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혈기(血氣)(1)
슷! 스읏!
호발귀가 한 걸음 움직였다.
숲도 즉각 반응했다.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극히 미세한 소리가 풀잎을 흔든다.
‘역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슷!
호발귀는 다시 움직였다.
숲도 따라서 움직였다. 서둘지 않고 천천히, 차분히, 계획한 곳으로 움직인다.
‘하나, 둘, 셋.’
호발귀는 세 명까지 찾아냈다.
그가 사람을 찾는 방식은 독특하다. 기척이나 느낌으로 찾는 게 아니다. 허공에 흩어지는 생기로 찾는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게 그에게는 보인다.
산적을 베면서 생기 보는 법을 배웠다.
등여산은 그에게 아주 귀중한 무공을 알려주었다. 생기 보는 법은 장진 스님이 알려주었다. 하지만 사람을 베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은 등여산이다.
그 한 번의 살육으로 아주 큰 것을 배웠다.
참회동 석실에서 사 년 동안 수련하면서도 그토록 생생하게 생기를 본 적이 없다.
지금 그 효과가 고스란히 나타났다.
저들은 은밀히 숨어서 움직인다. 무공으로는 파악하지 못할 만큼 은신술이 뛰어나다. 하지만 호발귀는 환히 본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안다.
자발적인 움직임, 자동(自動)은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자동이 일어날 때, 생기도 움직인다. 움직이는 자는 진기를 사용하지만, 생기가 허공에 유포된다. 몸 주위로 흩날린다. 어떤 때는 파동으로, 어떤 때는 색깔로.
호발귀는 둘 다 본다.
파동도 느끼고, 색깔도 본다. 자신이 사용할 수 있으니 볼 수 있는 게 당연하다.
“웃기는 놈들이잖아? 모두 다섯인데, 둘은 움직이지 않아. 봤어?”
장진 스님이 어느새 나타나서 말했다.
스님 말대로 숨어있는 자는 다섯 명이다. 두 명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숨은 쉰다. 숨을 쉴 때마다 생기가 흘러나오면서 푸르스름한 색깔을 피워낸다.
“이 자들 움직이는 게 낯익지 않아?”
“낯익네.”
“어디서 봤어?”
“독림에서도 봤고, 산신각에서도 봤고. 후후! 딱 그 움직임이네. 이자들 귀무살이야.”
“귀무살 다섯 명. 괜찮겠어? 넌 두 명 정도면 괜찮다고 했잖아. 에구! 다섯.”
장진 스님이 혀를 찼다.
이래서 도천패를 데려오려고 했다. 이들 중 두 명만 도천패가 막아줘도 괜찮다 싶었다.
“안 도와줄 거지?”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스님한테 주먹질해달라는 거야? 싸움은 네가 알아서 해.”
“그럼 물러서 있어.”
스릉!
호발귀가 검을 뽑았다.
적이 숨어있으면 매우 당황스럽다. 하지만 숨어있어도 환히 볼 수 있다면 크게 염려되지 않는다.
쒯!
발목을 노리고 톱니바퀴가 날아왔다.
만자탈(卍字奪)을 세 개 정도 겹쳐놓은 것 같은 병기다. 회전력이 강해서 걸리기만 하면 발목이 날아간다.
슷! 타앙!
호발귀는 가볍게 톱니바퀴를 쳐냈다. 순간,
쒜에에엑!
이번에는 등 뒤에서 파공음이 울렸다.
땅에서 하늘로 벼룩처럼 툭 튀어 올라간 것이 있다. 소리 없이 올라간 벼룩은 전혀 기척을 흘리지 않고 조용히 덮쳐온다.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표홀히 떨어진다.
하지만 호발귀는 파공음을 들었다.
두 자루 낫에서 흘러나오는 예기가 공기를 뒤흔든다.
무인이 무공을 펼쳐서 들으면 듣지 못하는 소리이지만, 그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었다.
파라라랑!
묵사검이 부르르 떨렸다.
검을 움직이지 않고 혈천도법을 전개했다. 그러자 손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묵사검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요동쳤다. 붉은 기운도 몽실 피어났다.
쉐에에엣!
호발귀가 뒤돌아섰다. 묵사검은 어느새 움직여서 낫과 낫 사이를 파고들었다.
놀란 눈이 보인다. 크게 부릅뜬 눈에서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의심이 넘실거린다.
퍼억!
묵사검은 사내의 머리를 가르며 들어갔다. 정확하게 이마까지 탁! 치고는 빠져나왔다.
“크윽!”
사내가 비명을 쏟아내며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사방에서 각종 병기가 휘몰아쳤다.
호발귀가 뒤에서 공격한 자에게 반격하는 순간, 틈을 노린 병기들이 전신을 짓쳐왔다.
탁!
왼손이 퉁겨졌다.
검은 연기가 풀썩 피어나는 듯하다가 사라졌다.
호발귀는 저들의 공격이 방향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귀화미요공이 터지자, 일시 공격이 주춤했다. 시야를 잃자 자신감도 사라졌다. 이대로 계속 공격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모든 것이 저들의 마음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났다.
츠으읏!
묵사검이 검영(劍影), 잔영(殘影)을 남기며 쏘아졌다.
마영심도다. 마귀의 그림자를 남기면서 흐른다는 마영심도 십칠식이 일시에 쏟아졌다.
퍽! 퍼억!
묵사검이 십자창을 찔러오던 자의 턱 밑, 목을 쳤다. 그가 내지른 십자창은 가슴을 스쳐 갔다. 시력을 잃은 창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원래 쳐가던 방향대로 내지른 결과다.
촤아아악!
공격하던 자들이 일시에 물러섰다.
저들은 살인에 능통하다. 특히 기습을 잘한다. 언제 어떻게 공격해야 성공하는지 안다.
지금은 공격해서는 안 될 때다.
사위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방금 아주 신랄한 공격이 있었는데, 언제 무엇을 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다.
호발귀는 쓰러진 자들을 쳐다봤다.
낫 두 자루, 쌍겸(雙鎌)을 든 자가 머리가 갈라진 채 쓰러져 있다.
비단으로 만든 무복, 고급 가죽으로 만든 신발, 옥으로 만든 요대, 손목에 찬 아대까지 고급이다.
쌍겸도 아주 잘 만들었다. 살인 병기가 아니라 예술품이다.
옥으로 만든 자루, 흠 하나 없이 날카롭게 갈린 날, 순수 현철(玄鐵)인 듯 윤기 흐르는 쇠.
귀무살은 굉장히 좋은 대접을 받는다.
혈천방에서 옷을 아주 고급지게 입은 무인이 나왔다고 하면 바로 귀무살인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호발귀는 실망했다.
‘이 자들이 아니야.’
왕소와 동패를 죽인 자들, 노야를 자진케 하고 사부를 납치해간 자들이 아니다. 귀무살인 것은 맞다. 하지만 사람이 다르다. 그들 다섯 명은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십자창을 꽉 쥐고 쓰러진 자도 그때 그 귀무살이 아니다.
십자창을 쥔 손에 아직도 힘이 남아있다. 전신 진기를 오로지 창에만 집중시켰다.
창은 매우 빨랐고, 정확했다. 빈틈을 찾아냈고, 확신했으며, 망설임 없이 덮쳤다.
막아내기 매우 어려운 기습이다.
끄덕! 끄덕!
호발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무살이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 알겠다. 이들이 어떤 무공에 기초를 두었는지도 파악했다.
이들은 혈마 무공에 기반을 둔다.
소요귀명검법과 동영(東瀛) 인자술(忍者術)이 접합되었다. 혈천도법에서는 초식만 가져왔다. 마영심도도 버렸다. 대신 신법을 취했다. 이령귀화 대신 양의심공(兩意心功)을 사용한다.
혈천방은 혈마 무공을 잃어버렸다.
혈천방은 혈마 무공 대부분을 복원했다고 공언한다. 중원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이들이 펼치는 무공을 보면 혈마 무공과 흡사하다.
하지만 아니다. 짝퉁이다. 어쩌면 원본보다도 더 강한, 매우 실전적인 짝퉁이다.
무공은 세월이 흐르면서 발전한다. 더 빨라지고 강해진다.
옛날처럼 무식하게 수련하지 않아도 더 강한 위력을 떨쳐낼 수 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약도 발전했다. 수련방법도 효율적으로 바뀌었다.
귀무살은 혈마 무공을 버리는 중이다.
십자창, 창법은 혈마 무공에 없다. 쌍겸, 낫을 사용하는 무공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사용한다. 살인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병기를 찾아냈다.
무공도 낡은 것은 버리고 새것을 창안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혈마 무공의 진의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혈마 무공의 진의가 혈기라는 것을 파악하고, 사용한다면 다른 무공은 일절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스읏! 스스슷!
초원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움직인다.
그에게 은신술은 통하지 않는다. 귀식대법(龜息大法) 같은 것으로 눈속임해도 찾아낸다. 살아있기만 하면 찾아낸다. 오직 죽은 자만이 눈길을 속일 수 있다.
“음!”
호발귀는 움직임을 보면서 침음했다.
호발귀를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 저들이 공격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자신이 따라붙으면 저들은 죽는다.
귀무살을 굉장히 어려워했는데, 직접 손속을 부딪쳐보니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문제는…… 저들은 죽이면 추격 단서가 끊긴다는 데 있다.
사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등여산 말대로 저들 입을 열어야 하는데.
호발귀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귀무살에서 단서를 들을 만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사로잡아서 협박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런 수에 넘어갈 귀무살도 아니고.
‘어떻게 한다?’
호발귀는 귀무살을 빤히 보면서도 공격할 수 없었다.
“고문 수법은 없나?”
“고문 수법? 그건 네가 잘 알고 있잖아?”
“내가?”
“팔십일수. 그걸 잘 이용하면 분근착골(分筋錯骨) 같은 거 써먹을 수 있을걸? 문제는 저놈들이 뼈를 부러트린다고 해서 입을 여느냐 하는 거지.”
“말할 놈들이 아니야. 마참지 시술을 펼쳐도 안 될걸?”
“그럼 네가 알아서 해야지 뭐. 고문으로 안 된다면 다른 수를 써야 한다는 거잖아. 다른 수가 뭐가 있나? 알아서 해. 난 무공 외에는 관심 없어.”
장진 스님은 무공을 펼칠 때만 나타난다.
참회동 석실에 있을 때는 늘 옆에 붙어있었는데, 그러면 그만큼 무공을 많이 사용했나?
“간다. 저녁 예불을 해야지.”
장진 스님이 사라졌다.
해가 진다.
귀무살은 숨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호발귀도 움직이지 않았다. 묵사검을 빼든 채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인내의 싸움이다.
귀무살은 이런 싸움에도 익숙하다. 웬만한 싸움은 다 겪어본 백전노장들이다.
호발귀는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지평 옆에 물이 콸콸 흐른다. 기운이 아주 차다. 얼음물보다도 훨씬 차다.
물소리는 귀무살이 흘리는 숨소리를 숨겨준다.
역시 눈으로는 찾지 못한다. 귀로도 찾을 수 없다. 느낌으로 찾는 방법도 안 된다.
귀무살은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 있다.
하지만 기회는 항상 엿보고 있다. 일제히 공격해도 안 되는데, 무엇을 기다리나? 더욱더 완벽한 기습을 노리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그런 게 있나? 순간,
꽈악!
무엇인가가 호발귀의 발목을 꽉 깨물었다.
“응?”
호발귀는 놀란 눈으로 발을 쳐다봤다.
녹색 뱀이 발목을 물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최소한 십여 마리 정도가 발 주위로 모여들었다.
독사도 인간처럼 생기를 지니고 있다. 인간과 똑같이 푸르스름한 기운을 뿜어낸다. 그래서 약간만 주의하면 달려들기 전에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문제다. 세상에는 너무 생기가 너무 많다. 그래서 일부분은 일부러 보지 말아야 한다. 귀무살처럼 강력한 기운이 아니면 외면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외면한 것이 설마 독사일 줄은 몰랐다.
츳! 츠읏!
호발귀는 즉시 독기를 밀어냈다.
순간,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생기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기회를 잡았다는 듯 거침없이 몰아쳤다.
“웃!”
호발귀가 깜짝 놀라서 묵사검을 쳐들었다. 그때,
퍼억!
묵직한 병기가 등을 훑으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