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도천패(萄泉佩)(3)
“오늘은 수련 안 해?”
“그런 거 할 필요 없을 것 같네.”
등여산이 차갑게 말했다.
“사람 죽이는 건? 그것도 됐고?”
“왜? 또 죽이고 싶나 봐?”
“오늘은 신경이 날카롭군. 내가 침묵하지.”
“그래. 그래 줬으면 좋겠어. 기왕이면 강하 갈 때까지 침묵해줘.”
호발귀가 등여산을 쳐다봤다.
등여산은 아예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래도 호발귀가 정도 무인이 될 수 있다고 기대했던 것 같다. 어쩌면 정도 무림에 인재 한 명 얻은 것일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호발귀는 악마다.
사람을 죽이면서 그렇게까지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은 처음 봤다. 죽는 모습,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지켜봤다.
호발귀는 인간이 아니다.
호발귀의 실체를 알게 되자, 그와 함께 길을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내가 미쳤지. 실전 경험이 없었으면 참회동에서 몰아쳐도 죽일 수 있었는데. 괜히 피해가 클 것 같아서 머리를 쓴다는 것이…… 내 꾀에 내가 넘어갔어.’
귀무살을 죽이는 일은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해주지 않는다. 기왕이면 귀무살과 싸우다가 심한 상처를 입었으면 좋겠다. 같이 죽거나.
정심음고를 심어놓기는 했지만 사용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워낙 고통스럽게 죽으니까.
따각! 따각!
침묵 속에서 말을 몰았다.
다행스럽게도 호발귀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군. 너도 있구나.’
호발귀는 타고 가는 말에서 생기를 느꼈다.
말도 생기가 있다. 자신이 가진 것과 같은 종류의 생기를 가지고 있다.
말은 원정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생기를 느끼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느낄 수는 있지만 보지는 못한다.
산 사람은 생기를 깊숙한 곳에 감춰놓고 있다. 죽은 사람은 이미 흩어지고 없다. 그러니 생기는 금방 죽어가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다.
사람?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동물이 생기를 지닌다.
호발귀는 말 목에 손을 대고 말의 호흡을 감지했다. 호흡이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지 느꼈다. 기운이 흘러나와 전신에 퍼지는 것을 감지했다.
말은 기운차다.
“후후!”
말의 생기를 느끼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앞서가던 등여산이 힐끔 뒤돌아봤다. 난데없는 웃음이 신경을 건드린 듯하다.
호발귀가 웃자, 등여산은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일이면 황수를 건널 거야.”
“음!”
호발귀의 눈가에 반짝 이채가 빛났다.
호발귀는 황수를 건넌 적이 없었다. 늘 강하에서만 살았다. 비자에게 잡혀서 황수를 건너기는 했지만, 그때는 혼절한 상태라서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
황수가 지척이란다.
자신이 이미 강하 근처에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귀무살이 독림에 있어?”
“두 명.”
“두 명? 그럼 나머지는?”
“두 명에게 캐내야 해. 그러니까 무조건 죽이면 안 돼.”
등여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는 호발귀를 살인에 미친 사람으로 본다. 눈길과 표정이 딱 그렇다. 혐오스러운 사람을 볼 때처럼 인상을 찡그린다. 굳이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내일 황수를 건너간다면 오늘은 푹 쉬겠군. 쉬고 있어. 난 근처나 돌아보고 오지.”
“어디를 가려고……?”
등여산이 깜짝 놀라서 일어섰다.
그녀는 호발귀가 누군가를 죽이러 간다고 생각했다. 이미 살인에 맛 들였다고.
“훗! 내가 주변 좀 돌아다닌다는 게 이렇게 긴장할 일이었나? 긴장 풀어. 강하에서 살았지만, 황수 건너는 처음이야. 이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호발귀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일어섰다.
* * *
호발귀는 대장간을 찾았다.
까앙! 까앙! 깡!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대장간을 운영하는 자는 도천패(萄泉佩)라는 자다.
덩치가 곰처럼 크고 우람하며 힘이 장사라서 인근 마을에서는 시비 거는 사람이 없다.
물론 무인은 아니다.
평생 병기를 만들며 살아왔지만, 병기를 다룰 줄은 모른다.
스읏!
호발귀는 대장간으로 들어섰다. 그때!
“누가 들어오라고 했냐!”
대장간에서 쩌렁 일갈이 터져 나왔다.
호발귀는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주춤 멈춰 섰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봤다.
“영업 끝났다! 볼일 있으면 내일 와!”
곰처럼 우람한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정말 크다. ‘곰처럼’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곰이다.
“뭐 부탁하러 온 거 아닌데?”
호발귀가 도천패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뭐야! 빨리! 빨리빨리 말해!”
도천패는 일을 다 끝냈는지, 들고 있던 망치를 대장간 한쪽 구석에 던졌다.
꽈앙!
망치를 던졌을 뿐인데 지붕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거참 사내자식이 몸을 왜 비비 꽈? 답답하게 뜸 들이지 빨리 말해! 안 할 거면 꺼지고!”
도천패가 채근했다.
“과세기도객(跨世紀刀客).”
도천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발귀가 말했다.
세기를 넘나드는 칼잡이!
순간, 도천패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호발귀를 쳐다봤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냐?”
“원충노인의 팔십일수.”
“이런 염병!”
도천패가 신경을 팍! 부렸다.
“훗!”
호발귀는 피식 웃었다.
‘염병’이라는 말…… 노야나 날수수를 겪은 사람은 입에 달고 살게 되어 있다. 늘 듣는 말이 그 말이라서 자신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다른 말도 있었을 텐데? 읊어봐라.”
“부주금전적주인(不做金錢的主人), 취득주금전적노예(就得做金錢的奴隸). 돈이 내 하인이 아니면 내 주인이라는 뜻인데. 난 하인 주인 할 만큼 많은 돈을 만져본 적이 없어서.”
“돈 받으러 왔냐?”
“그런 셈이지.”
“그럼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알아봐야지? 돈이라는 요물을 그냥 줄 수는 없잖아!”
도천패가 대장간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곧 손에 맞을 법한 철판을 집어 들었다.
칼을 만들려고 녹여놓은 철판이다.
스릉!
호발귀는 묵사검을 뽑았다.
“돈은 어디 있어?”
“이기면 가져가고, 지면 뒈지고.”
“지면 죽는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거 당신이 만든 규칙이야? 누구 마음대로 규칙을 덧붙여?”
“흐흐! 쫄리냐? 그럼 꺼져!”
스읏!
호발귀가 검을 들어 올렸다.
원충노인의 팔십일수는 무척 오래된 고서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새로 붙인 종이가 있었다. 도천패에 관해 기술해 놨는데, 내용이 꽤 길었다.
도천패는 보위(保衛)다.
투심문 금고를 지키는 금고지기다.
투심문 문주는 도천패를 통해서 금고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도천패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는 방법이 없으니, 반드시 그에게 들어야 한다.
노야가 남겨준 투심문 철패는 문주의 상징이자, 금고를 여는 열쇠다. 그리고 그 열쇠는 지금 천살단에 있다. 아마도 형옥주가 가지고 있거나, 물품을 보관하는 곳에 있을 것이다.
도천패가 금고 위치를 넘겨준다고 해도 열 방법이 없다.
그래도 찾아왔다.
어차피 ‘부주금전적주인, 취득주금전적노예’라는 말은 도천패에게도 해당한다. 주인이 되거나 노예가 되거나, 굴복시키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다.
페에에엑!
철판이 몸통을 후려쳐왔다.
“웃!”
호발귀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도천패의 기세는 주치균을 능가한다. 철판의 위세, 빠르기, 강렬함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다.
파앙! 파아앙!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팡! 터졌다.
대장간에 돌풍이 회오리쳤다. 철판이 일으키는 기세에 숨이 콱 막혔다.
‘칼도 아닌데 대단하다!’
호발귀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보다 더 강한 충격을 느꼈다.
그는 도천패가 일으킨 생기를 봤다. 너무 강렬해서 한 눈에 확 드러난다.
이런 사람은 굳이 내공을 일으키지 않고 천력만 사용해도 바위를 부술 수 있다. 무공을 수련한다면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패력(覇力)을 토해낼 것이다.
쒜에에엑!
철판이 호발귀를 짓뭉개버릴 기세로 내리쳐졌다. 순간,
우르르릉!
호발귀의 왼손에서 우렛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왼손이 내리치는 철판을 곧바로 받아 갔다.
“죽으려고!”
꽈르르릉!
도천패는 철판에 더욱 강한 힘을 주었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해서 내리친다.
도천패가 무공을 수련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했나?
도천패는 무공을 수련했다. 절정 도법 대력도강(大力刀罡)을 터득했다.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
도천패가 내리친 철판과 호발귀가 일으킨 우렛소리가 부딪쳤다.
꽈앙! 퍼억!
대장간이 터져나갈 듯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둔탁한 파육음도 이어졌다.
“큭!”
도천패가 신음을 흘리며 비틀 물러섰다.
“내가 투심문 이십이대 문주 호발귀야.”
호발귀가 묵사검을 거두며 말했다.
사실, 도천패를 물러서게 한 것은 구뢰마권이 아니다. 귀명검법이다. 구뢰마권으로 철판, 대력도강을 막았다. 그 사이에 묵사검으로 귀명검법을 펼쳤다.
도천패는 복부를 베였다.
심한 상처는 아니다. 검이 살짝 배에 생채기만 냈다.
“검 한번 좋군. 이러니 왔겠지. 원하는 걸 말해?”
도천패가 철판을 놓으면서 말했다.
“너.”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지금부터 혈천방을 없애려고 해. 그런 곳은 이 세상에서 지워버려야지. 좀 도와줘.”
“후후! 잘 모르나 본데, 보위(保衛)는 문주 생사에 간여하지 않는다. 무림에도 관심 없고. 금고를 달라면 당장 주지만, 힘을 달라면 거절이다.”
원래 투심문은 보위를 두지 않는다.
금고는 원형 그대로 땅속에 묻혀 있다. 금고(金庫)의 고는 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곳간을 말한다. 금고 위치는 철패를 건네주면서 귓속말로 전해졌다.
한데 날수수는 철패만 주었다. 금고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
노야가 규칙을 바꿨다.
노야는 도천패라는 금고지기를 두었다. 금고 위치를 제삼자에게 알려준 셈이다. 투심문은 사람을 절대로 믿지 않는데, 정말 희한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괜히 중간에 한 사람을 더 두었는지…… 하지만 도천패를 만나보니 알겠다.
도천패는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금고를 눈앞에 두고도 동요하지 않는다. 대력도강이라는 절정 도법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도 무림에 나서지 않는다.
돈과 명예를 탐하지 않는다.
도천패는 대장장이로 만족해한다. 이렇게 사는 게 즐겁다는 표정이다.
노야가 사람을 옳게 봤다.
도천패, 욕심나는 자다.
“나는 내일 강하로 들어가.”
호발귀가 무심히 말했다.
“같이 가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말고. 내일 오지 않으면 나도 다신 찾지 않아. 보위는 오늘로 해제하지. 금고는 마음대로 해. 열쇠는 없지만, 열쇠 없다고 문 하나 못 딸까.”
호발귀가 도천패를 뒤에 남겨두고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