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도천패(萄泉佩)(5)
황수를 건넜다.
도천패가 있어서인지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다.
배가 나루터에 닿으면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강하 모리배다. 내리는 사람이 만만하면 다짜고짜 주먹질부터 할 때도 있다.
그들에게는 아무도 다가서지 않았다.
“와! 예쁘다!”
나루터에서 놀던 아이가 등여산을 보고 감탄했다.
어른은 아이들처럼 말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눈길을 떼지 못한다. 하던 일을 하는 척하면서도 계속 등여산을 쳐다본다.
여인 뒤에는 이상한 사내 두 명이 따라붙었다.
한 명은 별 볼 일 없는데, 다른 한 명은 말을 섞기도 어려울 정도로 위압적이다.
“엉? 저, 저거 호발귀 아냐?”
“응? 아, 맞네. 호발귀. 저놈 아직 살아있었네. 패거리들은 죄다 죽었는데.”
“그리고 보니 저놈은 그 난리 날 때 코빼기도 안 비쳤어. 운 좋게 화를 피한 거지.”
강하 사람들이 호발귀를 알아보고 말했다.
“여긴 내 놀이터야.”
배에서 내리자마자 호발귀가 말했다.
“사 년 만에 왔으니 술 한 잔 받아줘야 마땅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곧 말술 떠줄게.”
이번 말은 허공에 한 말이다.
등여산은 호발귀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짐작했다.
호발귀에 대한 일들을 낱낱이 보고받았다. 길을 오는 동안 천살단에서 보내온 보고가 마차 하나 분량이 된다. 대부분 혈마에 대한 보고였지만.
호발귀에 대해서는 들을 것도 없었다.
그에 관한 보고를 모두 모으면 겨우 종이 한두 장 정도면 꽉 찰 것이다.
보잘것없이 살아왔다는 말이다.
“따라와!”
호발귀가 앞장서서 치달리기 시작했다.
쒜엑! 쒝! 쒜에에엑!
호발귀가 골목을 헤집고 돌았다.
만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가 골목에 나타날 것 같으면 잠시 쉰다. 그리고 다시 달린다. 그러면 묘하게도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데도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다.
스읏! 슷!
골목을 몇 바퀴 돌자 강하 도읍에서 쑥 빠져나왔다.
앞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땅이 억세서 농사도 짓지 못하고 억새만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여기로 들어가면 웬만해서는 안 보여. 아! 미안. 곰이 있는 걸 깜빡했네.”
“저, 저 자식이!”
도천패가 호발귀를 보면서 인상을 확 찡그렸다.
호발귀는 이미 억새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이 급한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치달렸다.
‘너무 조급해.’
등여산은 앞뒤 가리지 않고 치달리는 호발귀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등여산이 숨이 차서 헐떡일 정도로 빨리 달린다.
그녀의 내공이 낮은 게 아닌데, 쫓아가기가 버겁다. 초식은 몰라도 내공은 수련 기한을 무시할 수 없는데, 호발귀는 이런 상식마저도 깨버렸다.
놀라운 것은 도천패가 아주 가볍게 따라간다는 점이다.
도천패의 육중한 몸을 생각하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무척 굼뜰 것 같은데, 굉장히 빠르다.
호발귀가 걸음을 멈췄다.
앞에 검은 숲이 펼쳐졌다.
강하 사람들은 흑림이라고 부르고, 무인은 독림이라고 부르는 죽음의 땅이다.
“귀무살이 여기 있다고?”
“독림에서는 아무도 살지 못해. 귀무살도 마찬가지지. 독림을 지나면 지평이라고 평평한 땅이 나와. 귀무살은 그곳에 있어.”
“확실해?”
“두 명. 아침에도 확인했어.”
호발귀가 등여산을 쳐다봤다.
아침에 확인했다는 말은 이미 천살단 무인들이 독림 속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 된다.
등여산이 천살단과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용인까지 했다.
천살단이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책사가 혈천방을 치겠다고 나섰는데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가 도천패를 만날 무렵, 천살단에서 나온 고수들이 귀무살을 따라붙었다. 그렇다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귀무살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했을 것이다.
“독은 어때?”
호발귀가 도천패를 보며 말했다.
“이곳 독은 지독하다고 들었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싹통머리 없는 네 혓바닥보다 독하겠냐?”
“그럼 가지!”
쉐에에엑!
호발귀가 망설이지 않고 독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훕!’
등여산은 독림 독기에 현기증을 느꼈다.
아주 잠깐, 두 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는 느낌이 일어났었다. 곧 진기로 풀어냈지만.
‘독하다!’
독림 독기는 일반인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호발귀는 거침없이 들어간다. 마치 독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투다.
“음!”
도천패가 침음을 흘렸다.
도천패 역시 등여산처럼 힘들어한다. 독기를 내공으로 밀어내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여기.”
등여산이 피독단을 꺼내서 자신도 한 알 복용하고 도천패에게도 내밀었다.
도천패가 피독단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여기 안 와봤어요?”
“말만 들었지. 와보기는 처음이야. 말 나온 김에 나도 하나 묻지. 소저, 입장이 어떻게 되나?”
“입장요?”
“저놈 일은 대충 알고 있거든.”
“어디까지 알아요?”
“천살단 비자에게 잡혀간 것까지.”
“제가 누군지는 알아요?”
“아니. 그것도 궁금했고.”
“등여산이라고 들어봤어요?”
도천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무림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무림에는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 오직 노야와 날수수만 쳐다봤다. 나중에 호발귀가 나타난 후에는 그도 지켜봤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간여하지 않았다. 지켜보기만 했다. 보위니까.
“태산파. 알아요?”
도천패는 이번에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세상에! 칼을 든 무인이 태산파도 모르는 사람이 있나? 그러면 삼대 금나는 아나?
“쉽게 말하죠. 전 천살단 사람이에요.”
“그건 짐작했고.”
“어떻게 천살단은 아네요?”
등여산이 놀리듯 말했다. 사실, 놀릴 생각은 없었다. 무림에 대해서 너무 몰라서 다소 당황했다. 천살단을 말하면서도 이것도 모르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아! 그가 먼저 천살단 비자를 언급했지? 천살단은 안다는 거네?
그녀가 비웃듯 한 말에는 그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천살단 사람인 건 아는데, 천살단에 잡혀갔던 놈이 사 년 만에 나타났단 말이지. 소저처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을 것 같은 여자가 한낱 배수와 함께 움직인다? 이거 그림이 이상해.”
등여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천패는 아무것도 모른다. 호발귀가 혈마 무공을 수련한 사실도 모른다. 그들 사이의 특수한 관계, 투심문과 연관된 일로 동행한 것뿐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무척 길어요.”
“긴 이야기는 됐고, 입장만 묻는 거지. 저놈을 죽일 건가, 말 건가.”
“……”
등여산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됐어. 그 표정이면 대답이 됐네.”
도천패가 피식 웃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처음이야.”
호발귀가 어둠으로 물든 숲을 쳐다보며 말했다.
“독림을 다 돌아다닌 거 아냐? 왜 여기까지밖에 안 와봤는데?”
“여기서부터는 독이 달라.”
“그게 무슨 말이야? 독이 다르다니?”
“지금까지는 독물이 만든 독이었고,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만든 독이야. 그러니 더 지독해.”
“그것까지 알아?”
등여산은 호발귀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무인 중에서 자연 독과 인공 독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사천당문(四川唐門), 독곡(毒谷), 독검문(毒劍門) 등 독문 사람만 알아볼 수 있다.
호발귀는 배수 시절부터 알아봤다. 그렇다면 그때 이미 독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는 뜻이다.
비자는 이곳에서 혈마록을 잃어버렸다.
‘이제야 이해하겠어. 혈마록을 독림에서 잃어버렸다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호발귀는 무인도 힘들어하는 독림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사 년 전 사건이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
스읏! 스읏! 스으읏!
호발귀는 매우 조심스럽게 숲을 헤쳐나갔다.
“절대 풀을 만지지 마.”
“염병! 풀을 안 만지고 어떻게 숲을 헤쳐나가냐!”
반격에는 반격, 농담에는 농담, 호발귀가 한마디 할 차례다.
호발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경을 팽팽하게 곤두세운 채 묵사검으로 풀을 자르며 전진했다.
“훗!”
등여산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는 나무를 만졌다. 순간,
슷! 척!
어느새 호발귀가 옆으로 다가와서 나무 짚는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자신에게 기댈 수 있게 어깨를 내줬다.
“넌 괜찮아? 난 중독 초기야.”
“그때보다 더 독해졌어. 이곳에 천살단이 왔다고?”
“응. 오늘 아침에도 지평에 귀무살이 있는 걸 파악했어.”
“후후! 유인책이군.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어. 이 정도 독이면 아침에 왔다는 자들, 모두 쓰러졌어야 해.”
“너도 버티고 있잖아.”
“……”
호발귀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독에 면역력이 있거나, 피독주(避毒珠)처럼 대단한 물건을 지녔거나, 해약을 복용했거나, 독문 사람들처럼 독술을 수련한 게 틀림없다.
“안 되겠어. 물러나.”
호발귀가 등여산과 도천패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독림을 헤쳐나가지 못하고 있다. 독림을 지배하는 것은 단순한 독기가 아니다. 사람이 뿌린 독무(毒霧)가 숨을 쉴 때마다 침투한다.
등여산과 도천패는 이미 중독되었다.
아침에도 지금처럼 독무가 강했다면 독림을 오가는 건 불가능했다.
“혼자 괜찮겠냐?”
도천패가 물었다.
“두 명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게 유인책이라면 두 명 이상이야. 그리고…… 왜 유인할까? 나를. 천살단 책사도 아니고 나를. 이건 날 잡아야 한다는 거지. 내 무공을 본 거야.’
나중 말은 하지 않았다.
어디서 무공을 봤을까?
오는 도중에 무공을 드러낸 적이 몇 번 있는데, 산적을 죽일 때가 가장 적나라했다.
그때 혈마 무공을 봤다면, 아주 치밀한 조사를 했을 것이다.
천살단에만 간자가 있는 게 아니다. 혈천방에도 있다. 그러니…… 독림 너머에는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이 기다린다. 최소한 산적들을 죽인 무공쯤은 제압할 수 있는 함정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미안.”
등여산이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천살단은 독림에 퍼져있는 독을 분석했다. 그런 연후, 피독단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비자가 천살단이 만든 피독단을 복용하고, 독림을 오갔다.
피독단의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폐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져 오기 시작한다. 심장도 크게 벌컥거린다. 현기증은 진작 시작되었고, 점점 사지가 무력해진다.
“정말 혼자서 괜찮겠냐?”
호발귀는 도천패에게 빨리 가라고 손짓했다.
- 독을 모르면 뛰어난 배수가 못 된다. 물건을 감춰놓는 장소로 가장 좋은 데가 어딘 줄 아냐? 독사굴이야. 그 속에 던져놓으면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지.
투심문 문주는 독을 연구한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공(毒功)도 수련한다. 체내로 침투한 독기를 손끝에 모아서 방출하는 기공으로 독지공(毒指功)이라고 한다.
독이 배출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침투하거나, 독성이 강해서 배출이 쉽지 않을 때는 꼬리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처럼 독이 모아진 손가락을 잘라낸다.
호발귀는 독림에 들어설 적부터 독지공을 운용했다.
독무가 체내로 흘러들었지만, 왼손 중지를 통해서 빠져나갔다.
독림에 유포된 독무는 결코 피독단으로 막지 못한다.
스읏!
호발귀는 독림을 벗어나 지평이라고 불리는 평평한 초원, 언덕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