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혈기(血氣)(3)
“놈을 정말로 봤다.”
주치균이 속삭이듯 말했다.
“뭘?”
“호령산 산적.”
“……”
등여산이 침묵했다.
“후후후! 넌 가까이서 봤으니까 충격이 더 컸겠군. 그래서 이상해진 거야?”
“헷갈려. 호발귀가 헷갈려. 마인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돼. 난 호발귀가 산적을 죽일 때 소름이 쫙 끼쳤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을 보는 느낌이었어. 어땠어?”
등여산이 주치균에게 물었다.
“뭐?”
주치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등여산을 봤다.
“너 방금…… 뭐라고? 괴물을 본 느낌이었다고? 하! 야!”
주치균이 등여산을 보며 고함질렀다.
앞서가던 검벽 무인 열 명이 일제히 뒤돌아볼 정도로 음성이 컸다.
“너 정말 정신 안 차릴래!”
“왜?”
“등여산!”
“왜!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나 귀 안 먹었어.”
“아니, 내가 보기엔 넌 귀도 먹고 눈도 멀었다. 어떻게 지금 그런 말을? 뭐 인간이 아니라 괴물? 소름이 쫙 끼쳐? 이게 지금 책사가 할 말이야!”
“뭐?”
“물러서. 물러섰다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들어와. 지금 상태로 가면 넌 짐만 돼.”
“……”
등여산은 일시 말을 잃었다.
주치균은 농으로라도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진심이기에 이런 말을 한다.
‘뭔가 보지 못한 게 있어.’
그녀는 즉시 안색을 고치며 말했다.
“내가 뭘 잘못 본 것 같네. 뭘 생각해야 해?”
“후후! 이제야 천살단 책사로 돌아왔네. 혈기(血氣). 가자.”
주치균이 짧게 말한 후, 즉시 신형을 띄웠다.
‘혈기?’
등여산은 독림 한가운데서 꼼짝도 하지 않고 혈기를 생각했다.
주치균이 말한 혈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혈기가 아니다. 혈마의 혈기다.
‘호발귀가 혈기를 사용한다는 건가?’
호발귀의 무공을 지켜봤지만, 진기와 다른 어떤 것이 움직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 왜 혈기를 생각하라고 한 것일까?
‘혈기. 생명 유지에 필요한 피와 기운. 격하기 쉬운 기질. 정의감. 협기(俠氣). 원기(元氣).’
두말할 것도 없이 혈마의 혈기는 원기다.
세상은 혈기를 좋은 말로도, 나쁜 말로도 사용한다.
혈기왕성이란 말은 좋게는 기운이 넘친다는 말이고, 나쁘게는 피가 끓어서 들뜨는 마음을 말한다. 판단력이 약해서 실수하기 쉽다는 것이다.
혈기지분이란 젊은 기운으로 일어나는 분노를 말한다.
혈기포태라는 말도 있다. 부모의 피와 기운을 물려받아서 태어난 것을 말한다.
자, 보자. 이 말들 속에서 혈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혈기왕성하면 자제하여 기운을 눌러야 한다. 혈기가 왕성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누를 수는 없나? 없다. 그것은 몸이 알아서 저절로 일으킨다.
혈기포태는 더더욱 말도 안 된다. 내가 물려받고 싶어서 물려받나? 물려주고 싶어서 물려주나? 잉태라는 과정에서 저절로 물려주고 물려받는다.
혈기는 인위적으로 건드릴 수 없다.
혈마 무공에서는 혈기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무리(武理)다.
‘이것을 왜 생각하라고 했지?’
호발귀가 산적을 죽일 때, 자신은 그의 잔인함을 봤다. 망설임 없는 손속, 죽는 사람을 지켜보는 차디찬 마음을 봤다. 반면에 주치균은 오직 무공만 봤다.
‘무공…… 무공을 보면 혈기가 보이나?’
등여산은 어두운 흑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뱀들이 기어간다. 독충이 득실거린다. 하지만 피독단을 복용하고, 피독산을 몸에 뿌렸기 때문에 그녀 주위로는 얼씬거리지 못한다. 그래서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다.
그녀는 생각에 집중했다.
무인은 두 종류로 나뉜다.
혈기를 사용하는 자와 그 외, 이 두 종류다.
일반적으로, 무인이라고 하면 의념으로 진기를 끌어낼 줄 아는 자를 말한다.
물론 무인 중에는 순수하게 외공(外功)만 추구하는 문파도 있다.
철포삼(鐵布衫), 금종조(金鍾罩) 등 외공만으로도 아주 강력한 파괴력을 구사한다.
하지만 순수한 외공은 없다. 외공을 사용하는 무인도 진기를 사용한다. 순수한 외공을 주장한다면, 순수한 검법이나 도법도 인정해야 한다.
반드시 진기를 사용해야만 무인이냐 하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특별히 무공을 배우지 않아도 싸움꾼인 사람이 있다. 무인을 이긴다. 하지만 진기를 사용해서 초식을 전개할 줄 아는 자를 무인이라고 말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문제들이 혈기를 말하는 순간 싹 사라진다.
이후, 무인의 종류는 딱 두 종류로 바뀐다. 혈기를 보고 사용할 줄 아는 무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바뀐다. 진기를 사용하건 말건 상관없다.
내공이든 외공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같은 무인이 아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같은 인간이 아니다.
도(道)를 깨달으면 신선이 된다. 신선은 도인이나 도사, 도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신선이라고 한다. 도를 추구해서 극상에 올랐지만, 신선은 도인이 아니다.
도인은 인간 세상을 세 종류로 가른다. 신선과 도인과 일반인이다.
신선의 눈으로 봤을 때, 도인이나 일반인이나 매한가지다. 도를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명확하다. 단지 도를 추구한다고 해서 도인과 일반인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신선이 봤을 때는 그렇다.
신선의 눈에는 세상이 신선과 일반인, 딱 두 종류다.
혈기를 사용하면 그와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호발귀와 기타 사람들이 된다. 주치균이나 시장에서 그릇을 파는 장사꾼이나 똑같은 사람이 된다.
“아!”
등여산은 탄식했다.
그렇다. 누군가가 혈기를 사용하는 순간, 나머지 사람은 무인도 아닌 게 된다.
주치균이 본 것은 그것이다.
‘도대체 뭘 본 거야? 난 아무것도 못 봤는데. 혈기라는 게 정말 있는 거야? 정말 본 거야?’
등여산은 걸음을 떼어놓았다.
독림 독기는 피독단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약해졌다. 충분히 걸어 들어갈 수 있다.
호발귀는 밀마를 남겼다.
“이거! 검주님!”
검벽 무인이 인상을 확 찡그리면서 급히 주치균을 불렀다.
주치균이 무인에게 걸어갔다.
검벽 무인은 싸움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풀밭을 수색하는 중이었다.
호발귀나 귀무살이 무엇을 남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찾을 수 있다면, 발자국 정도라도 남아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뒤져봤다.
그런데 정말 발자국이 남아있다.
발자국은 죽은 녹색 뱀 옆에서 발견되었는데, 뱀 사체 때문에 더욱 눈길을 끌었다.
동그라미 옆에 삐침을 긋고, 일직선을 내리그었다.
‘사(謝)’ 자의 천살단 은어다.
“고맙다는데요?”
“음!”
주치균은 침음했다.
주치균은 호발귀가 펼친 조공(爪功)때문에 얼굴에 흉한 상처가 생겼다. 눈만 내놓고 나머지는 면사로 가리지 않는 한, 숨겨지지 않을 상처다.
그에게서 묵사검도 회수해야 한다.
그런데 그가 고맙단다.
주치균이 침착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다른 흔적을 찾아봐. 뭔가 있을 거야!”
도천패는 핏자국을 유심히 살폈다.
주변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초원에서 시작해서 골까지로 이어진다.
호발귀가 싸우다가 골짜기로 떨어진 것 같다.
‘피가 길게 이어지고 있어. 귀무살이 아니라 문주놈이 흘린 핏자국이야.’
도천패가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호발귀는 이런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복수를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정이 생겼고, 호발귀가 상처를 입었다. 피를 꽤 많이 흘렸다.
정말로 호발귀가 귀무살에게 당했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호발귀는 귀무살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직접 검을 봐서 안다.
도천패는 핏자국을 따라 지평 초원 끝자락까지 왔다.
눈앞에 깊은 골짜기가 드러났다. 굽이쳐 흐르는 계류가 무척 차갑게 느껴진다.
‘여기로 떨어졌어.’
도천패는 수색과 판단을 끝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호발귀가 상처를 입고 골짜기로 떨어졌다. 그리고 귀무살이 쫓아 내려갔다. 즉, 호발귀가 귀무살에게 사로잡혔다.
호발귀가 귀무살에게 당할 리는 없고, 귀무살에게 당해주었다.
이것이 도천패의 판단이다. 호발귀의 무공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추측이다.
이럴 때는 타문파처럼 밀마라도 남겨놓으면 좋은데.
투심문은 밀마가 없다. 일인문파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전할 말 같은 건 애당초 필요 없었다.
투심문은 정보원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정보도 없다.
그러면서도 투심문주는 천하 정세를 어떤 문파보다도 자세히 꿰뚫어 본다.
날수수는 천하 정세에 관심 없었다. 그래서 정보를 등한시했다.
노야는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관심이 많았다. 상당히 많은 정보를 원했다.
그 정보들은 어디서 나왔나? 훔쳤다.
하늘로 날아가는 전서구를 가로채서 전통을 열어보고, 타 문파가 기록해 놓은 것들을 훔쳐보았다.
중원에서는 개방(丐幫)과 하오문(下午門), 천살단, 혈천방 등이 방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들 본문을 뚫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하지만 중도에서 살짝 가로채는 것은 일도 아니다. 배수의 손놀림이 꼭 재화를 훔치는 데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도천패는 정보를 훔치는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담을 넘는데 필요한 도구는 만들어 주었다. 상황을 판단하고 요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곳에서 복수를 끝낼 수 없으니, 혈천방으로 들어간다 이 말이지. 참 귀찮게 하네. 여기서 칼질 한 번 하면 문주놈하고도 인연이 끝날 줄 알았는데.’
“이봐! 혈천방 찾을 수 있어!”
도천패가 주치균에게 말했다.
여기서 어물거리지 말고 혈천방 본단을 찾아야 한다는 간접적인 조언이다. 그런데,
“이 자식이, 검주님이 누군지 알고!”
검벽 무인이 도천패를 향해 검을 뽑으려고 했다.
그때, 주치균이 재빨리 신형을 쏘아내서 검벽 무인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검주님!”
“네가 정녕 검벽 무인이냐!”
“……”
“눈앞에 죽음을 앞두고도 보지 못하다니. 네가 저 사람 칼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검벽 무인은 눈만 끔뻑일 뿐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 도천패는 무공이 읽히지 않는다.
도천패는 두말할 나위 없이 매우 강해 보인다. 바로 그 점이 무공을 가린다.
외형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칼을 메고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단지 힘센 장사가 힘만 믿고 날뛰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내공도 읽히지 않는다.
누가 되었든 도천패에게는 검벽 무인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
주치균이 무인의 목덜미를 놓고 도천패 앞에 섰다.
“혈천방을 찾으려고 노력 중인데, 왜?”
“왜는 왜야? 찾을 거면 내게도 말 좀 해주라는 거지.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그러지. 찾으면 연락하지.”
주치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너무 쉽게 대답하니까 오히려 안 믿기네.”
도천패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그때, 등여산 음성이 들려왔다.
“틀림없이 말해줄게요. 혈천방을 찾거나 호발귀 행적을 찾으면.”
“왔어?”
주치균이 등여산을 보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 덕분에 눈이 좀 트였네.”
등여산도 주치균을 보며 웃었다.
“밀마는 어떻게 된 거야?”
주치균이 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혈마록을 왜 보고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지평에 남아있는 호발귀 밀마를 물었다.
“난 안 가르쳐줬어.”
“정말? 간단한 것도?”
“아무것도. 내가 밀마 남기는 것을 보긴 했는데, 그 정도로 맥락을 짚어낼 줄은 몰랐네.”
“하! 그럼 이놈 천재네?”
호발귀가 남긴 밀마는 단 한 자다. 그것도 약간 틀렸다. 원 밑에 삐침이 있는 게 아니고, 옆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천살단 밀마를 혼자 짐작해낸 것은 분명하다.
남의 문파 밀마를 보는 것만으로 알아낸다?
“아무리 혈마록을 독해한 놈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네. 이 정도면 굉장한 천재지?”
“천재야.”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주변을 수색하던 검벽 무인이 보고해왔다.
“혈천방 본문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찾았습니다. 지평 위쪽에 길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