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39화 (39/500)

第八章 도천패(萄泉佩)(4)

“황수를 건너면 독림까지 바로 갈 거야. 피독단 필요하면 미리 말해. 준비해야 하니까. 귀무살은 독림 너머 지평이란 곳에 있어. 죽이면 혈천방을 못 찾으니까……”

등여산은 하던 말을 중단했다.

“좀 이따가 말하지.”

호발귀가 말을 중단시켰다.

등여산은 호발귀의 눈길을 쫓아서 앞을 바라봤다.

관도에 거한이 서 있다. 대도(大刀)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길가에 서 있다.

호발귀가 심상치 않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

‘누구지?’

등여산은 거한을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얼핏 봐도 굉장한 고수 같은데, 처음 본다. 무림에 거한 같은 자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다.

거한이 왜 길을 막아서는 거지?

호발귀가 무림에 나와서 시비를 일으킨 것이라고는 산적들을 죽인 것밖에 없다. 하오문도를 두들겨 패기는 했지만, 지금 긴밀하게 연락하는 사이라서 치고 들어올 리 없다.

그럼 저 거한은 누군가?

“여기 좀 있어. 쟤는 내 손님이야.”

“저기……!”

등여산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호발귀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말을 몰았다.

“왔네?”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은. 내가 형이다.”

“우리, 피가 섞인 건 아니잖아? 그러니 형제는 아니고…… 내가 문주, 당신은 보위. 내가 위야.”

“됐다! 됐다! 네가 위 해라! 문주놈이라고 불러줄게.”

도천패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휘저었다.

“그건 그렇고…… 난 찜찜한 건 정말 못 참는 성격이라서…… 노야가 죽고 날수수가 잡혀갔는데, 어떻게 강 건너에서 쇠나 두들길 수 있었어?”

“원망이냐?‘

”아니, 궁금하잖아? 노야께서 보위를 맡겼을 때는 나만큼 믿은 건데, 그런 사람이 가만있었다는 게.“

“난 귀무살 다섯 명을 당하지 못해. 또 편지를 받았다. 노야께서 자진하시는 날.”

호발귀는 이유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충노인 팔십일수 맨 뒷장에 도천패에 대한 이력(履歷)이 적혀 있다. 그가 누구이며, 투심문 보위를 어떻게 맡았는지까지 상세히 기술되었다.

그래서 안다. 도천패가 어떤 사내인지.

* * *

누이는 장사다. 힘이 넘쳐서 장정 두세 명은 거뜬히 들어 올린다. 하지만 몸이 황소처럼 크고, 얼굴이 많이 얽어서 여자로 보는 사내가 없었다.

지나가는 무인 서너 명이 누이를 조롱했다.

추녀, 돼지, 저 얼굴은 숫돌로 갈아야 평평해진다 등등 참기 힘든 말을 쏟아낸 것 같다.

누이가 무인을 메다꽂았다.

그러자 무인이 검을 뽑아 검초를 휘둘렀고, 누이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누이를 죽인 자들, 일일이 찾아서 때려죽였다.

도천패는 무공을 배우지 않았지만, 황소를 때려죽이는 힘이 있었다.

그의 손바닥은 웬만한 사람 얼굴보다도 넓다. 손을 쫙 펴서 후려치면 철판에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주먹으로 배를 치면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고, 오장육부가 뒤집힌다.

하지만 그들은 무인이다.

사문이 있고, 가문이 있다. 한 명당 족히 백여 명은 칼을 들고 일어섰다.

도천패는 궁지에 몰렸다.

활 맞고 칼에 베인 맹수처럼 이리저리 쫓기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 노야를 만났다.

노야는 도천패를 숨겨놓고 치료해 주었다.

“이놈 여기서 죽었네. 흔적도 안 남았어.”

추격자들은 숲에서 흔적을 찾아냈다. 도천패가 입고 있던 옷과 무인들에게 휘둘렀던 피 묻은 몽둥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숲 곳곳에 피와 살과 뼈가 흩어져 있었다.

늑대 무리에게 습격을 당해서 뜯어먹힌 것 같다.

추격은 완전히 끊겼다.

“천하에 다시 없는 근골인데.”

“아무리 근골이 좋아도 손이 느리면 필요 없잖습니까. 우리가 무공으로 명성을 날린 문파도 아니고 투심문인데.”

“일단 가르쳐볼까?”

“안 돼요. 척 보면 모릅니까?”

“그래, 너 잘났다. 이놈아! 너 잘나서 넌 척 보면 알고, 난 척 봐도 모른다!”

“꼭 우리 사람 아니면 어떻습니까? 괜찮은 무공 하나 줘서 보내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

도천패를 투심문 이십이대 문주로 만들고 싶은데, 불행히도 배수 능력이 없다.

배수 짓을 가르쳐보지는 않았지만, 손만 봐도 알 수 있다. 곰 발바닥 같은 손으로는 배수 짓을 못한다.

“무공 하나 줄게.”

“필요 없습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해. 우리에게 쓸만한 무공 많아. 어차피 저렇게 모아놔봤자 결국 똥 되는 것, 하나 가져라. 뭘 줄까? 검도창궁(劍刀槍弓). 원하는 거 말해봐.”

“기왕 줄 거면 칼을 주십시오.”

투심문에는 무공비급이 무척 많다. 전부 타 문파에서 훔쳐 온 비급이지만 금고 한쪽 편에 잔뜩 쌓여있다.

노야는 그중에서 도천패에게 어울릴만한 무공을 골랐다.

대도문(大刀門)에서 가져온 대력금강도(大力金剛刀)라는 도법이 있다. 대력금강도의 정화는 대력도강으로, 벼락이 내리치는 파괴력을 보인다고 한다.

마침 대도문은 멸절된 상황이다.

대도문도 모두 군벌(軍閥)에 관심 있었고, 군에 투신했다가 전장에서 죽었다.

대력금강도를 펼친다고 해도 알아볼 사람이 없다.

도천패는 노야의 비밀 거처에서 대력금강도를 수련했다.

노야의 안목은 옳았다.

도천패는 천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무공 귀재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친다.

도천패는 순식간에 날수수와 노야를 넘어섰다.

무공만 놓고 볼 때는 일파를 세우고도 남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에게 슬쩍 배수 짓을 가르쳤다.

하지만 천하역사 도천패에게 배수 능력은 없었다. 힘은 뭇사람을 짓누르는데, 빠른 손이 없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어르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어르신 곁에서 호위나 해드리겠습니다.”

“그럴 순 없지. 우린 일인 문파야. 후인이 아니면 아무 관계도 아냐. 호법 같은 건 안 키워. 뭘 바라고 무공을 준 건 아니니까 가서 마음껏 살아.”

“그럴 순 없습니다. 어차피 노야와 날수수 어르신은 절 내치지 못합니다.”

“왜?”

“절 이기지 못하잖아요.”

“헐!”

도천패는 우직하다. 하나 아니면 둘밖에 모른다. 살려주었으니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칼을 주었으니, 그 칼로 노야를 보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투심문이 가진 막대한 재화에 관심 없다.

그는 세상에 대한 흥미도 잃었다. 하나뿐인 누이가 죽는 순간, 세상도 죽었다.

남은 것은 생명을 구해준 보답뿐이다.

도천패를 옆에 두면 어떨까? 일인 문파가 무너진다. 그까짓 거 좀 무너지면 어때? 아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둘, 셋도 무너진다. 후일, 야망 있는 문주가 나타난다면 제자를 다수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셈이다.

옛날에도 이랬으니 또 이래도 된다고.

도천패가 투심문 후인이 되지 못한다면 남남이 되어서 헤어져야 한다.

“사부, 그럼 천패에게 보위를 맡기죠?”

사부, 날수수가 말했다.

그렇다. 도천패가 보위가 된 것은 사부 날수수가 보위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부의 오판이다.

하마터면 투심문은 역대로 감춰왔던 금고를 잃어버릴 뻔했다. 차기 투심문주가 도천패를 능가하지 못하면 금고를 열지 못하는데, 도천패를 누가 이긴단 말인가.

당시, 사부는 그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투심문주가 최대한 수련할 수 있는 무공의 원충노인의 팔십일수인데, 도천패가 펼치는 대력금강도를 능가할 수가…… 글쎄? 곰이 휘두르는 칼을 뚫고 들어가서 쇳덩이 같은 몸에 점혈(點穴)하는 수법이 통할까?

사부는 어떻게든 도천패를 떼어놓을 생각으로 덜컥 말한 것인데, 후인에게 매우 어려운 숙제를 남긴 셈이 되고 말았다.

보위라는 직위 역시 타인이 투심문 문도가 되는 것은 매일반이다. 일인문파의 규칙이 깨진다. 하지만 약대로 투심문은 보위를 허락해 왔다.

할 수 있으면 보위를 두어도 좋다.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는 거다. 황금이 가득 쌓인 보고를 문주가 아닌 문도에게 맡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생기면 맡겨도 좋다고 허락했다.

보고를 문도 전체에게 개방해? 미친 짓이다. 하루면 재화가 모두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한두 명에게 개방해? 그것 역시 살인을 불러온다.

돈은 요물이다.

이 세상에서 돈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있다. 도천패다. 그래서 그에게 보위를 맡긴 것이다.

* * *

‘뭐야?’

등여산은 난데없이 고수가 나타나자 아연했다.

호발귀에게 시비 거는 줄 알았는데, 친구였나? 호발귀 같은 배수에게 이런 친구도 있었나? 얼핏 봐도 그녀를 능가하는 고수인데, 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

“별호가 뭐에요?”

등여산이 물었다.

“그런 거 없어.”

도천패가 투박하게 말했다.

도천패는 몸이 터져나갈 듯이 크다. 팔뚝이 웬만한 사람 얼굴 크기다. 어깨는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넓다. 얼굴도 넓적해서 밤에 보면 곰처럼 보일 것이다.

등에는 아주 큰 칼을 메고 있다.

어깨 위로 손잡이가 올라와 있는데, 세 뼘이나 된다. 칼의 넓이가 한 뼘, 길이는 무릎까지 닿는다.

솔직히 칼을 빼기도 힘들어 보인다.

등여산은 도법으로 유명한 문파나 가문을 떠올려봤다. 상당히 많은 문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어떤 문파도 도천패가 휴대한 대도는 사용하지 않는다.

도법으로 유명한 무인은 어떤가?

역시 많은 도객이 생각난다. 대부분 보지는 못했고, 책에서 읽은 무인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 대도를 사용하는 자는 많아도, 도천패 칼처럼 크지 않다.

“사문도 말해줄 수 없어요?”

“그런 거 없다니까.”

도천패가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말 안 해준다고 모르지는 않아. 시간이 걸릴 뿐이지.’

천살단은 중원 모든 무인을 파악하고 있다. 중원 초출(初出)이라면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면 곧 알게 될 것이다. 누군지, 어떤 무공을 사용하며, 호발귀와는 어떤 관계인지.

천살단은 강하를 건널 배로 작은 배를 준비했다. 호발귀와 등여산만 생각했기 때문에 큰 배가 필요 없었다. 비자들이 황수를 넘나들 때 사용하는 소선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곰처럼 우람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무래도 소선으로는 강을 건널 수 없다. 적어도 범선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은밀히 들어가기는 틀렸네.”

등여산이 거한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거한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도 모르는 듯 따뜻한 날씨를 즐겼다.

“거참 날씨 한번 좋네. 이런 날에는 괴기 잡아서 탕이나 끓여 먹으면 딱 좋은데.”

거한이 신발을 탁탁 털며 말했다.

등여산은 강하로 들어갈 생각을 하는데, 거한은 날씨만 즐겼다.

“중원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생각은 없고?”

호발귀가 강가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물었다.

호발귀 역시 강을 건너가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일은 등여산 몫이라는 듯.

“정말 너,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지거리 계속할래? 정말 문주놈이라고 불러줘? 아가, 내가 형이다, 응?”

“몇 살?”

“일곱이다. 일곱.”

“난 여섯. 한 끗 차이네.”

“이놈아, 그 한 끗 사이에 강산이 하나 껴있어! 이게 어디서 어린놈한테 날 찍어 붙여!”

“나 문주라니까?”

“알았다! 문주놈아!”

“대답을 잊은 거야, 피하는 거야?”

“내 목숨 하나 구해준 게 뭐 죽을 만큼 고맙겠냐? 그런 건 하나도 안 고마워. 이따위 세상 빨리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죽을 길을 막아버렸으니 원망만 들지.”

“그런데?”

“그 노인네, 가심(珂心)이 시신을 가져다가 태워줬지 않냐. 그게 고맙지. 그게 고마워서 이러는 거지.”

도천패도 팔베개하고 누웠다.

옛날, 도천패가 복수하면서 몇 명 죽였을 때, 무인들은 누이동생의 시신을 묘에서 꺼내 길가에 걸어놓았다.

장대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린 시신 앞에 무인 천여 명이 늘어섰다.

그들은 누구든 시신을 손대는 자는 자신들과 싸우자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들이 떠난 후에도 시신을 손대는 사람은 없었다.

날수수가 시신을 빼돌렸다.

속임수를 써서 시신을 내린 후, 바로 그 자리에서 소각했다.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더는 모욕도 주지 못하게.

“노인네들이 오지랖은 넓지.”

호발귀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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