지 않는 한, 누구든 침입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강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금지구역이지만 천살단 무인들은 내 집처럼 들락거린다.
그렇다면 이곳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혈마록! 혈마록을 빨리 받아내려는 거야. 그러면……’
호발귀가 어디로 갔을지 짐작된다.
“형옥을 찾아. 형옥으로 갔어.”
등여산의 말을 곧 행동 지침이다.
“형옥을 찾아!”
주치균이 검벽 무인들을 다그쳤다.
검벽 무인들은 호위가 주된 임무다.
자나 깨나 오로지 어떻게 하면 단주를 안전하게 모실까 하는 부분만 생각한다.
수색이나 추격은 생각하지 않는다.
수색, 추격은 차라리 비자가 더 낫다.
검벽 무인들이 비자보다는 훨씬 강하지만, 추격이라는 측면에서는 비자를 따라가지 못한다.
검벽 무인 열 명은 빠르게 수색했지만, 형옥조차도 찾지 못했다.
“형옥이 어디 있을 것 같아요?”
등여산이 도천패에게 물었다.
“그걸 내게 묻나? 그쪽 사람이 몇인데.”
도천패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전 이미 찾았죠.”
“그런데 왜?”
“투심문 눈썰미가 어떤지 보고 싶어서요. 요즘 투심문에 대해서 흥미가 부쩍 당기네요.”
“별것이 다 흥밋거리네. 못 찾았으면 좀 찾아주십시오 하고 사정이나 할 것이지.”
“찾았어요?”
“찾았지.”
“그럼 셋 세면 일제히 가리키기로 해요. 괜찮죠?”
“좋아. 하나, 둘, 셋!”
도천패가 숫자를 헤아렸다. 그리고 셋을 셈과 동시에 두 사람이 일제히 건물을 가리켰다.
“거! 찾았으면 그냥 갈 것이지 뭘 시험하고……”
도천패가 짐짓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같은 건물을 가리켰다. 맨 뒤, 산자락에 붙어있는 붉은 색 건물이다.
“투심문, 확실히 흥미로워요.”
등여산이 활짝 웃었다.
쒜에엑! 쒜엑!
검벽 무인들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도천패는 빨리 달리지 않았다. 달리기 귀찮다는 듯 뒤에서 느릿느릿하게 걸어왔다.
“급하지 않은 모양이군.”
주치균이 도천패를 보며 말했다.
“형옥은 비었을 거야. 이미 종소리가 사방에 퍼졌잖아. 형옥에 있었어도 벌써 움직였을 거고, 형옥으로 가는 것보다는 튀어나오는 벼룩을 보고 싶은 거겠지.”
“비었어?”
“검벽 검주가 너무 생각을 안한다.”
“네가 옆에 있어서 그래. 네가 있으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투심문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줘.”
“투심문? 배수문파는 왜? 기록에 남아있는 것도 없을걸?”
“본단에 있는 것은 모두 보고 받아서 읽어봤는데, 너무 부족해. 알아볼 데 있으면 다 알아봐 줘.”
“갑자기 투심문은 왜?”
“이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해. 도천패라는 사람은 자기들 말마따나 툭 튀어나온 별종이라고 해도, 호발귀는…… 이런 자가 왜 배수가 됐지? 배수로 만족할 수 있나?”
“재능이 늦게 깬 거지.”
그런 경우가 많다.
호발귀는 무인이 아니었다. 천살단에 잡힐 때까지는 한낱 배수였다. 하지만 참회동에 갇혀 있으면서 무인으로 변모했다. 그것도 혈마 무공을 수련한 악귀가 되었다.
이번 일에 얽히지 않고 배수로 살았다면 평생 배수 짓만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무공을 수련한다거나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을 것이고.
본인조차도 무공에 재능이 있는 줄 몰랐다.
등여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투심문은 감당할 수 없는 자를 문주로 앉힌 거야. 이런 경우, 십중팔구 탈이 나.”
“그래서 탈이 났잖아.”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붉은색 전각을 향해 치달렸다. 물론 주위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가리킨 붉은 색 전각은 형옥이 맞았다.
전각 문을 열자마자 피비린내와 곰팡내가 뒤섞인 묘한 악취가 훅 풍겨왔다.
형옥은 외인을 고문하고 가두는 곳이다. 하지만 혈천방 무인들을 위압하는 곳이기도 하다.
잘못하면 형옥에 잡혀간다!
혈천방 문도가 형옥만 보면 공포를 느껴야 한다. 형옥 쪽으로는 얼씬거리는 것조차 싫어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전각과 다르게 붉은색으로 칠했다.
다른 전각들처럼 모여있지 않고 한쪽 구석에 따로 떨어져 있다. 또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담장도 높이 쌓았다. 담장 높이가 전각 지붕에 맞닿을 정도다.
한눈에 봐도 위압적이다.
이런 곳은 매우 중요한 곳, 아니면 매우 위험한 곳이다.
등여산과 도천패는 위험한 곳으로 봤다. 혈천방 형옥이니 가장 위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꽈앙!
검벽 무인들이 전각문을 부수면서 뛰쳐들어갔다.
이미 혈천방은 철수하고 없다. 삼 리, 혹은 사 리에 달하는 넓은 땅에 임자가 없다. 남들 이목을 꺼릴 필요가 전혀 없다. 상대는 귀무살뿐이다.
꽈앙! 꽝!
여기저기서 큰 소리가 울렸다.
검벽 무인들이 사방을 뒤지고 있다. 문이란 문은 모조리 걷어차면서 뛰어 들어간다.
“요란하기는.”
뒤늦게 어슬렁거리면서 형옥을 들어온 도천패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단서 잡았죠?”
등여산이 물었다.
“그런 건 당신 졸개들에게 물어. 아까부터 왜 자꾸 내게 묻는데?”
“귀무살은 여기에서 호발귀를 고문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나타나는 바람에 생각을 바꿨죠. 즉시 철수하기는 했지만, 본문으로는 가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귀무살을 추격해 주세요.”
“내가?”
“우린 모두 추격에 능하지 못해요. 당장 여기서 추격 단서를 찾는 것조차 힘들 거예요.”
“나는 할 수 있나? 나도 못 해.”
“이미 단서를 찾으셨죠?”
“검벽 무인들은 눈을 안 달고 다니나? 빤히 보이는 단서도 못 찾으면 어떡해?”
도천패가 손을 들어 땅을 가리켰다.
그곳에 움푹 파인 발자국이 찍혀있다. 다른 발자국은 옅은데, 하나만 깊다.
“호발귀를 엎었네요.”
“보면 보이잖아. 이제 봤으니까 따라가.”
도천패는 흥미 없다는 듯 전각 난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우리보다는 투심문이 급하지 않나요? 그쪽 문주가 잡혀간 건데, 안 가실 거예요?”
“투심문에는 한 가지 철칙이 있어.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한다. 앞가림을 못하면 혀 빼물고 죽는다. 못하면 죽어야지. 그다음 문주는 나야. 난 손해 볼 것 없어.”
도천패가 신발을 벗어서 탁탁 털었다.
정말로 급한 게 없어 보인다. 아니, 추격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등여산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병법에 뛰어나다고 해도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밀 제안이 없다.
도천패나 호발귀에게는 천살단이 필요 없다.
호발귀가 잡혀가면서 고맙다고 밀마를 남긴 것은 귀무살에게 안내해 줘서 고맙다는 뜻이다. 아니다. 귀무살은 혼자서도 찾는다. 그는 참회동을 빠져나오는 즉시 강하로 왔다. 독림을 넘어서 지평으로 들어왔다.
그가 고맙다고 한 것은 산적을 죽이게 만든 일, 살인하라고 충동질한 일을 말한다.
그때, 그는 혈기를 봤다.
참회동에서 구치균을 공격할 때는 혈기를 보지 못했다. 혈기를 알고 있다고 해도 활용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산적을 죽이면서 완전히 각성했다.
그것이 고맙다고 말한 것이다.
도천패도 천살단이 필요 없기는 마찬가지다.
도천패 무공은 주치균과 버금가거나 능가한다. 형옥에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하다.
천살단이 추격에 능한 것도 아니다. 혈천방 본단까지 들어와서도 헛발질만 계속하고 있다. 조금만 주의하면 당장 찾을 수 있는 형옥조차도 못 찾았다.
도천패는 돈이나 명예에도 관심 없다.
투심문도이니 돈은 넘칠 만큼 있고, 명예를 탐했으면 대장장이로 지내지도 않았다.
그가 천살단과 함께 움직일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제안할 말이 없다. 추격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추격을 멈추는 이유가 뭐죠?”
등여산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검벽 무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검벽 무인들은 전각 곳곳을 뒤지고 있지만, 도천패가 가리킨 발자국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쪽은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전에 소저 입장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기억나?”
“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 아마 대답을 피했지? 표정으로만 말했을 거야. 죽일 거라고. 맞지?”
“……”
“문주놈하고 별로 관계도 없지만, 그래도 투심문 사람 아닌가. 외인이 투심문 사람을 죽인다는데, 그걸 끌고 가? 에이. 문주놈은 혈천방과 함께 있는 편이 안전해. 문주놈이 수련한 혈마 무공도 그쪽 것이고. 그런데 내가 뭐하러 추격해.”
“지금 이대로 혈천방에 가면 아무리 혈마라도 죽을 수밖에 없어요. 혈천방은 혈마를 지운지 오래예요. 혈마가 나타나는 걸 우리보다 더 꺼릴 거예요.”
“문주놈 운명이지.”
도천패가 일어섰다.
“난 다시 황수 건너간다.”
“잠깐만요!”
등여산이 다급하게 도천패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정말 추격 안 해주실 거에요? 호발귀는 혈마록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게 혈천방에 들어가면 무림은 피바람이 일어나요. 그래도 상관없나요?”
“그걸 알면서 혈천방에 보낸 게 천살단 아닌가?”
“……”
“소저도 그래. 솔직히 문주놈 생사는 관심 없잖아? 문주놈을 이용해서 혈천방을 부수려다가 그게 안 되니까 혈마 무공을 기억하고 있는 문주놈이라도 죽이자 이거 아냐? 그런데 날 쓰면 안 되지. 사람이 어떻게 그러나?”
“……”
“이놈의 칼, 역시 안 어울려. 그저 신나게 쇠나 두들기면서 사는 게 훨씬 속 편해. 후후!”
도천패가 휘적휘적 걸어갔다.
“수하를 돌려보내.”
“응?”
“도천패를 따라가야겠어.”
“도천패를 황수를 건너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 아니군. 호발귀를 쫓아갔군.”
“수하까지 데리고 가면 즉시 눈치챌 거야. 그러니 충분히 거리를 두고 조용히 따라가.”
“도천패 무공이 만만찮은데 거리를 두면……”
“아까 말을 나누면서 소매에 취향(翠香)을 묻혀놨어. 눈치 빠른 배수면 알아챘겠지만, 도천패는 그런 배수가 아니잖아. 천만다행이지. 취향만 따라가면 최소한 제이지까지는 갈 수 있어.”
“음! 검벽이 이렇게 쓸모없는 줄 처음 알았는데. 후후!”
주치균이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