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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34화 (34/500)

第七章 공조(共助)(4)

필양은 인구 이만 명 정도의 작은 도읍이다.

교통이 뛰어나지도 않고, 주변에 유명한 농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낮이고 밤이고 끊임없이 사람이 모인다.

필양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암시장이다.

좌대에 늘어놓고 파는 물건이 아니라 비밀리에 어두운 곳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이 있다.

주로 도둑들이 훔쳐 온 장물이거나 마약, 인신매매, 거래가 금지된 살병(殺兵) 등인데, 필양에서는 제대로 찾기만 하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들리는 말로는 갓난아기부터 대포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구할 수 있다고 한다.

필양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대략 사오백 년 전에 암시장이 형성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말을 구할 거야.”

등여산은 필양 거리를 익숙하게 걸었다.

호발귀에게도 필양은 낯설지 않았다. 처음 와본 도읍이기는 하지만 분위기가 강하와 비슷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사. 돈 있어.”

“……”

호발귀는 고개를 끄덕여서 대답했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곳에 왔는데, 술 한잔할래? 취하면 버리고 갈 거고, 안 취할 정도만.”

“술 못해.”

“술을…… 못해?”

“안 마셔봤어.”

“술을?”

“……”

“참 희한한 사람이야. 술 안 마신다는 배수는 처음 봐.”

그녀가 웃었다.

호발귀도 술이란 것이 무척 궁금했다.

날수수는 늘 술에 절어서 살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술병을 집어 들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한두 모금은 꼭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면서 호발귀에게는 엄격히 금주 명령을 내렸다.

- 이건 안 지켜도 좋아. 네놈이 마시겠다면 마시는 거지. 단순한 충고야. 술을 마시면 말이다. 손이 떨려. 나야 다리 병신이니 두 번 다시 손 쓸 일이 없다만, 너는 앞길이 창창하잖냐. 부지런히 손 놀리려면 술 마시지 마.

술 마시면 죽이겠다는 명령보다도 더 엄격한 충고다.

그래서 왕소, 동패와 함께 술자리를 가질 때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물을 술 대신 마셨다.

그때는 다른 건 다 포기해도 배수만은 포기하지 못했다.

남의 것을 훔치는 재미보다, 손을 빠르게 움직이는 재미가 훨씬 컸다.

수작을 부렸는데 남이 알아채지 못할 때, 날수수가 가르쳐준 수작이 제대로 통했을 때, 특히 무인이 알아채지 못했을 때의 쾌감은 술을 독째로 들이켠 것보다 강렬했다.

세간에 나오니 강하 시절과 자꾸 연결된다.

연결되는 것이 또 있다.

골목 모퉁이에 서 있는 사내, 전병(煎餠) 파는 곳에서 사 먹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내, 다루(茶樓) 난간에 걸터앉은 점원, 그리고 어느새 곁으로 바싹 다가선 사내.

느낌이 딱 배수다. 이들에게는 자신과 등여산이 ‘손님’으로 보인 모양이다.

호발귀가 말했다.

“전병 냄새가 구수하군.”

“사줄까?”

“아니. 냄새가 괜히 구수해서 해 본 말.”

그때, 사내가 등여산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지나갔다.

순간, 다른 곳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한 명은 슬그머니 전병이 담긴 바구니를 잡았다. 난장 필 준비를 한다. 등여산이 배수 짓을 눈치채고 달려들면 즉시 전병 바구니를 뒤집어서 주위 이목을 집중시킬 생각이다.

골목 어귀에 있던 자는 배수와 교차하며 지나갔다. 등여산 품에서 빼낸 전낭을 넘겨주는 역할이다.

사내는 다시 점원과 교차한다.

지극히 짧은 순간에 전낭이 사람 손을 세 번이나 거쳤다.

툭!

호발귀는 길 가는 사람에게 떠밀려 점원과 부딪쳤다.

“거 조심 좀 하지!”

점원이 눈을 부라렸다.

“아! 미안.”

호발귀는 싱긋 웃었다.

“없어!”

“없어?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빼냈는데!”

“아! 그놈!”

“뭐? 뭔 소리야?”

“나랑 부딪친 놈이 있어. 내가 얼떨결에 화를 내는데, 미안하다며 웃고 가더라고.”

“그게 왜?”

“그놈 무인이야.”

순간, 네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점원이 화를 냈는데, 무인이 미안하다면서 웃고 지나가? 이건 좀 이상하다. 보통 무인들은 그런 식으로 사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멱살을 움켜쥘 것이다.

“제길! 그럼 그놈한테 당한 거야?”

“우리 물건을 가져갔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가자. 물건 찾아야지.”

그들은 일어섰다.

“이제 다 왔어.”

등여산이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두 사람을 앞뒤로 에워쌌다.

한두 명이 아니다. 앞쪽에 십여 명, 뒤에도 십여 명쯤 늘어섰다.

“뭐죠?”

등여산이 눈가를 상큼 치켜뜨며 말했다.

그녀는 사내들에게 말하기 전, 호발귀 눈치부터 살폈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를 건드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호발귀는 혈마의 마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피를 보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아! 이거 생각이 달라지네.”

사내는 등여산을 보자마자 입이 쭉 찢어졌다.

등여산은 굉장한 미인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빼어나다.

등여산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 한눈에 봐도 잘 먹고 잘사는 부잣집 여자다. 인근 마을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여자니 먼 길을 온 게 틀림없다.

절대로 그냥 보낼 수 없다.

대체로 이런 여자는 호위를 데리고 다닌다. 아마도 뒤에 서 있는 사내가 호위인 듯싶다.

놈은 훤칠한 키에 강인한 모습이다. 주먹질 좀 해 본 듯 다부져 보인다. 하지만 손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았다. 검을 잡아본 손이 아니다.

그런데도 놈은 꼴값을 떠느라고 허리에 검을 찼다.

“굉장한 여자네. 어디서 이런 여자가 나타났지? 아까는 왜 몰라본 거야?”

“돈은 치우고 여자만 데려가자.”

“돈을 왜 치워? 묵직했는데. 다 가져가야지.”

“아! 그렇구나! 다 가져가는 수가 있구나. 킥킥!”

사내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보듯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그러자 호발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웃기는 놈들 아닌가? 뭐가 이렇게 난잡해? 배수 짓을 하든가, 파락호를 하든가. 둘 다 하겠다는 거야? 소매치기도 하고 강도질도 하고? 염병! 뭐 이렇게 지저분한 놈들이 있어?”

“뭐? 이 자식이!”

뒤에 늘어선 사내가 발끈했다.

그 말이 신호였다. 호발귀가 비호처럼 움직였다.

퍼억! 퍽! 퍽퍽퍽!

몸을 움직이는데, 몸이 두 개로 보인다.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다른 형체가 생긴다.

주먹이 명치에 틀어박혔다. 올려친 발길질에 관자놀이를 격타당했다. 어깨, 등, 머리, 전갱이…… 손과 발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타격한다.

‘이게 무슨 무공…… 이지?’

등여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호발귀가 펼치는 무공을 알아보지 못했다.

혈천방 무공은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연구했는데, 진정 처음 보는 무공이다.

퍼억! 퍽! 퍽!

뒤를 막아섰던 사내 십여 명이 큰 숨 한 번 들이쉴 동안에 피떡이 되어서 쓰러졌다.

“으으으……!”

“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좁은 골목은 한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없다. 호발귀는 살수를 쓰지 않았다. 다리를 부러트리고, 기절시키고, 팔을 꺾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혈마 무공이 아니야!’

등여산은 호발귀를 빤히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남자 아닌가. 뭐가 이렇게 까도 까도 계속 나와. 다 알았다 싶으면 또 다른 게 나오고…… 한낱 배수라는 자가 뭐가 이리 신비해?

호발귀가 펼친 무공은 가볍게 웃어넘길 무공이 아니었다.

등여산은 아주 잠깐이지만 호발귀의 신형이 두 개로 보였던 현상을 잊지 않았다.

굉장히 빨랐다. 혈천도법처럼 빨랐지만, 혈영(血影)이 보이지 않았다. 혈마 무공이 아니다. 전혀 다른 무공, 마성이 없는 무공이다. 그러면서도 혈천도법과 비교된다.

“어! 어!”

앞쪽을 막아섰던 자들이 깜짝 놀라서 도주하려고 했다.

“지금 도망가면 모래알을 캐버린다.”

그 말에 사내들이 움찔거리더니 뚝 굳어버렸다.

‘모래알?’

등여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래알’이라는 말은 어떤 조직의 은어인 것 같은데, 그녀는 처음 듣는 말이다.

한데 그 말을 듣자 하오문 필양 분타 패거리로 짐작되는 자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도망가지 않으면 얻어맞을 것은 분명하고, 자칫 죽을 수도 있는데 남았다.

“사, 살려주십쇼.”

“고수님을 몰라뵈고 죽을죄를……”

“시끄럽고.”

호발귀의 한 마디에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딱따구리가 누구야?”

“저, 접니다.”

가장 뒤쪽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자가 마지 못해서 손을 들었다.

“모두 조용히 가. 시끄럽게 굴지 말고. 넌 나 좀 보자.”

호발귀가 손든 자를 가리켰다.

호발귀는 딱따구리라고 말한 자와 한참 동안을 이야기했다.

좁은 골목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조곤조곤 낮은 음성으로 대화를 나눴다.

강하 하오문, 분타주 장기충, 배수, 하오문 총타…… 두 사람이 말하는 중에 툭툭 튀어나온 말이다. 호발귀가 묻는 말은 너무 낮아서 들리지 않았고, 딱따구리가 한 말만 토막토막 들렸다.

‘강하에서 있었던 일을 묻고 있어.’

등여산은 호발귀와 딱따구리라는 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짐작했다.

한데…… 하오문 필양 분타 패거리가 왜 골목에서 앞을 가로막았지? 아무 충돌도 없었는데?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품을 뒤적였다.

호발귀가 배수였던 탓에 혹 배수 짓을 당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전낭은 고스란히 있다.

‘잃어버린 게 없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얼굴색이 차게 변했다.

옷이 찢어져 있다.

‘이것들이!’

그녀는 벽에서 등을 떼고 딱따구리라는 자에게 달려가 한바탕 쏘아붙이려다가 생각을 돌렸다.

평소 같으면 배수가 어떻게 그녀 몸에 손을 댔겠는가. 옷깃이라도 건드린다면 즉시 알아챈다. 전낭을 빼내기 전에 손목이 비틀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산금나의 전인에게 배수 짓을 한다는 것은 팔을 꺾어달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몰랐다?

모를 수밖에 없다. 그녀의 눈을 가린 사람이 호발귀다. 그가 아니면 눈을 가릴 수 있는 자가 없다.

‘언제……?’

등여산은 골목길로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 그때!’

호발귀가 뜬금없이 ‘전병 냄새’ 운운했다.

그때 잠시 신경을 풀었는데, 아마도 배수가 그 순간을 노리고 손을 쓴 모양이다.

‘전낭을 다시 빼앗아서 내 품에…… 뭐야! 그럼 내 가슴에 손을 넣었다는 거야!’

그녀는 다시 화가 불끈 치솟아서 호발귀를 쏘아보았다.

호발귀는 딱따구리 간에 이야기가 길어졌다.

강하 이야기를 잠깐 묻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상당히 오래 이야기한다.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해?’

호발귀는 의도적으로 하오문 필양 분타 배수들을 끌어들였다. 처음부터 그들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고, 필양에 와서 배수들을 보는 순간 결정한 듯싶다.

딱따구리가 일어섰다.

그는 호발귀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서 인사까지 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면 여자는 찍지 마라. 치사하게 여자 물건까지 손대냐?”

“죄송합니다.”

“가!”

“네.”

딱따구리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후에 총총히 사라졌다.

“무슨 이야기 했어?”

“우린 적이야. 서로 할 일만 하자고. 언제든 내 목을 노릴 사람이잖아.”

“그렇긴 해. 그런데 아까 그자들, 내 전낭 훔쳤지? 그쪽이 다시 훔쳐서 내 품에 넣었고.”

“아니.”

“아니?”

“그런 일 없어.”

호발귀가 시치미를 뚝 떼고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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