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도천패(萄泉佩)(1)
등여산과 호발귀가 마주 앉았다.
“가볍게.”
스읏!
등여산이 손등으로 호발귀 얼굴을 쳤다.
그녀가 말한 대로 가벼운 손놀림이다. 고개만 살짝 젖혀도 충분히 피할 수 있다.
호발귀는 손을 사용했다.
손등과 손등이 부딪쳤다. 순간, 호발귀는 손등을 밀어서 등여산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오므려서 오추(五錐)를 만든 후, 등여산의 얼굴을 찍었다.
“이건 당랑권과 비슷한데, 오추 모양이 달라. 엄지손가락을 가운데 밀어 넣었으니까 오추가 아니고 사추네? 이렇게 하면 오추보다는 힘이 덜 들어갈 텐데?”
“대신 빠르지.”
탁탁! 타탁탁! 타타타탁! 타타탁!
두 사람은 조금씩 손을 빨리 쳐냈다.
“지금부터는 변화를 줄 거야.”
슈우우웃!
등여산의 손길이 무척 빨라졌다. 더불어서 호발귀의 손길도 빨라졌다.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손을 뻗어낸다.
금나(擒拿)는 접촉에서부터 시작한다.
상대방이 내 몸을 건드렸을 때, 혹은 내가 상대방을 잡았을 때부터 금나술이 펼쳐진다. 꺾고, 당기고, 조르고, 돌리고, 비트는 모든 동작이 접촉하지 않고는 이어질 수 없는 동작들이다.
이것이 원천적인 금나다.
여기에 지법(指法)과 수공(手功)을 더한다.
손가락으로 찌르고, 누르고, 할퀴고, 튕겨낸다. 수도나 역날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막고, 밀어내고…… 손으로 할 수 있는 공방이 무척 많다.
태산금나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
소림금나는 강하고 억세고 역동적이며, 태극금나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한다.
태산금나는 파우롱도(把牛弄倒)라도 부른다. 소를 잡아서 넘어트린다는 뜻이다. 아주 작은 힘으로 소도 넘길 수 있는 큰 위력을 떨쳐낸다.
타탁! 타타탁! 타타탁! 타타타탁!
손과 손이 연이어 겹쳤다.
호발귀는 지법에는 지법으로, 수공에는 수공으로, 금나에는 금나로 맞선다.
‘어느 것 하나 밀리지 않아!’
등여산은 상당히 놀랐다.
호발귀는 펼치는 수법은 소림금나나 태극금나가 아니다. 태산금나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면서도 삼대 금나와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이것도 장진 스님이 가르쳐준 거야?”
“아니. 원충노인의 팔십일수.”
“원충노인? 무림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이 참 많네?”
“투심문 조사(祖師).”
“아! 원충노인이 조사야? 그렇구나. 그런데 이런 무공이 왜 아직 무림에 나타나지 않았지? 이런 무공이면 정식 문파를 세우고도 남을 텐데.”
“자신이 없었던 거지.”
“정말 그럴까? 사부나 노야라는 사람이 정말 이 무공의 진가를 몰랐을까?”
타타탁! 타타타타탁!
등여산은 무척 빠르게,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서 태산금나를 떨쳐냈다.
손가락이든, 손목이든, 팔이든 잡히기만 하면 날아간다. 어떤 혈이든 걸리기만 하면 멍이 들 정도로 찍힌다. 수도(手刀)가 손목을 친다. 관수(貫手)가 손바닥을 뚫는다.
기가 막히게도 호발귀는 이 모든 수에 대응했다.
“인제 그만. 지쳤어.”
“잠깐만. 조금만 더.”
“왜? 뭐 깨달은 거라도 있어?”
“써보고 싶은 게 있어서.”
“해봐. 뭔지 모르지만.”
순간, 호발귀의 손에 붉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혈천도법!’
등여산은 바싹 긴장했다.
호발귀가 팔십일수에 혈마 무공을 섞었다. 혈마 심공으로 팔십일수를 펼친 듯하다.
쒜에에에에엑!
호발귀가 손을 뻗어내자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파공음이 울렸다. 더불어서 붉은 그림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탁! 탁! 탁! 탁!
호발귀가 정확하게 그녀의 손등을 치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진기를 주입하지 않아서 타격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손등을 친다는 느낌은 분명히 전해졌다.
‘이거였어!’
주치균이 이 공격을 받고 묵사검을 놓쳤다.
호발귀도 그때는 무의식중에 공격을 펼친 것 같다. 지금은 하나씩 체계를 잡아나가는 중이다.
등여산은 좋은 실전 상대다.
석실에서 아무도 없는 허공에 손질하는 것보다 훨씬 얻는 게 많다.
등여산이 반응해준다. 반격한다. 호발귀가 뻗어낸 손을 차단하고, 때리고, 꺾는다.
살아있는 사람과 싸운다.
호발귀는 반 시진 동안이나 정신없이 손을 쳐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장진 스님이 오랜만에 나타나더니 대뜸 핀잔부터 했다.
“수련하잖아.”
“저 여자를 죽이랬지, 누가 같이 수련하랬냐?”
“또 그 소리!”
“내가 이래 봬도 앞날을 쪼끔 봐. 이 여자랑 얽히면 더러운 꼴 당한다니까.”
“벌써 얽혔어.”
“더 얽히기 전에 죽이라고.”
“왜 이렇게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야? 도대체 이 여자가 뭘 어떻게 하는데?”
“널 죽일 거야.”
“……”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 널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날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많아. 너무 많아서 탈이다. 당장 귀무살만 해도 그래. 복수하러 가긴 가는데, 어떻게 싸워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쪽이나 조언해 줘.”
“이 여자부터 죽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 하나만 대봐. 그럼 죽일게.”
“아!”
장진 스님이 갑자기 탄식했다.
“왜?”
“그만두자. 저 여자, 벌써 죽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네.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 있지. 이 여자, 혈마록을 다 해독하면 불문곡직 너부터 죽일 거야. 왜 그런지는 묻지 마. 분명히 그럴 테니까. 그래도 못 죽이지?”
“그건 이유가 안 돼.”
“네가 살인마가 되면? 그때도 안 죽일까?”
“살인마 같은 거 안 돼.”
“아미타불! 아미타불! 넌 살인마가 되게 되어 있어. 혈마 무공은 마공이야.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심성이 사악하게 변한다고. 아직 때가 안 돼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언젠가는 눈만 뜨면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날걸?”
“내가 수련한 게 혈마 무공이야?”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기는. 혈마 무공이지, 그럼 달마 무공이냐?”
“혈마 무공을 어디서 배웠어? 왜 내게 혈마 무공을 가르쳐 준 거야?”
“사람 참 간사하기는. 떡 달랄 때는 언제고, 이제 배부르니까 왜 떡을 줬냐고 난리네. 너 이거 배울 때는 좋다고 난리 친 거 기억 안 나? 정말 이렇게 간사하기야?”
“혈마 무공을 알면, 혈마록을 풀이해주면 안 될까? 이게 무슨 뜻인지나 알게.‘
호발귀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이래! 오늘 내가 아무래도 잘 못 왔나 보네. 간다!”
팡!
장진 스님이 사라졌다.
요즘은 잘 보이지도 않더니, 불쑥 나타나서는 등여산만 죽이라고 난리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와 어린아이 것은 빼앗으면 안 돼.’
호발귀는 고개를 내둘렀다.
등여산은 눈을 끔뻑였다.
호발귀가 오랜만에 장진 스님이라는 자와 대화를 한다.
혼자서 중얼중얼한다. 호발귀가 되었다가 장진 스님이 되었다가, 일인이역을 소화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아기 옹알거림 같아.’
귀를 기울여 봤지만, 전혀 알 수 없는 소리다.
장진 스님…… 장진 스님이 뭘까? 왜 나타난 것일까?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는데.
“아!”
등여산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탄성을 내질렀다.
조금 전, 호발귀가 혈마 무공을 펼쳤다. 팔십일수에 혈천도법을 섞었다.
그래서 장진 스님이 나타난 것이다.
장진 스님은 혈마록의 정기(精氣)다.
‘장진 스님을 처음 만난 게 혈마 무공을 알기 전이라고 했어. 처음에는 그냥 주먹밥만 주었다고.’
등여산은 호발귀에게 들은 말을 상기했다.
호발귀가 무공을 배운 순서는 장진 스님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호발귀는 혈마 무공을 수련하기 전에 장진 스님을 만났다. 밥 주는 사람이 스님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저 주먹밥만 주었다고 했다.
혈령이 밥 주는 사람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등여산은 다른 생각을 했었다.
호발귀가 자신이 외운 혈마록 열 권을 자신도 모르게 풀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참회동에 갇히면서 강한 무공을 간절히 원했고,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혈마록을 풀어낸 게 아닐까?
혈마록이 점점 풀이된다. 그러자 장진 스님이 나타난다. 장진 스님이 무공비급을 줄 때, 호발귀는 이미 구결을 이해했다. 초식도 들여다보게 봤다. 아는 무공이 생겼다. 그러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수련한다. 자신도 모르게 손발을 놀린다.
호발귀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혈마 무공을 수련했다지만, 나쁜 무공을 수련한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한 방어기제일 뿐, 이미 혈마 무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호발귀가 또 다른 인격을 만들어 냈다는 게 설명된다.
하지만 이 생각에는 중요한 게 빠졌다.
혈마록을 풀이할 수 있다는 것!
누구도 풀이할 수 없는 혈마록을 고어라고는 단 한 글자도 모르는 배수가 풀이했다는 것.
등여산의 생각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인정해야만 가능해진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
호발귀는 장진 스님을 먼저 만났다. 그리고 나중에 혈마 무공을 수련했다. 그 무공들이 어디서 나타났나? 머릿속에 들어있는 혈마록이 작동했다.
여기까지는 분명하다.
호발귀가 혈마록으로 환상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장진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것도 확실하다.
지금까지 확실한 것은 이것뿐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확실하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기에 혈령(血靈)이라는 말로 덮어씌운다.
그중 제일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호발귀는 혈마록 열 권을 반나절 만에 외웠는데, 도대체 어떻게 외웠냐는 것이다.
등여산은 사 년 동안이나 혈마록 일 권을 연구했다. 하지만 아직도 외우지 못했다.
천재 소리를 듣는 사람도 외우지 못한 것을 한낱 배수가 외웠다. 말도 안 되는 분량을 단숨에. 그리고 고어도 읽지 못하면서 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호발귀가 중원 제일의 천재인가? 아니다. 제아무리 천재라도 외우지 못한다. 더욱이 반나절 만에 열 권이라니. 불가능함을 넘어서 신기하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혈령이라는 말을 써야만 한다.
호발귀가 외운 것이 아니다. 혈마록이 주인을 택한 것이다. 혈마록 글귀가 호발귀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혈령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움직였다.
‘이걸 다 외우면 혈마록이 작동하나?’
등여산은 호발귀가 적어준 혈마록 종이뭉치를 만졌다.
호발귀처럼 열 권을 모두 외우면 혈마록이 작동할까? 장진 스님 같은 존재가 나타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등여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열 권을 다 외워도 혈마록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혈마록이 주인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혈령이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 혈령이 존재한다. 혈령이 호발귀를 이끌고 있다.
- 호발귀에게 귀신이 붙었다.
- 호발귀가 [이백 년 전 천하를 피로 물들이던 혈마와 접촉했다. 장진 스님이 혈마 분신이다.
모두 같은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니 생긴 말들이다.
혈기, 혈령…… 혈마를 이해하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많이 동원해야 한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호발귀를 보면 전혀 마성을 보이지 않는데, 혈마는 왜 그토록 미쳐서 날뛰었던 것일까?
그때 무인들은 분명하게 말했다.
- 혈기는 사람이 건드릴 수 없는 생명 원천이야. 그걸 건드렸으니 미쳐서 날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